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민족주의적 자존심, 상호 동맹은 모두 전쟁으로 발전할 긴장을 구축하는 데 한몫했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지속된 제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의 참상과 독가스 및 탱크와 같은 치명적인 신기술을 세계에 알렸다. 그 결과 1,600만 명 이상의 군인과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대학살 중 일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지도는 급격히 바뀌었고, 수세기 동안 존재했던 광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및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그 자리를 대신할 새로운 국가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마지막 총성이 울린 지 한참 후에도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격변이 계속되었고, 결국 20년 후 더 크고 유혈이 낭자한 또 다른 세계 분쟁이 발발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재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1차 세계대전이 사실 18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련의 사건들의 정점이었다고 말한다. 전쟁에 이르는 길에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 많은 오산과 행동들이 포함되었다.
캔자스시티에 있는 국립 제1차 세계대전 박물관 및 기념관에서 한 영화의 내레이션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결국 왜 그랬는지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일 것이다."
다음은 전쟁으로 이어진 8가지 사건이다.
1. 프랑스-러시아 동맹 (1894년)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굴욕을 당한 프랑스와 러시아는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 및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독일 세력의 부상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상호 보호를 위해서도 힘을 합치기로 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측이 되는 삼국 협상의 시작이었다.
올버니 대학의 역사학과 부교수인 리처드 S. 포가티는 "1894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 1904년의 영국-프랑스 협상과 1907년 영국-러시아 협상의 단계적 결합이 외교 협정 체계를 굳건히 하여 1914년에 발발한 전쟁에서 주요 적대 세력을 형성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명한다. "동맹 체계는 전쟁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했으며, 전쟁을 일으키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이는 국제적 경쟁과 경쟁에 대한 일련의 기대를 만들어냈고 유럽인들이 어떤 전쟁을 상상하고 준비했는지를 결정했습니다."
2. 최초의 독일 해군 법 (1898년)
이 법안은 독일의 신임 제국 해군 장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주창하여 독일 전투함대의 규모를 급격하게 확대했다. 이 법은 영국 왕립 해군보다 우월한 군대의 양성을 구상한 독일의 증강을 지시하는 다섯 개의 법률 중 첫 번째였다.
2018년 저서 '1차 세계대전 : 문학의 역사 탐구'의 저자이자 드폴 대학의 역사, 평화, 정의, 갈등 학부 부교수인 유진 베이리거는 "티르피츠는 독일이 원하는 조건으로 영국이 독일과 동맹을 맺도록 강요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대신 영국은 더 많은 선박을 건조하고, 일본, 프랑스, 러시아와 동맹을 맺기 위해 1880년대 후반의 "영예로운 고립" 정책을 끝내는 것으로 대응했다.
베이리거는 이메일에서 "독일 해군 법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영국 정부와 대중 모두를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3. 러일 전쟁 (1904-1905년)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해군과 상선들이 태평양에 접근할 수 있는 항구를 확보하고 싶어 했고, 그는 그 부지로 한국을 염두에 두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증가하는 공격성을 위협으로 보고 청나라 뤼순(여순)항에 있는 니콜라이의 함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그 결과 중국의 해상과 육상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였고, 베이리거가 언급한 대로 유럽의 세력 균형을 바꾸는데 도움을 주었다.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와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은 1904년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독자적인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는 이후 러시아가 영국과 동맹을 맺도록 설득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베이리거는 "동방에서 러시아의 팽창은 일본에 의해 중단되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는 러시아의 야망을 서쪽으로, 특히 발칸반도로 돌리게 했고 정부 내 강경파들이 훗날 위기에도 물러서지 않도록 영향을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호전성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합병 (1908년)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지만 1878년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가 영토를 합병한 후, 이러한 움직임은 역효과를 낳았다. 두 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슬라브계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갖고 싶어 하는 반면, 인근 세르비아의 슬라브 인들은 그 지방을 직접 차지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국립 1차 세계대전 박물관 및 기념관의 수석 큐레이터인 도런 카트는 "다민족 제국에서 민족주의 열정은 멀리 있는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을 부채질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러시아 슬라브인의 지원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치에 저항했던 발칸반도에서는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스스로를 세르비아의 수호자로 여기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정권과 점차적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5.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년)
프랑스와 독일은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프랑스-영국 동맹을 압박하기 위해 개입한 모로코를 놓고 몇 년 동안 정면으로 충돌했다. 1905년 제1차 모로코 위기 때, 그는 프랑스의 이익에 반하는 모로코 술탄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탕헤르로 향했다. 그러나 영국은 분쟁에서 물러나는 대신 프랑스를 지지하며 일어섰다.
1911년 제2차 모로코 위기 당시 독일 외무장관 알프레드 폰 키데를렌베히터는 프랑스가 모로코를 장악하기 위한 구실로 지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부족 반란에 대응하여 모로코 해안의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순양함을 보냈다. 영국은 다시 프랑스를 지지했고, 결국 독일은 모로코에서 프랑스 보호령을 인정하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의 위기는 영국과 프랑스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고, 결국 독일과의 대결을 재촉했을 뿐이다.
6.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 (1911년)
포가티는 1861년이 되어서야 시작된 현대 이탈리아 국가가 "영국, 프랑스, 그리고 다른 강대국들을 세계 제국으로 만든 쟁탈전에서 대부분 소외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이탈리아 정부는 다른 서유럽 열강이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북아프리카 지방 리비아를 주목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빼앗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은 평화 조약으로 끝났지만, 오스만 군대는 리비아를 떠나 이탈리아가 식민지화하도록 놔두었다. 이 전투는 공중 폭격을 특징으로 하는 최초의 군사 충돌이었지만, 포가티가 언급했듯이 진정한 의미는 오스만 제국의 흔들림과 주변 영토에 대한 미미한 통제권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포가티가 다음과 같이 묘사한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요인 중 하나였다. "일부는 팽창 중이거나 확장하려 하고, 일부는 가진 것을 고수하려는 열망, 다른 이들은 그들에게 남은 것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는 제국들의 전쟁이었습니다."
7. 발칸 전쟁 (1912-13년)
1800년대에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된 세르비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발칸 동맹이라 불리는 연합체를 결성했다.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동맹은 발칸반도에 남아 있는 튀르크의 영토를 더 많이 빼앗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가 오스만 군대를 물리치고 휴전 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발칸 동맹은 곧 해체되었고,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를 두고 그리스와 세르비아와 싸웠고, 오스만 제국과 루마니아도 불가리아와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불가리아는 결국 패배했다. 발칸 전쟁은 이 지역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이 떠난 힘의 공백 속에서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그 동맹국인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언젠가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포가티는 "많은 역사학자들은 발칸 전쟁을 제1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시작으로 여깁니다"라고 말한다.
8.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 계승자인 대공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주둔 중인 제국군을 시찰하기 위해 사라예보로 갔다. 그와 그의 아내 조피는 차 안에서 19세의 세르비아 혁명가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포가티는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들이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너무 온건하고 제국에서 슬라브 민족을 유지하게 할 권력 분담 협정을 조장할까 우려했기에 그를 죽이고 싶어 했다는 점에 주목하며 "이 암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분열시키고 있던 민족주의를 부각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포가티는 "그의 암살은 처음부터 현실적이었든 아니든 그 생각을 없애버렸고, 세르비아의 저항과 적어도 세르비아와 관련하여 민족주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려는 오스트리아의 결심을 급진화시켰습니다"라고 말한다.
대신, 유럽 열강이 위기에서 서로 다른 편을 들면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영국의 제국 전쟁 박물관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암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수호자로 여겨졌던 러시아 모두를 곤경에 빠뜨렸다. 그들 중 누구도 물러서지 않고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두려워하여 독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무력을 행사할 경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의 지원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틀 후, 러시아군이 동원되었고, 독일군은 그들 역시 곤경에 처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를 동시에 상대하며 두 전선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가 싸울 준비가 되기 전에 프랑스군을 전쟁에서 제압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했고, 이틀 후 프랑스에 선전포고 했다. 독일군은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중립국인 벨기에 국경에 집결하여 국경을 넘기로 계획했다. 벨기에는 도움을 요청했고, 8월 4일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출처 :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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