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세폴리스는 다리우스 1세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의 새로운 의식 수도로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한때 고대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수도로 회자되었다.
오늘날 이란에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위대한 왕인 다리우스 1세(재위 BC 522-486년)가 의뢰하여 지어졌다. 이 복합 단지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의식 수도 역할을 한 여러 호화로운 건축물과 궁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페르시아인은 이 도시를 파르사라고 이름 지었지만, 그리스식 이름인 페르세폴리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이란 남서부에 위치한 파르스 주의 시라즈에서 북동쪽으로 3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의 풀바르(시반드) 강과 코르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BC 518년에서 515년 사이에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고, BC 330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끄는 그리스군에 의해 도시가 파괴되었다.
왜 다리우스에게 새로운 수도로 페르세폴리스가 필요했을까?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다리우스의 궁전 입구에 새겨진 설형문자는 다음과 같다.
"아케메네스 사람, 히스타스페스의 아들, 만국의 왕, 만왕의 왕(샤한샤), 위대한 왕 다리우스가 이 궁전을 지었더라"
논란과 불안이 페르시아 제국의 왕위 계승자 다리우스 1세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르디야(재위 BC 522년)는 이집트에 원정 중이던 그의 형제 캄비세스 2세(재위 BC 530-522년)가 BC 522년에 사망했을 때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바르디야는 뒤를 이어 왕이 된 직후 암살되었다. 살인의 배후에 다리우스가 있다는 추측이 있었다. 이는 페르시아인의 반란과 소요로 이어졌다.
다리우스 1세가 페르세폴리스의 건축을 의뢰한 것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을 뒤로하고, 그 과정에서 명성과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된다. 이는 또한 옛 수도인 파사르가다이와 바빌론, 수사, 엑바타나의 다른 행정 중심지 및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새로운 수도 이전을 요구했다.
페르세폴리스 - 페르시아 제국의 산지에 있는 기발한 위치
새로운 도시의 외지고 상당히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대는 주로 내부 및 외부 위협으로부터 안전과 방위를 위해 선택되었다.
일부 역사가에 따르면, 새로운 수도의 위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할 때까지 공격으로부터 추가적인 보안을 위해 일반적으로 나머지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천상의 부유함의 일부로서 다리우스가 지휘하는 권력, 힘, 자원을 페르시아인과 외부 방문객 및 사절들에게 모두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생각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발견되어 해독된 설형문자 기록에 의해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안전한 위치 덕분에 페르세폴리스는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왕실의 보고를 위한 이상적인 장소가 되었다. 이곳은 또한 공물, 기록보관소, 공예품, 귀한 보물 및 가치가 큰 예술품을 보관하는 가장 안전한 장소였다.
페르세폴리스의 주요 단지는 약 100년 후 다리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완성되었을 때 9개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다리우스 1세,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이름과 형상은 남아 있는 고대 도시 유적의 여러 표면에 자주 나타난다.
페르세폴리스 : 가장 웅장한 고대 수도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이 도시는 아케메네스 왕조와 페르시아 제국의 힘, 부, 능력을 보여주는 곳이 되었다. 레바논 삼나무, 자주색 염료, 값비싼 금속, 이집트 면직물, 인도의 황금을 포함하여 고대 세계의 모든 알려진 나라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사치스럽고 값비싼 재료들을 수입했다.
건축자재로는 석재, 진흙 벽돌, 목재가 있었다. 매우 아름다운 부조와 노란색, 갈색, 녹색으로 완벽하게 굽고 윤을 낸 벽돌을 포함하여 장식을 아낌없이 썼다. 궁중 단지 내 주요 건물의 이중문은 나무로 만들어지고 정교하게 장식된 금속으로 덮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동력에는 페르시아 제국 전역과 다른 독립 국가 출신의 숙련된 장인들과 예술가들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특히 정교하고 특이한 동물과 사람을 바늘로 조각한 것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이 없는 다리우스 조각은 그리스 예술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다.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페르세폴리스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찬란한 건축설계를 대변한다.
페르세폴리스 건설
다리우스는 BC 515년경 페르세폴리스 건설을 의뢰했다. 이 단지의 처음 3개 건물은 그가 죽기 전에 완공된 것으로 보이며, 네 번째 건물인 보고가 착공되었지만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재위 BC 486-465년)에 의해 완공되었다.
오늘날 이란의 마르브다슈트 평야로 알려진 위치는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정리되고 평탄해졌다. 건설업자들은 지반을 높여서 60 피트 높이의 1,345,488 평방피트의 평탄한 대지를 형성했다. 단지의 일부는 쿠헤 라흐메트 산(자비의 산)을 절개했다. 구멍은 금속으로 고정하고 흙과 바위로 채워졌다.
담수 공급, 하수 설비 및 지하수 배수 설비는 설계가 잘 되고 경이로운 공학 기술을 실행했다. 기술자들은 적절하면서도 안전한 공급 및 녹는 눈과 강수로부터 홍수 방지 시스템을 확보하기 위해 몇 가지 기술을 사용했다.
건축물들은 진흙 벽돌과 모르타르 없이 조립된 크고 정밀하게 절단한 석재로 지어졌다. 이 회색 석회암 블록의 표면은 연마되어 대리석처럼 광택이 났다.
아파다나 또는 알현실
다리우스는 회의장과 궁전으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옆에는 페르세폴리탄 계단으로 알려진 웅장하고 넓은 이중 계단과 입구 홀에서 궁전으로 이어지는 양쪽에 좁은 계단이 있다.
레바논에서 온 삼나무 들보 지붕을 자랑하는 200 피트 높이의 거대한 하이포스타일(기둥이 많은) 알현실인 아파다나는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유적일 것이다. 지붕은 62 피트 높이 테라스 위에서 72개의 기둥으로 지탱되었다. 각각의 기둥에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자 및 황소 조각과 같은 동물들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여러 지방에서 온 신하들과 함께 고관들이 선물을 가지고 와서 이 웅장한 구역에서 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고관, 사절, 그리고 봉신 국가의 대표로 구성된 민족들과 나라들은 아파다나 아래 테라스의 벽에 새겨진 얕은 돋을새김에서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 1세를 이해시키기 위해 다음과 같이 지었다.
"키루스는 창시자였고, 캄비세스는 주인이었으며, 다리우스는 장사꾼이었다."
(헤로도토스, 역사)
페르세폴리스는 장사꾼을 위한 상점 진열대였다!
크세르크세스 : 더 크게, 더 좋게
만국의 문에서 다리우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는 알현실이 있는 장엄한 궁전을 지었다.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계집질, 잔인한 전술, 그리고 과도한 지출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자신의 궁전이 아버지의 궁전의 두 배 크기라고 주장했다. 알현실은 60 피트 높이의 기둥 4개로 지탱되는 삼나무 지붕을 특징으로 했다.
3개의 장식된 문과 궁전으로 바로 연결되는 네 번째 비밀문이 있는 L자형 하렘은 22개의 방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보고는 하렘 뒤에 위치해 있었다. 페르세폴리스의 보고는 또한 귀중한 물품과 기록을 보관하는 무기고 및 저장고 역할을 했다. 크세르크세스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재위 BC 465-424년)가 완성한 것으로 여겨지는 100개의 기둥 홀(왕좌의 홀)로 이어졌다.
후계자들의 성채 확장
페르시아 제국의 왕위 계승자들이 이 단지에 건설한 추가 구조물은 왕실 마구간과 전차 보관소를 포함하며, 이 건물은 크세르크세스 왕의 궁전 뒤쪽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군대가 주둔하는 도시의 요새가 이 근처에 세워졌다.
다리우스의 경비대와 만 명의 불사 부대로 유명한 '돌격군'도 이곳에 수용되었다. 단지는 각각의 벽 사이에 간격을 두고 세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이 성벽들은 성채를 보호하기 위한 보안 구조물 역할을 했으며, 각 성벽 위에는 항상 경비대가 배치된 탑이 있었다. 어떤 후계자가 성벽을 쌓았는지, 언제 축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페르세폴리스의 약탈과 파괴
페르시아 제국은 패배했고, 페르세폴리스 도시는 BC 330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파괴되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역사총서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군대는 축하를 하고 있었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여자들의 권유로 도시에 불을 질렀다. 일부 역사가는 이러한 파괴의 이유가 BC 480년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나이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추측했다.
불이 나기 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군대가 도시를 약탈하도록 허용했고, 그는 며칠 동안 궁전의 보물들을 옮겼다. 다시 말하지만, 더 안전한 장소로 옮겨진 엄청난 양의 훌륭한 보물들을 묘사한 사람은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성채로 올라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손에 넣었다. 그곳에는 금과 은이 가득했고, 페르시아의 초대 왕 키루스로부터 그 당시까지 수입금이 축적되어 있었다. 금을 은으로 환산하면 2,500 톤이 그곳에서 발견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쟁비용으로 그 돈의 일부를 가져가고 나머지는 철저한 감시 아래 수사에 보관하고 싶어 했다. 바빌론, 메소포타미아, 수사 등지에서 단봉낙타 3천 마리와 함께 노새 떼를 불러, 일부는 등에 얹고 일부는 끌고, 모든 보물을 택한 장소로 옮겼다."
다행히도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들은 약탈되거나 파괴되지 않았다. 건물과 기념물에 새겨진 설형문자는 화재로 인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 게다가, 보고와 기록 보관소의 점토판과 인장은 열에 의해서 더 단단해졌다. 1933년 다리우스 궁전 아래에서 3개 국어로 된 비문이 새겨진 두 세트의 금판과 은판이 발견되었다.
페르세폴리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자랑이었다
1971년 페르세폴리스 유적은 페르시아/이란의 마지막 샤의 명령에 따라 페르시아 제국의 호화로운 2,50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청소, 광택, 보수되었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1930년대 에른스트 에밀 헤르츠펠트가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자였던 팔라비 왕조 레자 샤의 허락으로 발굴 허가를 받기 전까지 이 유적지 발굴을 독점했다.
프랑스의 건축가, 이집트 학자, 이란 학자, 재능있는 예술가인 샤를 시피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폐허가 된 건물 중 많은 것을 종이로 재건했다. 그중에 페르세폴리스의 기념물과 건축물들이 있다.
2021년 12월 페르세폴리스에 유적지와 주변의 물건들을 복원하기 위한 복원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환경 및 사람의 왕래로 인한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다.
고대 도시의 예전 웅장함은 유적에 뚜렷이 남아 있다. 한때 이 놀랍도록 부유한 도시의 일부였던 화려함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낀다. 돌과 삼나무의 생생한 색과 색조, 찬란한 부조, 화려한 보라색 커튼과 쿠션, 그리고 호화롭게 장식된 가구와 벽은 고대에 도시를 본 모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경외하게 했을 것이다!
출처 : The Collector
'중동 > 페르시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란 역사 연대표 - 아케메네스 제국 (0) | 2022.09.01 |
---|---|
이란 역사 연대표 - 제국의 출현 이전 (0) | 2022.08.21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자들 (0) | 2022.05.07 |
키루스 대왕의 죽음 (0) | 2021.06.27 |
펠루시움 전투(Battle of Pelusium, BC 525) (0) | 2021.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