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투샤는 후기 청동기 시대에 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였다. 그 유적은 현대 터키의 보아즈칼레 근처의 키질이르마크 강의 큰 고리 안에 있다.
하투샤는 1986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추가되었다.
환경
도시를 둘러싼 풍경에는 풍요로운 농경지와 목초지와 숲을 위한 언덕이 있다. 더 작은 숲은 여전히 도시 밖에서 발견되지만 고대에는 훨씬 더 널리 퍼져있었다. 이것은 주민들이 집과 다른 구조물을 지을 때 훌륭한 목재 공급을 의미했다. 밭은 사람들에게 밀, 보리, 렌틸 콩 같은 생계 작물을 제공했다. 아마(亞麻)도 수확되었지만, 옷의 주요 공급원은 양털이었다. 그들은 또한 숲에서 사슴을 사냥했지만 이것은 아마도 귀족을 위한 사치일 뿐이었을 것이다. 가축은 고기를 제공했다.
야질리카야의 바위 신전과 알라카회위크의 마을과 같은 여러 다른 정착지가 인근에 있었다. 이 지역의 강은 주요 선박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투샤를 오가는 모든 교통수단은 육로로 이동해야 했다.
초기 역사
B.C.2000년 이전에, 토착민인 하티 사람들은 훨씬 더 일찍 점령된 지역에 정착지를 설립했으며 이 지역을 하투쉬라고 불렀다. 하티인는 Büyükkale의 높은 산등성이에 초기 정착지를 건설했다. 유적지에 정착한 가장 초기의 흔적은 B.C.6천 년대이다. B.C.19세기와 18세기에 아시리아에 있는 아수르의 상인들은 그곳에 교역소를 도시의 별도 지역에 세웠다. 그들의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은 카네쉬(네사)(현대 퀼테페)에 있었다. 비즈니스 거래에는 기록 보관이 필요했으며 아수르의 무역 네트워크는 설형 문자 형식으로 하투샤에 글을 작성했다.
발굴에서 보이는 탄화층은 B.C.1700년 경 하투샤가 불에 타고 파괴된 것을 증명한다. 책임 있는 당사자는 쿠사라의 아니타왕으로 보이는데, 그는 행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고 좋은 조치를 위해 새겨진 저주를 세웠다.
"내 뒤에 누가 왕이 되든 하투샤를 재정착시키면 하늘의 폭풍 신이 그를 공격하게 해 달라!"
히타이트 제국의 도시
한 세대 후 히타이트어를 사용하는 왕이 이곳을 자신의 거주지이자 수도로 선택했다. 히타이트 언어는 하티인을 희생하여 한동안 화자를 확보했다. 하티의 하투쉬는 이제 히타이트의 하투샤가 되었고, 왕은 "하투샤에서 온 것"인 하투실리라는 이름을 따왔다. 하투실리는 하티어을 사용하지 않는 "히타이트"국가와 히타이트의 위대한 왕들의 왕실 계보의 시작을 표시했으며, 그중 27개는 현재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카스카족이 왕국의 북쪽에 도착한 후 그들은 왕이 왕실을 다른 도시로 옮겨야 할 지점까지 도시를 두 번 공격했다. 투드할리야 1세 아래에서 히타이트는 북쪽 사피누와로 이동하였다가 나중에 돌아왔다. 무와탈리 2세 하에서 그들은 남쪽 타르훈타사로 이사했지만 하투실리 3세를 하투샤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무르실리 3세는 B.C.12세기 히타이트 왕국이 끝날 때까지 왕들이 남아 있던 하투샤로 자리를 되찾았다.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 도시는 1.8 km²의 면적을 차지했으며 수필룰리우마 1세(B.C.1344-1322년 경)의 통치 기간에 세워진 거대하고 여전히 보이는 벽으로 둘러싸인 내부 및 외부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도심은 약 0.8 km²의 면적을 차지했으며 대규모 관리 건물과 사원이 있는 성채가 차지했다. 왕실 거주지 또는 아크로 폴리스는 현재 Büyükkale(거대 요새)로 알려진 높은 산등성이에 지어졌다. 이 도시는 6km가 넘는 벽으로 둘러싸였으며 내벽과 외벽은 두께가 약 3m이고 그 사이에 2m의 공간이 있어 전체 두께의 8m가 추가되었다.
남쪽에는 전사, 사자, 스핑크스를 보여주는 부조로 장식된 정교한 관문이 있는 약 1 km²의 외곽 도시가 있었다. 네 개의 사원이 여기에 위치하고 있으며 각각은 세속적인 건물 및 주거용 구조물과 함께 현관이 있는 안뜰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벽 밖에는 묘지가 있으며 대부분 화장장이 있었다. 현대 추정치에 따르면 도시의 인구는 최대 4만에서 5만 사이였다. 초기에 도심은 그 숫자의 1/3을 수용했다. 목재와 진흙 벽돌로 지은 주택은 부지에서 사라져 사원과 궁전의 석조 벽만 남았다.
이 도시는 청동기 시대 붕괴의 일환으로 B.C.1200년 경 히타이트 지역과 함께 파괴되었다. 발굴 결과에 따르면 하투샤는 히타이트 제국이 붕괴되면서 수십 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버려졌다. 이 장소에는 프리기아인 정착촌이 생겨났다가 B.C.800년에 버려졌다.
스핑크스
하투샤 남쪽 문에서 발견된 한 쌍의 스핑크스는 1917년 독일로 가져가서 복원되었다. 더 잘 보존된 스핑크스는 1924년 터키로 반환되어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다른 하나는 그대로 독일에 남아있었다. 수많은 반환 요청에도 불구하고 1934년부터 페르가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2011년, 터키에서 일하는 독일 고고학자들에게 제한을 가하겠다는 터키 문화부의 위협은 마침내 독일을 설득하여 스핑크스를 반환했고, 이스탄불 스핑크스와 함께 하투샤 폐허 밖에 있는 보아즈칼레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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