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여 년 전인 1914년 8월 4일,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주요 전투가 시작되었다. 대전은 1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렸으며, 미국이 세계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 왜 분쟁이 시작되었는지, 연합군이 어떻게 이겼는지, 그리고 세상이 예전 같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40개의 지도가 있다.
주요 유럽 전투
14.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 정복
전쟁의 명목상 원인은 반오스트리아 테러를 지원한 세르비아를 응징하기 위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노력이었고, 1915년 합스부르크 가문은 성공했다. 연합군의 거대한 그물망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가 승리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연말까지 세르비아군의 잔당들이 알바니아로 후퇴하여 해상으로 도피했다. 연합군은 결국 1918년에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통해 세르비아를 해방했다. 전쟁 후에 세르비아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를 포함하면서 커졌고 1991년까지 유고슬로비아로 알려지게 된다.
15. 12번의 이손초 전투
이탈리아는 전쟁 첫 해에 참전하지 않았고, 전쟁 이전에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여전히 합스부르크가 지배하고 있는 일부 이탈리아어 사용 영토와 역사적으로 베네치아 공화국이 지배했던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15년 런던 조약에서 연합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의 일부를 약속하며 이탈리아가 참전하도록 유혹하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실제 전투는 서부 전선보다 훨씬 더 정적이고 무의미했다. 오늘날 슬로베니아에 있는 강 근처에서 12번의 다른 이손초 전투가 있었다. 이 12번의 전투는 전쟁 중 이탈리아 전체 사상자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지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국경을 거의 이동시키지 못했다. 본질적으로, 이탈리아의 전사자는 러시아나 프랑스에서 싸울 수 있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군을 붙들어 두는 대규모 전환 전술의 역할을 했다.
16. 갈리폴리 캠페인 : 연합군이 터키 침공을 시도하다
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받은 영국군은 터키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 강습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이 반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면 연합군 해군은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해 마르마라 해로 진입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대한 공격을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사이에 연합군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대신, 터키는 연합군을 억눌렀고 수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들은 후퇴했다. 이 캠페인에 호주와 뉴질랜드의 자원 병력이 많이 참가한 것은 터키가 이 승전을 기념하는 것처럼 이 날을 그 나라들의 군사 역사에서 상징적인 순간으로 만들었다.
17. 베르됭의 유혈 전투
베르됭 전투는 1916년 2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된 서부 전선에서 가장 길고 값비싼 전투 중 하나였다. 최전선을 약 5 마일 이동시키기 위해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독일군은 프랑스-영국 방어선을 뚫고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그들의 계획은 전선이 프랑스 땅에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연합군이 스스로 패배하도록 속이는 것이었다. 서부의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베르됭 근처의 프랑스 전선은 어정쩡하게 독일이 차지한 영토로 돌출되어 있었다. 계획은 베르됭이 포격을 받을 수 있는 뫼즈 강 동쪽 기슭의 고지를 탈취하는 것이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프랑스군이 마을에서 후퇴하기보다는 독일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방식으로 격렬하게 반격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실제로 약 156,000명의 프랑스 병사들이 전투 중에 죽었다. 그러나 143,000명의 독일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18. 러시아 전쟁 노력의 정점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1916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광범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브루실로프의 혁신적인 전술은 일반적인 거리보다 가까운 곳에서 포격하여 적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후퇴를 강요하는 특수 타격 부대의 집중 공격이 뒤따랐다. 합스부르크의 사상자는 독일의 지원 없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추가 공격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이러한 성공은 루마니아가 연합군에 합류하도록 자극했지만, 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루마니아군이 독일-불가리아의 연합 공격으로 붕괴되면서, 러시아군의 진격은 9월에 중단되어 점령한 루마니아 영토의 새로운 국경을 보호해야 했다. 이어진 겨울 동안 차르 정권이 붕괴되었고 러시아 군부의 모든 규율이 함께 무너졌다.
19. 유틀란트 해전 :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해전
영국은 20세기 초에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세월 동안, 독일은 그들만의 강력한 해군을 건설했다. 1916년 5월 31일, 덴마크 유틀란트 앞바다의 북해에서 약 150 척의 영국 함선과 거의 100 척에 이르는 독일 함선이 충돌하면서 양측 해군은 전쟁 중 가장 큰 충돌을 겪었다. 독일군은 영국 함대 전체에 직접 도전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데이비드 비티 해군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 함대의 일부를 더 많은 수의 독일 함대와의 교전으로 유인하기를 원했다. 비티가 독일 함대와 마주쳤을 때, 그는 배를 돌려 존 젤리코 제독이 지휘하는 나머지 영국 대함대를 향해 질주했다. 이 교전에서 영국군은 독일군보다 더 많은 배와 선원을 잃었다. 그러나 이 손실은 북해에 대한 영국 해군의 장악력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독일은 남은 전쟁 동안 이러한 대규모 해전을 피하면서 함대를 안전한 항구에 배치하고 대신 잠수함 공격에 집중했다.
20. 1916년에 전쟁이 일어난 곳
이 우아한 지도는 전쟁이 일어난 지 정확히 2년이 되는 1916년 8월 1일에 전선이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준다. 세르비아가 짓밟히는 동안 러시아는 현재의 폴란드, 우크라이나, 발트해 연안 지역의 지배권을 상실하는 등 저조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부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투는 본질적으로 독일군이 마른 강 전투 이전에 해낸 것 이상의 성과는 없었다. 그리스의 살로니카(테살로니키) 근처에 있는 작은 파란색 선은 발칸반도의 형식적인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도시를 점령한 소규모 연합군을 나타낸다. 그들의 존재는 그리스에 위기를 불러일으켰지만, 동맹국이 최후를 맞을 때까지 군사적 중요성은 거의 없었다.
유럽 밖에서의 전쟁
21. 남서아프리카와 다른 지역에 있는 독일 식민지들이 공격을 받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 직후, 독일의 식민지들도 공격을 받았다. 1916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 지도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의 군대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현재의 나미비아)를 정복한 모습을 담고 있다. 남아프리카의 총리 루이스 보타는 1914년 9월에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독일군은 1915년 7월에 항복했다. 다른 독일 식민지들도 연합군의 손에 넘어갔다. 연합군 편에 선 일본군이 참전하여 1914년 11월에 독일이 점령한 칭다오 항구(현재의 중국 도시 칭다오)를 점령했다. 독일의 동아프리카 식민지는 전쟁 내내 연합군의 지배에 저항한 유일한 주요 식민지였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승리를 거둔 유럽 열강 사이에서 영토는 여전히 분할되어 있었다.
22. 독일의 가장 유명한 해군 습격자 엠덴호
대부분의 독일 수상 해군은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안전한 독일 항구에서 보냈지만, 몇몇 함선들은 연합군의 선박을 공격하기 위해 공해로 나갔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14년 가을, 인도와 동남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벵골만에서 운항한 독일의 순양함 엠덴이다. 카를 폰 뮐러 선장의 지휘 아래 엠덴호는 21 척의 연합군 선박을 나포하여 이 지역에서 연합군의 해상 운송을 심각하게 방해했다. 뮐러의 가장 대담한 기습은 10월 28일 연합군의 항구 파낭(페낭)에 잠입하여(엠덴호 갑판에 위장 굴뚝을 달고) 2 척의 전함(프랑스 함과 러시아 함)을 격파한 것이다. 마침내 11월 9일 또 다른 기습 원정 때, 더 강력한 화력을 지닌 호주 전함이 엠덴호를 따라잡아 함선을 좌초시켰다. 뮐러와 생존한 선원 대부분은 포로가 되었다.
23.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다
1916년 갈리폴리 전역이 실패한 후 연합군은 이집트에서 재 집결하여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레반트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 지도는 1917년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성공적인 캠페인의 일부를 보여준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침공은 오래 지속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적 보금자리의 설립"을 지지하는 서한을 썼다. 밸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기존의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라고 주의를 주었다. 1922년 국제 연맹은 공식적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행정부를 승인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아랍과 유대인 국가 사이의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4.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아랍 동맹들에 대한 영국의 배신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 중 하나는 TE 로렌스로, 중동에서의 그의 공적은 1962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불후의 명성을 얻었다. 전쟁 전에 로렌스는 고고학자로 중동 탐험을 하면서 중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영국은 그를 고용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 반란을 조직하고 조력하도록 했다. 전쟁 전에 형성한 그의 인맥은 그가 이 역할을 하는 데 특히 효과적이게 만들었다. 그는 1916년에서 1918년 사이 일련의 전투에서 아랍인들과 함께 싸웠다.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나갈 무렵, 로렌스는 전후 중동 지역에 대해 제안된 국경을 보여주는 이 지도를 영국에 있는 그의 상관들에게 제출했다. 영국은 반란에 가담한 아랍 동맹들에게 독립을 약속했고, 로렌스는 1919년 파리 강화회담에 참석하여 이 약속을 지킬 것을 촉구했다. 대신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비밀리에 협상한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아랍 영토를 분할했다.
25. 오스만 튀르크가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을 자행하다
1915년, 전쟁 초기의 차질에 좌절한 무슬림이 다수인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비무슬림 구성원을 숙청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들은 조상들의 고향이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국경에 걸쳐 있는 기독교 민족 집단인 아르메니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수십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이 학살당했다. 일부 추정치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2백만 명 중 4분의 3이 죽었다. 수십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고국을 떠났으며 미국, 러시아 등지에 상당한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 인구가 발생했다. 아무도 이러한 잔학 행위로 처벌받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터키 정부에 민감한 주제이다. 2007년, 터키에서의 외교적 압력으로 미국 의회는 이 사건이 집단 학살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2019년 12월 12일 공식 인정).
출처 :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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