루스는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카자크와 마찬가지로 많은 역사학자들이 지금은 "루스" 이름이 BC 2세기부터 키이우 남쪽 우크라이나 중부에 정착한 사르마티아 부족 록솔라니에서 유래한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지역에는 로스, 로사와, 로스타비차, 루테츠 등과 같은 이름을 가진 강이 있다.
오래전부터 루스는 키이우, 체르니히우, 페레야슬라프 공국 즉 오늘날의 키이우, 지토미르, 체르니히우, 수미의 일부, 체르카시, 빈니차, 폴타바 주의 중앙 우크라이나에만 사용되었다. 12세기부터는 우크라이나 서부까지 확장되었다. 대공들은 루스가 그들의 고향('봇치나' 유산)이라고 믿었다. 다른 속령들은 루스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키이우 루스의 시대에는 우크라이나 백성을 루시니(드물게 루시)라고 불렀다. 루신이라는 이름은 18세기까지 우크라이나 중부에서, 20세기까지 할리치나(갈리치아)와 부코비나에서, 그리고 오늘날까지 자카르파탸(숩차르파티야)의 일부 지역에서 지속되었다.
나중에 러시아 민족과 벨라루스 민족이 생겨난 키이우 국가의 외곽은 12세기까지 키이우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나 몇 세기 후까지 루스로 불리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의 이념가들은 루스의 수도가 노브고로드에서 키이우로, 그 후 키이우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했다는 신화를 만들려고 시도해왔다. 그러나 바랑기아인은 6세기 고트족 출신 역사가 요르다네스의 글과 시리아 작가 세우도-자카리아스 레토르의 작품에서 우크라이나와 관련해서 지칭했기 때문에 루스 이름을 가지고 올 수 없었고, 바랑기아인은 잠시 8세기 후반에만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
12세기 초,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의 테살로니키의 성 드미트리오스 모자이크
모스크바 공국에서 '러시아'라는 용어는 우크라이나 땅을 점령하려는 생각이 나돌기 시작한 15세기에 들어서야 당국에 의해 이 나라와 관련하여 지칭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는 루스가 우크라이나 영토라는 것이 당시의 상식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어에서 따온 것이다.
모스크바 공국은 1713년과 1721년 차르의 명에 의해 마침내 '러시아'로 개명되었다. 18세기 후반, 여제 예카테리나 2세는 채찍질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신분을 밝히도록 명령했고 관습적으로 '모스크바인'이라 부르는 것을 금지했다.
볼린 공국의 로만 므스티슬라비치(12세기 후반) 시대부터 갈리치아-볼린 공국의 모든 군주들은 "루스 땅의 군주와 통치자"라는 이름을 가졌고, 그들의 인장에는 "루스의 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수즈달(현재의 모스크바 심장부)의 군주인 안드레이 보골륩스키(Andrei Godlover)는 "수즈달의 모든 땅의 통치자가 되고 싶어 했다"라고 전해진다.
16세기와 17세기에 우크라이나 카자크는 이스탄불에 대한 그들의 원정을 키이우 대공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상대로 시작한 원정의 연속이라고 여겼다. 유명한 수장 보흐단 크멜니츠키(생애 1596-1657년)는 공식 문서와 외교 서신에서 "루스의 통치자"로 불렸다. 18세기에 우크라이나에서 쓰인 작품 "루스 민족의 역사"는 루스의 우크라이나적 성격을 명확하게 강조했다.
가장 저명한 우크라이나 작가인 타라스 셰브첸코(생애 1814-1861)는 그의 작품에서 '러시아'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항상 모스크바 공국을 언급했다. 우크라이나어에는 인위적인 단어인 로시야니 '러시아인'이 있고, 고유 형용사 루스키 '루스'는 중세 키이우 국가와 연관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크라이나어에는 모스크빈, 모스칼, 모스칼루크, 모스칼렌코 등과 같은 가문 및 별명이 많이 있으며 로시야넨코, 로시야누크 등 같은 이름은 없다.
모스크바 공국(러시아)의 기원
키이우 국가는 모스크바인(러시아인)의 조상들이 하자르인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을 없애고 그들에게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가르치고 기독교 문화를 소개했다. 그러나 12세기 중반에 모스크바의 선조들이 키이우에서 떨어져 나와 그들만의 국가인 수즈달(Suzdal)을 세웠으며, 나중에 모스크바 공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국경은 핀우그리아 부족 메랴의 경계였다. 키이우 대공들은 그들의 막내아들을 보내 그곳을 다스리게 했다. 수즈달 군주들은 힘을 키울 수 있었고, 루스는 스텝 민족과의 투쟁에서 지쳐갔다.
12세기 이후 위대한 므스티슬라프 대공의 후손들은 대체로 키이우에게 종속된 우크라이나와 스몰렌스크, 노브고로드를 지배했고, 모노마흐의 막내아들 유리 돌고루키(긴 팔의 유리)의 후손들은 잘레시에(지금의 모스크바 또는 러시아)를 점차 독립적으로 통치했다.
안드레이 보골륩스키 공은 "역사 무대에 오른 최초의 위대한 러시아인"이다. 그의 두개골을 기반으로 재건한 20세기 흉상
돌고루키의 아들인 안드레이 보골륩스키(Andrei God-Lover)는 쿠만 칸 아예파의 딸인 쿠만 여인의 아들로 태어나 아시아 스텝 민족 특유의 특징을 지녔다. 키이우에 맞서 싸우는 동안, 보골륩스키는 루스의 주요 적이었던 그의 친족인 쿠만족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유리 돌고루키는 거의 평생을 잘레시에에서 살았으며 키이우를 장악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골륩스키는 "루스에는 우리를 위한 자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키이우와 키이우 지역을 자신들의 유일한 고국으로 인정한 3세기에 걸친 류리크 군주들의 전통을 처음으로 깼다. 보골륩스키는 위대한 므스티슬라프를 위해 비잔티움에서 가져온 유명한 성모상(나중에 블라디미르의 테오토코스라고 알려짐) 이콘을 훔쳤다. 보골륩스키는 키이우 인근의 비슈호로드에서 블라디미르-온-클랴즈마로 운반했다.
1169년 보골륩스키가 보낸 군대가 키이우를 포위했다. 성벽에서 3일간의 격렬한 전투 후, 침략군은 유르코비차 언덕을 넘어 도시 방어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키이우 대공에게 봉사하던 유목민 베렌데이와 토르키가 배신했다. 수즈달의 군주는 도시를 점령하고 완전히 황폐화시켰다. 연대기는 그의 군대를 이교도라고 부르는데, 그들이 온 중앙 러시아 땅에서 기독교화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골륩스키는 위대한 므스티슬라프의 후손인 키이우 왕조의 대공들을 오랜 영토에서 몰아내고, 나중에 갈리치아-볼린 공국의 시조가 되는 로만 므스티슬라비치를 물리치기 위해 노브고로드에 대한 캠페인을 계획했지만, 수즈달 군대는 대패했다.
키이우 지역에서는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았던 군주인 용맹공 므스티슬라프 2세(이자슬라프 2세의 아들, 위대한 므스티슬라프의 손자, 볼로디미르 2세 모노마흐의 증손자)가 저항세력을 이끌었다. 그는 수즈달 군주의 사신에게 머리와 턱수염을 깎으라고 명령했다.
1172년 보골륩스키는 수즈달, 랴잔 등의 전사들로 구성된 5만 명의 강력한 군대를 소집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중세 연대기에 언급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였다. 수즈달군은 비슈호로드에서 용맹공 므스티슬라프를 포위했다. 루스 군대는 9주 동안 성벽과 도시 근처에서 공격자들과 싸웠다. 1173년 초겨울, 비슈호로드에서 수즈달 군대가 패배했고, 곧이어 보골륩스키는 수즈달에서 그의 잔인함에 반기를 든 공모자들에게 살해되었다.
교회는 수즈달 군대를 패배로 이끈 용맹공 므스티슬라프를 성인으로 만들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노브고로드 주민들은 자신들을 다스리도록 그를 초빙했지만,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루스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수즈달 군주들이 루스와 그 속령 노브고로드와 스몰렌스크를 장악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키이우는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키이우 국가에 속한 모든 땅의 수도로 남았으며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중심지였다.
용맹공 므스티슬라프의 아들인 번영공 므스티슬라프 므스티슬라비치는 1216년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군대를 리피차 강에서 격파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수즈달 군주와 나중에 알렉산드르 넵스키를 낳은 그의 형제 야로슬라프는 전장에 군대 전체를 남겨 둔 채 속옷 차림으로 도망쳐 7마리의 말을 녹초가 되게 만들었다. 키이우 대공들의 공격으로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은 무너졌다.
도주한 블라디미르-수즈달 군주가 리피차 전투 현장에서 20 km 떨어진 곳에 사슬 갑옷과 함께 버린 투구. 투구는 19세기 초에 한 농부 여성에 의해 발견되었다.
출처 : Radio Lem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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