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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중세로마

비잔틴 경제의 이해 : 중세 강국의 몰락

by 금곡동로사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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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의 후계자로서, 비잔틴 제국은 중세 시대에 가장 발전된 경제 중 하나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엄청난 부는 13세기에 극적으로 무너졌다.


284년 로마 제국의 첫 분할 때부터, 동방 또는 '비잔틴' 제국으로 알려진 곳은 경제 강국이었다. 선진적인 국가 세금 체계와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무역 연결을 통해 비잔틴 경제는 중세까지 중요한 위치를 유지했고, 막대한 부와 선망의 이미지를 투영했다. 그러나 1204년 제4차 십자군은 재앙으로 판명되었고, 비잔틴 제국은 결코 회복되지 못한 경제적 쇠퇴에 빠졌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전날, 한때 위대했던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궁핍했고, 예전 영광의 초라한 겉모습만 있었다.


비잔틴 농업

11세기 비잔틴의 복음서에 나오는 포도원 일꾼 비유, 출처 - 내슈빌 밴더빌트 대학


비잔틴 제국의 초기 경제력은 주로 토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는 잘 발달된 농업 지역으로 국가에 막대한 세수를 가져다주었으며, 일부에서는 이집트만 해도 연간 세수의 최대 30%에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제국 전역의 기후는 다양한 유형의 농사 활동에 탁월했다. 해안 지역에서는 곡물 작물, 포도나무, 올리브가 대량으로 생산된 반면, 내륙 지역에서는 주로 다양한 가축을 사육했다. 과일과 채소도 널리 생산되었는데, 그중에는 도시 중심지를 포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넓은 지역이 원예에 이용되었다.

농업 생산은 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마을은 다양한 거주자들이 점유했고, 그들 중 다수는 그들의 땅을 소유하고 따라서 국가에 직접 세금을 내는 토지 소유 농부였다. 점차적으로, 이 제도는 노예, 임금 노동자, 소작농이 혼합된 대규모 사유지 네트워크로 대체되었다.

 

1000년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재건


10세기부터, 점점 더 소수의 유력 귀족 가문의 손에 토지의 집중이 가속화되었고, 연이은 황제들은 소규모 지주 농부들로부터 토지의 소외를 막기 위한 일련의 '토지법'을 통과시켰다. 이러한 법안에도 불구하고, 중세 후기에 이르러 비잔틴의 시골 풍경은 완전히 바뀌었고, 이전에 농업 경제를 구성했던 마을의 작은 조각은 거의 완전히 큰 사유지로 대체되었다.

이 강력한 지주 가문들(특히 아나톨리아에 집중된)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소작인 및 수행원과 함께 자급자족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실에 정치적 위협을 가했다. 예를 들어, 동쪽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한 비잔틴 장군이자 스클레로스 가문의 일원인 바르다스 스클레로스는 976-79년 동안 지속된 바실레이오스 2세에 대한 반란을 이끌었다.


비잔틴 제국의 조세

콘스탄티누스 1세의 솔리두스 금화, 306-37년, 출처 - 히스토룸


로마의 역사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은 카피타(인두세)와 이우게라(토지세)를 기반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가 도입한 선진적인 관료제와 세금 징수 제도를 보유하고 있었다. 황제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설립자인 콘스탄티누스(306-37년)는 고품질의 고 캐럿 금 조각을 대량으로 주조함으로써 인플레이션에 대항하려고 했다. 노미스마 또는 솔리두스로 알려진 이 통화는 비잔틴 경제의 화폐 기반을 형성했고, 11세기까지 꽤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이후 황제들은 추가적인 재정 개혁을 단행했고, 7세기까지 상당한 성장의 시기를 보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491-518년)는 청동 주화를 도입하고 상인에 대한 제국의 세금인 크리사르기론을 폐지했다. 그는 또한 지방 고위 인사들의 손에서 세금 징수 권한을 없애고 대신 국가가 임명한 관리들에게 부여하는 한편, 군 급여를 공식화함으로써 부패를 줄이고 국고를 늘렸다. 이 막대한 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65년)와 같은 후대 황제들이 정복을 통해 제국을 확장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비잔틴 제국의 세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세로, 각 개인이 소유한 토지의 가치를 기준으로 산정되었다. 사용된 구분은 모디우스(대략 1/4 에이커 상당)였으며, 고급 토지의 가치는 금화 1개, 이류 토지는 금화 1/2개, 목초지는 1/3, 포도밭은 다른 토지에 비해 훨씬 높게 평가되었다. 농민들은 개인 세금도 냈는데, 나중에 카프니코스로 알려진 가구당 세금이 되었다.


무역

카롤루스 대제의 장막, 8세기 비잔틴에서 제작한 티레산 자주색 및 금색 비단 장막, 출처 - 파리 Musée National du Moyen Âge


농업 외에도 무역은 비잔틴 경제의 중요한 요소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서 및 남북 교역로를 따라 위치해 있었고, 비잔틴 제국은 수출입에 10%의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이를 이용했다. 곡물은 특히 아랍의 이집트 및 레반트 정복 이후 제국이 주요 곡물 공급원을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주요 수입품이었다.

비단은 외교적이고 명망 높은 목적으로도 국가에 중요했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수입품이었다. 그러나 누에가 중국에서 제국으로 밀수된 후, 비잔틴 제국은 그들만의 비단 산업을 발전시켰고 더 이상 외국 물자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양한 다른 상품들도 제국 내부와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거래되었다. 오일, 포도주, 소금, 생선, 고기, 그리고 기타 식료품이 모두 거래되었고 목재와 밀랍 같은 재료도 거래되었다. 향신료, 비단, 향수와 같은 사치품뿐만 아니라 도자기, 리넨, 의류와 같은 제조품도 교역했다.

해외에서 온 방문객, by 니콜라스 레리치


무역은 비잔틴 외교에서도 중요했는데, 무역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비잔틴 인들은 다양한 민족과 국가를 자신들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여 잠재적으로 지역 동맹에 이용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와 루스 상인들은 밀랍, 꿀, 모피, 리넨을 가져왔고, 가죽과 밀랍은 10세기 흑해 북쪽에 살았던 유목민인 페체네그족에게서 구입했다. 향신료와 공산품은 주로 아나톨리아의 도시를 통과하는 무역 대상을 통해 동방에서 제국에 들어왔다. 베네치아는 무역 파트너이기도 했으며, 992년에 베네치아의 해군력은 베네치아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관세를 감면받을 수 있을 만큼 상당했다.


관료제와 조직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12세기 필사본에서 비잔틴 황제 테오필로스(829-42년)의 대관식, 출처 - World Digital Library


국가는 화폐를 독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에 개입했다. 그것은 금리를 통제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경제 활동을 주의 깊게 조정하여, 도시의 길드들이 따라야 할 엄격한 규정을 설정했다(10세기 문헌인 '에파크서, 토 에파르키콘 비블리온'에서 볼 수 있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식료품이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없을 경우 황제의 통치를 위협하는 폭동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는 수도에 곡물을 공급하고 빵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개입하기도 했다.

중세 초기의 격변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은 여전히 광범위한 관료제와 강력한 국가 메커니즘으로 상비군 유지와 효과적인 세금 징수가 가능했다.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국가는 막대한 경제적 수요도 창출했는데, 이는 시장의 힘이 비잔틴 경제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인과 관료들은 금화로 돈을 받았으며, 물건을 사는데 금화를 사용하여 경제를 통해 화폐가 효과적으로 재활용되었고 농민과 농촌 엘리트들의 세금을 통해 국가의 수중에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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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비잔틴 경제에서 7세기 위기까지

비잔틴 제국의 영역 쇠퇴를 보여주는 지도,출처 - Encyclopedia Brittanica


동로마 제국은 4-5세기 동안 서로마 제국보다 훨씬 적은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서로마 제국은 거듭된 야만인의 습격을 받고 결국 476년에 완전히 무너졌다. 지표는 실제로 동방의 도시 중심지가 성장했고, 제국의 수입이 지속적으로 높게 유지되어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확장 전쟁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아야 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제국 건축 프로젝트에 착수할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6-7세기는 비잔틴 경제에 재앙이었다. 541/2년의 전염병은 제국을 황폐화시켰고, 인구를 30%까지 감소시켰을 수 있다. 이후 역병의 재발은 흔했고 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페르시아와의 값비싼 전쟁도 6세기 동안 국고를 고갈시켰다. 540년에 약 1,100만 솔리디('솔리두스'의 복수형)였던 연간 수입은 555년에 6백만으로 떨어졌다.

게다가, 제국은 이방의 정복으로 많은 땅을 잃었다. 아랍 침략자들은 첫 무슬림 정복의 일환으로 레반트, 이집트, 북아프리카를 점령했고, 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로 이주했으며 발칸반도는 슬라브 민족이 점령했다. 동부 속주의 손실은 비잔틴 경제의 75%를 차지했을 수 있기 때문에 가장 큰 타격이었다. 40년 동안 제국의 인구는 600년의 1,700만 명에서 641년의 1,050만 명으로 650만 명이나 줄어들면서 인구 손실도 엄청났다. 수입도 668년에 불과 2백만 노미스마타(솔리두스 금화를 의미하는 비잔틴 용어인 '노미스마'의 복수형)로 급감했다.


회복 : 중세 경제 강국으로서의 비잔티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12세기 필사본에서 717-18년 아랍의 공성전에 맞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동안 사용된 그리스의 불, 출처 - World Digital Library


717년-18년, 무슬림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실패는 비잔틴 제국의 운명에 전환점이 되었고, 콘스탄티노스 5세(741-75년)와 같은 황제들은 비잔티움의 국경을 확보하고 경제 회복의 길을 닦을 수 있었다.

 

비록 국제 무역이 7세기 동안 급격히 감소했지만, 정치적, 군사적 안정 덕분에 다음 세기 동안 서서히 회복되어 850년에 무역은 국가 수입 290만 노미스마타 중 40만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역대 황제들은 국고에 점점 더 많은 비축금을 축적할 수 있었고 바실레이오스 1세(867-86년) 치세에는 총 430만 노미스마타를 국고에 축적할 수 있었다.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 비잔티움은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고, 1025년 연간 수입은 590만 노미스마타에 달했으며, 국고 비축금은 1,440만이었다. 이러한 부는 비잔틴 제국과 황제들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이미지를 해외에 투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이는 그들의 위신을 높였다. 크레모나의 이탈리아 외교관 리우트프란트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사람들은 도시에서 목격한 호화로운 황궁과 믿을 수 없는 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3세기 재난과 비잔티움의 종말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1204년 4월 12일), by 외젠 들라크루아, 1840년, 출처 - 파리 루브르


비잔틴 말기 경제가 쇠퇴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기여했으며, 그중 가장 큰 요인은 의심할 여지없이 제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1202년부터 십자군은 원래 이집트를 통해 예루살렘을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재정적 문제에 봉착하여 아드리아 해 연안의 기독교 도시 자라를 공격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군사적, 재정적 지원의 대가로 비잔틴 제국의 왕자 알렉시오스 앙겔로스가 그의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를 비잔틴 황위로 복귀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로 협정을 맺었다.

1204년 새로 즉위한 공동 황제 알렉시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폭도들에게 전복되자 십자군은 그야말로 도시를 정복하기로 결정했다. 1204년 4월의 잔혹한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이 뒤따랐다. 3일 동안 십자군은 대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했으며,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막대한 부를 훔쳤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작품들은 빼앗기거나 파괴되었고(히포드롬의 유명한 청동 말은 베네치아로 가져가서 현재 산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들은 조직적으로 약탈당했다. 수많은 민간인이 냉혹하게 학살당하는 등 인적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BC 4세기 리시포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산마르코 성당의 말, 출처 - 시카고 대학교


십자군은 처참하게 파괴된 도시를 떠났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약 360만 히페르피라(노미스마를 대체한 통화 '히페르피론'의 복수형)를 약탈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군 지도자들은 제국을 서로 나누어 라틴 제국으로 알려지게 된 반면, 비잔틴 제국은 니케아 제국, 에페이로스 전제 공국, 트라페준타 제국의 세 개 후계국을 남겼다. 니케아 제국은 아나톨리아 남부의 많은 영토를 룸 술탄국에게 상실했고, 1261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비잔틴 제국을 재건할 즈음에는 영토가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다.

이후의 황제들은 제국을 확장하고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시도했지만, 붕괴된 경제가 방해했다. 가혹한 과세에 대한 의존은 농민들을 화나게 했고, 용병 부대의 사용은 신뢰할 수 없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14세기 중반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제국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의 침략자들에게 영토를 서서히 빼앗겼다. 1321년 국가의 연간 수입은 100만 히페르피라에 불과한 것으로 추산된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에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 황제, by 테오필로스 카치미카일, 출처 - Bonhams


1453년 포위전 당시, 한때 위대했던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둘러싼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럽 쪽에 있는 영토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도시 자체는 주민이 매우 적었고 극도록 황폐한 상태였으며, 자체 방어를 위해 단 7,000명의 병사를 모을 수 있었고, 그중 2,000명은 외국인(주로 이탈리아인)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비잔틴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두 달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함락되었다. 성벽이 무너진 후 가장 치열한 접전에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와 그의 수행원들이 뛰어드는 모습을 보였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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