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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중세로마

제국의 힘이 고대 로마 영토를 지배한 여섯 시대

by 금곡동로사 2022.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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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의 로마 제국은 면적과 인구 면에서 당대 중국의 한 제국과 견줄만했지만, 현재 얼마나 많은 국가가 각각의 국경 안에 놓여 있는지 살펴보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의 경우, 극소 국가를 포함하지 않는 그 수는 최소 30개 국가이다. 한 제국은 중국과 북한 두 나라뿐이다. 중국 제국은 수천 년 동안 여러 번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종종 고전 시대의 범위를 넘어섰다. 대조적으로 로마 제국은 5세기와 6세기의 사건들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 어떤 힘도 고대 로마 영토를 재결합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로마의 몰락 이후, 소수의 강력한 제국이 그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유했던 여섯 시대가 있었다.

이 글은 그 여섯 시대와 그 제국들(9개, 일부는 한 시대 이상 나타남)에 대해 탐색한다. 이런 우스꽝스럽지만 정확한 주장을 하기 위해 물론 임의적이지만 대부분 합리적인 용어 정의를 만들었다.

· "고대 로마가 멸망한 이후"라는 말은 536년 이후를 의미한다.

· "그 영역"이란 395년 제국의 14개 대륙 관구, 즉 마지막 단일 통치자가 지배했던 관구를 의미한다. (브리튼을 제외한 모든 관구들)

· "강력한 제국"이란 14개 관구 중 적어도 한 곳을 지배하고 있고, 최소 다른 한 곳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를 의미한다.

· 제국이 그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들이 이 14개 관구의 모든 곳에 존재 또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몇 안 되는" 제국이란 말은 최대 4개 국가를 의미한다.

· "시대"란 위의 조건이 충족되고, 이에 따라 계산해야 하는 제국의 수가 지역적으로 최솟값인 기간을 의미한다.

14개 관구가 다른 지도와 동일한 축척으로 아래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위에서 단 하나의 불합리한 정의는 고대 로마 영토에서 브리튼을 배제하는 것이다. 이러한 누락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 브리튼은 이 관구 중에서 마지막으로 정복(AD 43년)된 관구이자 최초(410년)로 완전히 포기한 곳이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실용적이다. 만약 브리튼 관구가 포함된다면, 위의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시대는 없을 것이다. 비록 "소수"의 제국이 5개로 허용되더라도, 1175년경 앙주 제국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절반을 지배하던 단 하나의 시대만이 있을 것이기에 다소 재미없는 글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선택한 여섯 시대는 최대 376년, 최소 164년, 평균 250년으로 비교적 차이가 적은 간격이다. 놀랄 것도 없이, 비잔틴 제국, 카롤루스 제국, 신성 로마 제국의 이어지는 로마 제국이 이 지도에서 여러 번 나타난다.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나폴레옹 제국과 같은 많은 "계승 제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바스 칼리파국, 파티마 칼리파국, 무와히드 칼리파국, 아이유브 술탄국 같은 여러 제국은 한 번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대마다 제국의 수가 2개, 3개, 4개, 4개, 3개, 2개라는 점에서 좋은 대칭성이 있다.

 


561년 - 2개의 강력한 제국 : 비잔틴-로마 제국과 프랑크 왕국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옛 서부 제국에서 재정복 전쟁(533-61년)을 치르기 전, "비잔틴" 제국은 14개 대륙 관구 중 동부 7개 관구로 구성되었다. 서부의 7곳은 동고트, 반달, 서고트, 프랑크의 4개 강대국과 일부 작은 국가로 나뉘었다. 561년 이탈리아에서 동고트의 저항이 마침내 멈추었을 때, 제국은 서부 관구 중 가장 좋은 3곳과 다른 2곳의 상당 부분을 추가했다. 갈리아이와 셉티마니아 관구만이 프랑크인의 통치 하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크인은 정통파 기독교에 몸을 맡긴 최초의 야만인이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점을 누렸다. 이 시기 프랑크 왕국은 단일 왕인 클로타리우스가 있었으나, 561년 그가 죽자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811년 - 3개의 강력한 제국 : 비잔틴-로마 제국, 프랑크-로마 제국, 아바스 칼리파국

 


프랑크 왕국은 메로베우스 왕조 치하에서 짧은 기간 동안 두 번 더 재통합되었다. 그러나 뒤이은 카롤루스 왕조의 피피누스 2세(궁재 687-714년), 그의 아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최고 지도자 714-41년), 그의 아들 단신왕 피피누스 3세(단독 통치자 743-51년, 왕 751-68년), 그리고 그의 아들 카롤루스 대제(단독 통치자 771-800년, 황제 800-814년) 시대에는 초기 범위를 훨씬 넘어섰다. 교황이 그에게 부여한 샤를마뉴의 황제 칭호는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그러나 비잔틴인은 그를 프랑크인의 황제로만 인정했다. 비잔틴-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지 3년 만에 쇠퇴하기 시작했고,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과 함께 거의 2세기 동안 수그러지지 않았다. 그러한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은 최초의 위대한 이슬람 제국인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부상이었다. 632년에서 712년 사이에 오리엔스, 아이깁투스, 아프리카, 히스파니아이(마지막 북서쪽 지역을 제외한)의 남부 4개 관구가 정복되었다.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데, 비잔틴 제국이 발칸반도의 관구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차지할 만큼 슬라브족으로부터 충분한 영토를 회복하는 810년경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무슬림 세계는 대 내전(747-756년)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스페인에서 권력을 고수했지만, 그곳에서도 샤를마뉴에게 북동쪽(히스파니아이에서 상당한 존재로 여겨질 만큼 충분히 큰 영역)을 빼앗겼다. 다른 곳에서는 아바스 칼리파국이 대신했는데, 그들은 아프리카에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최서단 지방들을 상실하고 아글라브 토후국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811년 아바스 칼리파국에서 내전이 시작되었고 불가르족은 비잔틴 제국에 포괄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니케포로스는 378년 발렌스 황제 이후 전투에서 사망한 최초의 로마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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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5년 - 4개의 강력한 제국 : 비잔틴-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프랑스 왕국, 파티마 칼리파국

 


아바스 칼리파국은 943년경에 칼리파의 역할이 완전히 영적인 것으로 축소될 때까지 쇠퇴 및 분열되었다. 이 무렵에는 909년 아프리카의 아글라브 토후국을 대체한 경쟁 칼리파국인 파티마 왕조가 있었다. 파티마의 칼리파 알무이즈는 969년에 카이로를, 970년에 다마스쿠스를 점령했다. 비잔틴 제국 또한 무슬림의 분열을 이용하여 그들이 다시는 하지 못한 오리엔스까지 더 진출했다. 971년 불가르족으로부터 트라키아 전체를 탈환한 요안니스 치미스키스 황제는 975년 파티마 칼리파국에게서 다마스쿠스를 탈환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한편, 888년 카롤루스 제국이 마침내 붕괴되었다. 가장 큰 두 계승자는 프랑스 왕국(빨간색)과 독일 왕국이었다. 작센 왕 오토가 이탈리아와 로마까지 재통합하면서 962년 신성 로마 제국(적갈색)이 수립되었고, 오토 1세는 초대 황제가 되었다. 카롤루스 왕조가 존속했던 프랑스 왕국은 여전히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지방에 종주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파티마가 모로코까지 차지하자, 다시 히스파니아이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위한 지위를 만들게 되었다.

 


1175년 - 4개의 강력한 제국 : 비잔틴-로마 제국, 신성 로마 제국, 무와히드 칼리파국, 아이유브 술탄국

 


985년, 실질적으로 마지막 카롤루스 왕이었던 로타리우스는 우마이야 칼리파국에 맞선 바르셀로나의 도움 요청을 무시했고, 그로 인해 왕국이 히스파니아이에서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우마이야인은 거의 이득을 보지 못했고, 1010년부터 1031년까지 칼리파국은 내전으로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1069년부터 히스파니아이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새로운 이슬람 세력인 무라비트 술탄국이 생겨났다. 알 안달루스(무슬림 이베리아)가 스페인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자, 안달루시아인은 무라비트 왕조를 그들의 통치자로 초대했고, 그들은 1115년까지 점령을 완료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해졌고 1140년대에 모로코 중심부에서, 1172년에 알 안달루스에서 라이벌 무와히드에 의해 전복되었다. 무와히드는 또한 파티마 왕조의 저항 없이 1160년까지 아프리카 전체를 정복했다. 파티마 왕조는 이전의 아바스 왕조처럼 그들의 서부 영토가 독립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집트에 잔존하던 파티마 칼리파국은 십자군과 튀르크계 장기 토후국의 공격을 받았으며, 장기 토후국이 1169년에 승리를 거두었다. 1174년 장기의 통치자 누레딘(누르 앗딘)이 죽고 유명한 쿠르드족 장군 살라딘이 계승하여 아이유브 술탄국을 세웠다. 이때까지 비잔틴은 1071년 튀르크에 의한 참담한 패배로부터 (십자군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회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이어 1176년 미리오케팔론에서 셀주크 튀르크에게 또 다른 참패를 당했다. 같은 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이탈리아 안노나리아(이탈리아 북부)에서 롬바르디아 동맹군에 패배했다.

 


1551년 - 3개의 강력한 제국 :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허황됨은 1278년 교황령(로마 포함)이 이탈하면서 완전히 드러났다. 비잔틴 제국은 1204년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약탈당하면서 더욱 극적으로 몰락했다. 1212년 무와히드 칼리파국은 스페인에서 기독교 연합군의 손에 참패한 뒤 스페인을 포기했고, 1269년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지중해 지역에서는, 아이유브 술탄국을 대체하고 몽골 칸국에 대항하는 전선을 유지하던 맘루크 술탄국의 동쪽을 제외하고는 막강한 제국의 시대가 끝난 것처럼 보였다. 맘루크인은 아이유브 술탄국 이전의 장기 토후국과 마찬가지로 튀르크 민족이었고 아이유브 치하에서 전사 노예였다. 맘루크 술탄국은 결국 1516-7년에 또 다른 튀르크 민족인 오스만에게 정복되었다. 이 무렵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두 번째 약탈당했다)의 미약한 잔재를 제거하고 동부 7개 관구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러한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확장을 계속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대제(1520-66년)는 1538년까지 헝가리의 대부분과 1551년까지 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때, 마침내 교황의 대관을 받은 마지막 신성 로마 황제이자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1516-56년)가 합당한 기독교 세력 적수로 나타났다. 칭호 자체는 별 의미가 없었지만, 스페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네덜란드, 그리고 신대륙에서의 카를의 힘은 확실히 실재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이변을 통해 영토의 대부분을 물려받았고, 오스만 제국과 그들의 오랜 동맹국인 프랑스 왕국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자원과 기지(機智)가 필요했다. 기지가 필요한 일은 프랑수아 1세(1515-47년) 치세의 지방 자치 봉건 시대로부터 근래에 들어서야 나타났다. 프랑수아의 후계자 앙리 2세는 1551년 합스부르크가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카를의 명목상 신민인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영주들과 동맹을 맺었으며,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카를 5세는 1556년 퇴위하고 그의 제국을 형제(오스트리아와 황제 칭호)와 아들(스페인과 그 밖의 모든 것)에게 나누었다.

 


1811년 - 2개의 강력한 제국 : 오스만 제국과 프랑스 제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그 여파(1701-20년)까지 한때 로마 땅을 지배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는 산재해 있는 유럽 영토를 인수하고 스페인(이제는 부르봉 왕조 치하) 영토를 히스파니아이에 국한시켰다. 그러나 1735년까지 오스트리아는 나폴리 왕국과 함께 이탈리아 수브르비카리아(이탈리아 중남부 및 주변 섬들)에 존재하던 땅을 상실했다. 오스만 제국과 경쟁하기 위해 서부 제국을 재건하는 일은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1804-14년)에게 맡겨졌다. 그의 제국은 1811년 절정에 이르렀지만, 1812년 파멸로 이끈 러시아 침공 이후 몇 년 안에 (프랑스 이외에서)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몰락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은 이 시기에 정점이 훨씬 지나갔지만, 눈에 띄게 동부 7개 관구를 계속 지배했고, 1878년까지 다른 2개 관구(아프리카와 일리리쿰)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뒤를 이은 터키 공화국(1923-)은 여전히 2곳(폰투스와 아시아나)을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2곳(트라키아이와 오리엔스)에도 상당히 존재하고 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옛 오스만 제국의 땅에 해외 제국을 건설하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는 동안, 히스파니아이는 항상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었다. 비록 유럽연합(1993년 설립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포함됨)을 하나의 제국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1962년 프랑스가 철수한 이래 아프리카 관구에는 실질적인 "강력한 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수의 강력한 제국이 로마 제국의 옛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공유한 7번째 시대는 아직 없다.

 

 

 

출처 : Howard Wis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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