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600년 튀르크의 확장
튀르크족의 기원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알타이 산맥 주변 지역은 아마도 4세기 이후에 출현하기 전의 천 년 기(AD 1-1000년을 지칭) 동안, 그들의 발전 과정에서 일반적인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오손(烏孫)과 같은 집단에 대한 역사적 설명은 그러한 기원에 대한 명확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는 잠재적으로 그들이 원시 몽골어 또는 퉁구스어족의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그들의 개인과 부족 이름에서 볼 수 있는 인도 이란어파의 많은 영향에도 극도로 개방적이게 했을 것이다.
그들 옆과 이란 동부 문명 지대의 북쪽 끝에는 원시 불가르-튀르크어의 인큐베이터로 추정되는 지역이 있었다. 인도 이란어파의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은 이 집단은 7세기 폰토스 스텝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오노구르-불가르족과 많은 다른 부족들이 포함되었고, 게다가 근처의 에프탈을 이끌고 이란 동부의 대부분을 정복할 키다라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때때로 최초의 진정한 튀르크족으로 칭송받는 괵튀르크족의 기원은 439년 간쑤성(甘肅省) 동부에 존재했던 아시나(阿史那) 부족에 있다. 이 위치는 튀르크 인큐베이터 지역에서 7세기까지 수 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회랑을 통해 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아시나족은 508년까지 가오창(고창) 주변과 유연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을 수 있도록 그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552년에 유연을 타도하고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500년경 인도
광대한 굽타 제국은 이 시기에 인도 북부의 대부분을 포함했지만, 남쪽은 국경을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는 작지만 끈질긴 왕국들로 이루어진 꽤 안정적인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500년 중앙아시아 및 인도
400년대 후반에 사산 제국의 동쪽 지역은 에프탈(훈족)이 샤 페로즈 1세를 죽인 후 넓은 영토가 점령되었다.
상황은 565년 에프탈이 몰락할 때까지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고, 인도 북서부(현재의 파키스탄)에 상당한 규모의 훈족이 주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마르기아나와 같은 지역에 괴뢰 통치자들이 세워지고, 간다라 지역에 몇몇 소규모 훈 공국들이 지원 및 장악하고 있다.
500-600년대 인도 북서부의 훈족
키다라족 은화 생산의 중심지는 간다라와 오디야나(또는 우다야나)로, 알려지지 않은 특정 지역에서 4-5개의 조폐국이 운영되고 있었다. 유통 지역은 적어도 카불리스탄(카불 지방)에서 탁실라까지 뻗어 있었다.
스와트에 있는 불교 기념물인 부트카라 스투파에서 6개의 키다라 드라크마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그곳의 조폐국에서 생산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은 드라크마 외에도, 동화는 현지 시장에서 소규모 거래에 사용되었다. 가장 중요한 발견 장소 중 하나는 간다라 북부에 있는 카슈미르 스마스트의 힌두 동굴 단지로, 그곳에서 수많은 키다라 동화가 발견되었다.
5세기 중반 이전에도, 최초의 훈족 침략자들에 의해 확립된 키다라족의 정체성은 점차적으로 4세기 말에 카불리스탄에 정착한 알콘족의 정체성으로 발전하고 있었고, 곧 인도 침공에서 에프탈과 함께 카이버 고개를 넘어 동쪽의 간다라와 탁실라로 그들의 통제 영역을 확장했다.
추가 사료
타인의 얼굴(The Countenance of the Other) -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훈족과 서부 튀르크족의 주화 (서부 히말라야의 문화사)
550-600년 중앙아시아
광활한 스텝에서 기마 전사가 세운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종종 그랬듯이, 괵튀르크 카간국은 남동쪽으로 강력한 중국 왕조와 북쪽으로 시베리아의 불청객인 툰드라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서쪽으로 확장하여 광대한 영토를 빠르게 통합했다.
600-700년 중앙아시아
7세기 초까지 중앙아시아 남부의 괵튀르크 세력은 쇠퇴하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카간국 본국이 당나라에 예속되었기 때문이다. 사산 왕조는 인도 이외의 대부분 지역과 함께 이 지역의 최남단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지만, 세부 사항은 대체로 불명확하다.
철 관문(Iron Gate)으로 토카리스탄과 분리된 소그디아나와 이웃한 페르가나에서는 6세기 후반 다수의 도시국가들이 출현했다. 이는 7세기 동안 강화되었고, 처음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부실한 기록으로 불일치의 정도가 가려질 수 있음). 그러나 7세기가 지나면서 그들은 더욱 분열되어 우위를 다투게 되었고, 또한 서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우마이야 칼리파국과 싸웠다.
칼리파국은 처음에는 단편적으로 정복하거나 복속시키려 했지만, 짧은 대외 팽창기를 향유하던 당나라와 갈등을 빚었다. 다양한 중국 보호령들은 보호 완충 지대를 제공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안서도호부가 아마도 가장 크고 가장 오래 유지되었을 것이다. 몽지도호부(濛池都護府)은 이전의 괵튀르크 영토를 잠식했고, 결국 투르게스 튀르크족은 서부 괵튀르크 세력의 핵심 잔재를 형성했다.
900년경 인도
900년의 인도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더 큰 국가들의 일반적인 분포 측면에서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제는 작은 국가나 부족들에 의해 훨씬 더 분열되고 지역적으로 통치되었다.
출처 : The History F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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