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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제국

로마 제국 - 고대부터 15세기까지의 영토 변화 (下)

by 금곡동로사 202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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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790년간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시기의 로마 제국을 보여준다. 지도에는 그 시작과 끝, 그리고 대략 100년마다의 다양한 영토 확장과 축소가 포함되어 있다. 수세기 동안 지속된 수축기(1040-1452년)의 마지막을 제외한 모든 지도는 영토 확장을 나타내며, 이들은 다시 말하자면 더 흥미롭다. 중간의 천년기(9-1040년)에는 확장과 축소가 번갈아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565년 - 확장 :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방 재정복

 

제노는 이탈리아에서 오도아케르의 지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뉴브 강의 남쪽 지역을 점령(476-488년)한 동고트족이 488년 이탈리아를 침공하도록 부추기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493년, 동고트 왕 테오도리쿠스는 오도아케르를 대체했고, 다시 황제(당시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이름으로 통치함을 주장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의 왕국을 강화하고 확장했으며, 이름만 내세우지 않았을 뿐 로마 황제로서 군림했다. 497년, 아나스타시우스는 심지어 오도아케르에게 항복했을 때 입었던 서로마 황제의 예복을 이탈리아에 돌려주기까지 했다. 테오도리쿠스는 526년에 사망하고, 이듬해 제국의 서방을 되찾겠다는 사명을 품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즉위했다. 533년부터 540년까지 그의 장군 벨리사리우스는 반달족으로부터 아프리카를, 동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소환되었고, 동고트족은 재집결했으며, 이탈리아에서의 파멸적인 전쟁은 질질 끌었다. 563년 동고트족의 저항이 마침내 잦아들었을 때, 로마는 옛 모습의 그림자만 남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미 로마의 원로원과 집정관직을 완전히 폐지했다. 로마를 점령했지만, 유스티니아누스의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에서 전적으로 통치되었다. 지도에서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을 비잔틴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례적이고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이 이름은 로마 제국 자체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제국은 로마라는 이름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제 전성기의 로마만큼이나 컸으며, 5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다. 마지막 이탈리아 원정과 동시에, 유스티니아누스는 친로마 성향의 아타나길두스가 스페인 서고트 왕국의 왕위를 차지하도록 돕기 위해 제국군을 파견했다. 아타나길두스는 성공했고, 그 대가로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며 남부 스페인을 제국에 양도했다. 정복 분야에서 유스티니아누스의 업적은 주목할 만했지만, 그가 법(그의 저작물은 유럽 법률의 기초가 됨)과 건축 분야(소피아 대성당은 거의 천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음)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더욱 놀라워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제국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인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을 겪던 시기에 일어났다.

 

 

623년 - 축소 : 아바르족과 페르시아에게 영토 상실

 

유스티니아누스가 무덤 속에서 식어가기 직전인 565년에 재건된 그의 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약 200년 전 훈족이 했던 것과 거의 같은 역할을 한 아바르족을 피해 도망친 랑고바르드족이 568년에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605년경 일시적인 균형에 도달했을 때, 로마인은 반도의 거의 절반을 유지하며 통일된 랑고바르드 왕국의 형성을 막았다. 565년, 서고트족은 로마의 종주권을 부정하고, 스페인의 제국 속주를 축소시키는 과정을 시작했으며, 이는 623년까지 거의 완료되었다. 발칸반도는 반복적인 아바르족의 습격을 받았고, 슬라브 정착민이 그 여파로 이주해 왔다. 마침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 쿠데타를 틈타 603년에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침공하여 610년까지 메소포타미아를 점령했다. 이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나 아프리카 총독의 아들인 헤라클리우스가 즉위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계속 진격하여 621년까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발칸반도의 대부분은 아바르족에게 점령되었다. 제국이 너무 약해 보였기 때문에 사산 왕조는 이제 완전한 정복을 목표로 삼았다. 한편 헤라클리우스는 군대를 재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모든 재산(교회 재산 포함)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아바르족에게 뇌물을 지불한 그는 622년 흑해를 거쳐 동방으로 향했다.

 

 

754년 - 축소 : 아랍인과 랑고바르드족에게 영토 상실

 

622년부터 628년까지 일련의 눈부신 원정에서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의 심장부를 황폐화시켰다. 성모 마리아, 제국 해군,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을 믿은 그는, 626년 페르시아와 배신한 아바르족의 수도 포위 공격을 무시했다. 무모함에 가까운 용맹함으로 그는 군대를 이끌고 연전연승했다. 628년 사산 왕조의 귀족들은 호스로를 전복하고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630년까지 제국의 동방 국경은 완전히 복구되었다. 헤라클리우스가 631년의 개선식 직후 바로 죽지 않고 10년 더 살면서, 그가 막 되찾은 땅의 대부분을 아랍인에게 정복당하는 것을 지켜본 일은 안타까워 보인다. 무함마드의 새로운 신앙으로 연합된 그들은 634년 아라비아에서 출발하여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지친 군대를 압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리우스는 위대한 군인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100년 동안 지속된 왕조의 창시자이자 라틴 서부에서 제위에 오른 마지막 황제였지만, 임페라토르가 아닌 그리스어 칭호 바실레우스를 채택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그의 고향인 카르타고 속주는 아프리카의 마지막 로마 영토였지만 698년에 아랍인에게 함락되었다. 매년 아랍인은 아나톨리아를 깊숙이 공격했고, 674-8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고, 717-8년에 다시 포위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50,000명 이하로 떨어졌고 심지어 제대로 작동하는 수도교도 없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랑고바르드족이 제국의 영토를 조금씩 획득하고 있었다. 751년, 그들은 마침내 제국의 본거지인 라벤나를 점령했다. 로마가 다음 차례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원군을 받을 가망은 전혀 없었다. 741년부터 사실상 로마의 통치자였던 교황 자카리아는 프랑크 왕국에 도움을 청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751년, 교황은 피피누스를 궁재에서 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승인했다. 피피누스는 754년 로마 주변 영토에서 랑고바르드족을 몰아냄으로써 호의에 보답했지만, 명목상으로는 제국의 일부로 남았다. 485년 오도아케르의 왕국과 비슷하게, 그 모호한 지위 때문에 옅은 붉은색 바탕에 파란색 점이 찍혀 있다.

 

 

812년 - 확장 : 카롤루스 대제의 "로마 제국의 회복"

 

자카리아의 후임자인 스테파노 2세는 754년 피피누스에게 로마의 파트리키아누스 칭호를 수여함으로써 교황-프랑크 동맹을 공고히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황제의 역할을 빼앗고 있었지만, 비잔틴 황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756년, 피피누스는 랑고바르드 왕을 다시 격파하고, 제국이 지난 100년간 차지했던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마지막 정복지를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콘스탄티노스 5세 황제는 할양된 영토를 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지만, 피피누스는 대신 그 영토를 교황에게 주어 교황령(Patrimonium Petri)을 창설했다. 772년 교황칙서에 황제의 이름이 더 이상 새겨지지 않았다. 774년, 피피누스의 아들이자 후계자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는 랑고바르드 왕국을 정복하고 스스로를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의 왕이라 칭했다. 교황령은 프랑크 왕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카롤루스는 기독교 서유럽 대륙의 거의 전부를 정복했다. 800년, 카롤루스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황 레오 3세는 그를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로 임명하는 논리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는 카롤루스 본인도 놀랐다고 전해지지만, 그는 자신의 인장에 "Renovatio Romani Imperii(로마 제국 재건)" 문구를 추가할 수 있어서 행복해했다. 처음에 비잔틴 제국은 이 주장을 무시했지만, 아드리아 해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카롤루스의 군사적 압력을 받아 812년에 그를 프랑크 왕국의 황제로 인정했다. 그들은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그들 자신을 위해 남겨두었고, 주화에 그 명문을 새겨넣음으로써 이 점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롤루스는 이제 서부에서 다시 태어난 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비잔틴 황제와 동등해졌다. 한편, 동방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아랍과의 국경을 안정시켰고, 슬라브족으로부터 발칸반도의 중요한 영토를 되찾았다.

 

 

925년 - 축소 : 서부 제국의 종식, 불가르족과 아랍인에게 영토 상실

 

814년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후, 서부 제국은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888년까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지역으로 영토가 축소되었고, 924년 이후 통치자들은 황제 행세를 멈추고 스스로를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칭했다. 서부 제국의 가장 직접적인 계승자인 이 왕국은 지도에 옅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편, 812년부터 발칸반도의 많은 지역이 훈족과 연관이 있는 불가르족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91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부터 불가르족의 황제로 대관받은 시메온 칸(893-927년)의 치세에 절정에 달했다. 92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스꽝스럽게 자신의 칭호에 "그리고 로마인"을 추가했다. 동시에 비잔틴 제국은 아랍의 새로운 해상 공세에 시달렸다. 크레타는 823년에, 키프로스는 826년에, 시칠리아는 827-902년까지, 그리고 시칠리아의 상실은 사르데냐를 잃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탈리아 본토에서 비잔틴 제국의 힘은 지난 2세기보다 더 강해졌는데, 그들만이 무슬림 해적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040년 - 확장 : 서방의 부흥, 동방의 응징

 

960년부터 1040년까지 80년 동안 로마 제국의 운세는 현저하게 회복되었고, 그 대부분은 975년에 이미 회복되었다. 서부에서 카롤루스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재통합되었고, 이번에는 제국이 훨씬 더 오래 지속되었다. 952년 독일 왕 오토 1세가 무력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점령했다. 962년 교황은 그를 로마에서 황제로 추대하여 서부 제국을 부활시켰다. 1033년 부르군트 왕국(남동 갈리아)이 추가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의 연결은 더욱 안정되었다. 한편, 동부 제국은 4세기 전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다. 960년부터 976년까지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는 처음에는 장군으로, 이후에는 황제로서 크레타, 키프로스, 킬리키아, 시리아 상당 부분과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다. 남부 이탈리아와 캅카스의 기독교 왕국들, 알레포의 무슬림 토후국은 비잔틴 제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불가르 제국이 971년에 패배하며 동부 지역은 비잔틴에 합병되었다. 976년 요안니스 치미스키스가 사망하자, 불가르족은 바실레이오스 2세(976-1025년 재위)의 첫 원정에서 그의 군대를 심하게 궤멸시켰다. 986년까지 불가르 제국은 60년 전 시메온의 치세 때와 거의 맞먹는 규모로 성장했다. 바실레이오스는 때를 기다리며 복수를 준비했다. 1000년부터 1018년까지의 거의 지속된 원정에서 그는 불가르 제국을 완전히 파괴하고 합병하여 "불가르족 학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세르비아도 병합되었고 크로아티아는 다시 복종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이제 완전히 독립했다. 바실레이오스의 후계자들, 즉 마케도니아 왕조(867-1056년)의 마지막은 무력한 통치자들이었지만, 제국은 그들에도 불구하고 계속 확장했다.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의 에데사는 1032년에 함락되었고 1038년에는 시칠리아 재탈환이 시작되었다.

 

 

1181년 - 확장 : 폴란드 진출

 

시칠리아에서는 1040년 비잔틴 제국의 노르만 용병들이 급여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이탈리아 본토로 진출했고, 반란은 확산되었다. 시칠리아는 1043년에 버려졌다. 약탈과 반란이 제국 전역에 퍼지는 와중에도 연이은 무력한 통치자들이 군대를 약화시켰다. 금화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처음으로 25%나 가치가 하락했다. 1053년 동방 국경에 주둔하던 5만 명의 현역 병력이 해산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더 가까이 위치하여 정치적으로 더 큰 위협이 되는 예비 병력은 유지되었다. 1071년, 이탈리아의 마지막 비잔틴 도시가 노르만 모험가들에게 함락되었지만, 동방 국경에서는 훨씬 더 큰 재앙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혁을 단행한 로마노스 디오예니스(1068-1071년 재위) 황제가 이끄는 대부분 용병으로 구성된 대군은 아르메니아로 진군했고, 이들은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 튀르크군에게 대패했다. 이후 20년 동안, 튀르크인은 아나톨리아 전역을 점령했지만, 제국은 이들을 막을 군대를 투입할 수 없었다. 1095년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1081-1118년 재위)는 교황에게 서방 기독교권에서 군대를 일으켜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1097년 제1차 십자군 군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아나톨리아로 건너갔다. 1098년까지 시리아와 에데사로 진격했다. 이들과 동행한 비잔틴군은 아나톨리아를 최대한으로 점령했고, 새로운 십자군 국가들은 (이전 세대처럼) 황제를 자신들의 군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알렉시오스의 아들 요안니스 2세(1118-1143년 재위)는 아나톨리아에서 더 많은 이득을 보았다. 요안니스의 아들 마누일 1세(1143-1180년 재위)는 1158년 십자군에게 약속을 지키도록 강요했고, 1159년에는 발칸반도에서 제국의 지배적 위치를 다시 확립했다. 서부 제국은 1046년에 사르데냐를 획득했지만, 1144년에 스폴레토 공국을 잃었다. 동쪽으로는 폴란드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1163년에 실레시아가 속국이 되었고 1181년에는 포메라니아를 합병했다.

 

 

1288년 - 확장 : 동방의 재통합

 

마누일 콤니노스의 죽음 이후, 동방 제국은 또 다른 급속한 쇠퇴를 겪었다. 1181년부터 1187년까지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게 넘어갔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독립을 되찾았다. 십자군은 황제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1190년에는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서방과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내전이 발발했다. 1203년, 제위를 다투던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위를 얻는 데 도움을 준다면 제4차 십자군에게 20만 마르크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십자군은 1204년에 그렇게 했지만, 황제가 된 그는 국고가 텅 비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내심을 잃은 십자군은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그들 중 한 명을 제위에 앉히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제국이 세워졌다. 십자군과 그들에게 수송 수단을 제공한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리스 남부, 에게 해 제도, 아나톨리아의 북동부 해안까지 해안 전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남은 비잔틴 영토는 서부 아나톨리아의 니케아 제국, 북부 아나톨리아의 트라페준타 제국, 그리고 아드리아 해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등 몰락한 제국의 영토를 놓고 다투는 국가들로 분열되었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의 미하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쇠퇴한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많은 부분을 수복했지만, 몇몇 십자군 국가들은 남부 그리스에 남아있었다. 1282년 트라페준타 황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황제의 지위를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데스포티스(군주, 황제보다 낮은 지위)라고 부르기로 동의했다. 1284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1288년 테살리아의 세바스토크라토르와 같이 그리스에 남아 있던 독립적인 비잔틴 통치자들 역시 굴복했다. 그러나 한편, 서부 제국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있었다. 1183년 초,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 도시들은 자치권을 확립했다. 1282년 합스부르크가 루돌프 황제가 교황령의 1278년 독립 선언을 승인하면서 서부의 로마 제국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마지막 교황의 대관식은 1220년에 있었으며, 그는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기에 루돌프는 황제가 아닌 로마인의 왕이었다.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 교황령은 위 지도에서 옅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1403 - 확장 : 튀르크에게서 유예

 

동방에서 로마 제국에 닥친 모든 재난에도 불구하고, 그 통화는 항상 기독교권에서 기축통화였다. 그러나 1282년 하이퍼피론의 금 함유량이 12분의 7로 낮아지자 베네치아인은 순금화 두카트를 주조하게 되었다. 두카트는 하이퍼피론을 빠르게 대체했는데, 이는 제국이 이탈리아 도시들에 무역 이익을 빼앗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후였다. 재정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제국을 둘러싼 적들, 즉 튀르크인,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베네치아인 그리고 다른 서방인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내전은 다시 고질화 되었고, 1347년에는 흑사병이 닥쳤다. 이 무렵 제국은 사실상 모든 아나톨리아 영토를 여러 튀르크 토후국에 빼앗겼다. 이들 중 하나인 오스만이 1354년 내전에서 한 파벌을 지지하면서 유럽에 발판을 마련했다. 1402년까지 오스만은 거의 모든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다.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모레아(그리스의 최남단)로 축소되었다. 제국의 미래는 몇 년이 아니라 몇 달 안에 결정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유예 기간이 찾아왔다. 마지막 위대한 유목민 전사인 절름발이 티무르가 앙카라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한 것이다. 오스만 술탄국은 술탄의 아들들 치하에서 내전으로 치닫고 있었고, 유럽은 쉴레이만의 손에 넘어갔다. 그는 몇몇 영토를 로마 제국에 양도했고 심지어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 황제를 종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누일은 여전히 외교적 난관을 헤쳐나가야 했다. 특히 1411년 쉴레이만이 그 형제 중 한 명에게 붙잡혀 목이 졸린 후에는 더욱 그랬다. 한편 서방에서는, 1309년부터 1378년까지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교황령 영토 대부분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1452년 - 종말 : 튀르크에게 정복되다

 

티무르는 1404년에 죽었지만, 오스만 술탄국(1413년부터 다시 한 명의 술탄이 통치)은 유럽에서 영토를 회복하는 데 한 세대가 걸렸고, 아나톨리아에서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422년 오스만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은 1430년 그리스 북부의 테살로니키를 점령했다.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남아 있던 소규모 라틴 공국들을 정복하며 확장되었고, 이 지역에서는 비잔틴 예술과 철학이 늦게 꽃피었다. 1415년 비잔틴 제국은 지협을 가로질러 모레아와 그리스의 나머지 지역을 연결하는 6마일 길이의 방벽인 헥사밀리온을 보수했다. 1444년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서방의 마지막 십자군과 함께 오스만의 영토를 침공했다. 바르나에서 벌어진 접전에서 십자군은 패배했고, 오스만군은 헥사밀리온을 넘어 비잔틴군을 추격했다. 1449년 콘스탄티노스 11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즉위했다. 로마 원로원이 마지막으로 추대한 황제가 로마의 전설적인 건설자 로물루스의 이름을 따온 것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새 황제는 도시를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름을 따왔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이름도 같은 엘레니(라틴식 헬레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제국의 종말을 예고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생각은 곧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새로운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는 1451년에 즉위하여, 1452년에 명목상 로마 영토였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옆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자신의 계획을 빠르게 드러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마지막 포위전은 1453년 4월 5일부터 5월 29일까지로 짧았다. 전례 없는 크기의 헝가리식 대포를 사용하여 술탄은 천년 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쌓은 성벽을 맹렬히 공격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대부분 비잔틴군이었지만 제노바에서 파견된 상당한 규모의 부대가 포함된 8,000명의 병력으로 방어되고 있었다. 술탄의 군대는 아마 열 배나 되었을 것이다. 패배는 불가피했다. 부상당한 제노바 대장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론고는 간신히 배를 타고 부하들과 함께 탈출했다. 콘스탄티노스는 자신의 도시와 함께 몰락했다. 그는 전투 장비를 착용하고 마지막 싸움에 뛰어들었고,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로마 제국은 1790년 만에 마침내 멸망했다.

 

몇 년 후 1460년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1461년에 트라페준타가 정복되며 남아 있던 비잔틴 세력은 사라졌다. 그러나 비잔틴 문화는 남부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계속 이어졌고, 20세기까지도 많은 그리스어 화자들은 스스로를 로마인(로마이오이)이라 불렀다. 총대주교는 동유럽, 근동, 그리고 전 세계 정교회 기독교인들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계속 거주하고 있다. 또한 비잔틴의 유산은 정교회 문화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부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이주한 비잔틴 엘리트층은 이탈리아 고전 학문의 르네상스를 촉진시키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남부 그리스는 1830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되찾았다. 현대 그리스의 국경은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1920년대 초에 달성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여전히 튀르키예 국가의 손에 굳건히 남아 있다. 그곳이 없다면, 현대 그리스는 마지막 로마 제국의 계승자라기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계승자로 보일 수밖에 없다.

 

한편, 서방에서는 로마와 아비뇽에 모두 교황이 있었을 때 대분열(1378-1417)로 교황령이 더욱 약화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는 1288년 지도와 같이 교황령 전체의 직접적인 지배권을 되찾았다. 이 지역은 7세기 초에 라벤나 총독령으로 탄생했으며, 이는 랑고바르드족의 침입 이후 이탈리아에 남아있는 로마 영토의 가장 큰 구역이었다. 8세기 중반 랑고바르드족에게 정복당했지만, 프랑크 왕 피피누스가 거의 즉시 복원하여 교황에게 기증했다. 1282년까지는 더 큰 국가의 일부로서 교황청의 지배를 받았고, 그 후 독립적으로 통치되다가 1861-70년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1,300여 년 전 동고트 왕국 이후 처음으로 통일된 이탈리아 국가였다. 오랜 기간 동안 라벤나와 로마를 연결하는 영토는 이탈리아의 통일에 강력한 방해 요소였으며, 북쪽의 롬바르디아와 토스카나를 남쪽의 나폴리 왕국과 분리시켰다. 본질적으로 인위적인 영토의 장수와 역사적 중요성은 그것을 탄생시킨 로마 제국의 영토만큼이나 주목할 만하다.

 

 

 

출처 : Howard Wise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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