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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페르시아

이란 역사 연대표 - 아케메네스 제국

by 금곡동로사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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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언제나 인류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었다. 과거 문명을 통해 우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더 발전되고 경험이 풍부한 방법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고대 문명의 기초와 원리는 더 나은 미래와 삶의 방식을 결론짓는 최고의 기술이다. 인류 문명과 농업의 기원은 물론 비문과 부조나 무덤의 형태로 된 기록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다. 이 섹션은 문서화된 기록만을 기반으로 한다. 여러분 앞에 놓인 연구는 고대사의 고고학적, 역사적 발견 및 증거에 따라 가장 정확하고 최신적이며 과학적인 문서이다. 이 섹션에는 요약된 역사 연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페르시아는 고대에는 학문적 지식의 강국이었다. 그들은 천문학, 의학, 수학, 문학, 철학 분야의 리더였다. 수천 년에 걸친 침략과 정복 동안, 페르시아인은 그것을 견뎌내고 침략자들을 물리칠 만큼 충분히 강인했다. 심지어 중세 동안 페르시아는 모든 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학자들을 배출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 - 알려진 세계 민족의 통합  BC 550-330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최초의 인도적이고 평등하며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제국이었으며 다양한 언어, 인종, 종교 및 문화로 구성되었다.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3개의 대륙과 25개국에 걸쳐 있었다. 제국은 동방과 서방 사이에 최초로 의미 있고 지속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세계 최초의 연방 정부 시스템이기도 했다! 대왕 또는 샤한샤(왕 중의 왕)의 치하에 있던 작은 왕에 의해 통치된 많은 주들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법정(왕과 왕비는 그들의 시민들로부터 어떠한 잘못으로든 고소될 수 있음)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각 주는 자신의 내정에 있어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내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연방제도에 비하면 원시적인 형태의 연방제였지만, 당시 중국,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나중에 로마를 포함한 모든 나라가 노예제도와 식민주의를 실천했을 때, 페르시아인들이 노예제도와 독재적인 억압을 끝내고 모든 주에 내부 자치권을 부여했다고 상상해 보라. 모든 주들은 그들의 업무, 교육 제도, 현지 언어, 그리고 심지어 자체 군대까지 통제할 수 있었다! 페르세폴리스가 요구한 유일한 것은 국제 정치 및 군사 문제에서 중앙 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이었다. 지역 전통, 법률, 언어 및 종교에 대한 페르시아의 존중은 상대적으로 자비로운 제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연방주의는 페르시아를 강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전쟁 중에도, 각 주는 자체 군사력을 제공하고, 마더 페르시아를 방어해야 했다! 제국은 그들의 내부 자치권, 권리, 자유, 독립, 평등 및 인간성을 보장했기 때문에 그들은 제국을 방어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키루스 대왕이 건설한 시스템이자 세계 최초의 인도적인 연방 제국이었다.

 

고대 페르세폴리스 유적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의례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재건 : 페르시아 제국의 왕족 의식 수도

 

로마 제국이 부상하기 전에, 제국은 법치주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대,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국가 행정의 중요성에 대한 선례를 남겼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 큰 유산은 하나의 중앙 정부 아래에서 다양한 민족이 어떻게 문화적으로 번창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는지를 처음으로 보여준 것이다.

행정가로서 키루스 대왕의 통찰력은 대단했고, 지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인간성은 그의 이전과 후대의 위대한 군주들의 특징인 고립과 초탈로 연민을 유발하는 대신 오만함으로부터 벗어나 동급으로 사람들을 만나며 동일하게 대했다. 역사는 더욱이 그를 천재, 외교관, 관리자, 그리고 인류의 지도자, 최초의 위대한 선전가이자 유능한 전략가로 규정하기도 했다. 키루스는 참으로 위대한 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했다.

 

페르세폴리스의 재건 : 테라스 및 페르세폴리스 문으로 가는 주요 계단

 

판테아 아르테쉬보드 (사령관)

판테아 아르테쉬보드(Pantea Arteshbod, BC 570-525년)는 키루스 대왕의 치세(BC 559-530년) 동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페르시아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아리아스브(아케메네스 아르테쉬보드) 장군의 아내였다. 그녀는 BC 547년 키루스 대왕이 신 바빌로니아 제국을 정복한 후 바빌로니아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판테아 사령관은 고대 전장에서 존재함으로써 전투 결과에 영향을 미쳤고 고대 군사 업적의 태피스트리를 구축하는 데 역할을 한 진정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군사 지휘관이었다. 판테아와 아리아스브 장군은 페르시아 제국의 확장 기간 동안 제국 근위대와 상비군을 겸직한 페르시아 정예부대의 지휘관이었다. 그들은 아케메네스 제국에서 전쟁 시 페르시아 군대의 정예 중핵을, 평화 시에는 왕실 근위대를 형성했다. 페르시아 전설에 따르면 판테아는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인한 여성이었고, 전쟁 중에는 얼굴을 보호하는 동시에 남자들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위협적인 전투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정예부대는 정확히 10,000명의 병력으로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불사 부대로 알려져 있었고,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모든 구성원은 즉시 교체되었다. 충성심을 보장하기 위해, 이 불멸의 전투 기계의 최초 구성원들은 혈통에 따라 페르시아인이었고 어린 시절(7세 이상)부터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엄격하고 힘들었기 때문에 모두가 만 명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또한 생명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기 위해 선지자 자라투스트라의 종교와 그의 가르침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불사 부대는 각 전투의 마지막 단계에서 왕 중의 왕의 명에 따라 전략적으로 적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증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아르테쉬보드 판테아 - 페르시아 불사 부대 사령관

페르세폴리스에 있는 제국 군대의 명예의 전당 (백열주궁이라고도 함)

페르세폴리스의 유적 : 불사 부대의 정렬을 보여주는 트리필론(세 개의 문) 계단

역사 유물 - 국립 박물관의 BC 5세기 아케메네스 황금 단검

 

카산다네 왕비

카산다네(Cassandane, BC 575-519년) 샤흐바누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귀족 여성으로 파르나스페스의 딸이자 키루스 대왕의 사랑하는 아내이다. 그녀는 네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캄비세스 2세(아버지의 뒤를 잇고 이집트를 정복), 스메르디스(바르디야)도 잠시 페르시아의 왕으로 군림했고 아투사라는 이름의 강력한 딸이었다. 아투사 공주는 나중에 아케메네스 왕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루스는 그의 왕비 카산다네를 끔찍이 사랑했고 그녀가 죽었을 때 제국 전체가 큰 애도를 표했다. 키루스는 그녀를 잃은 슬픔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고 그녀가 죽은 후 거의 10년 동안 활동하지 않았다. 모든 위대한 남자 뒤에는 위대한 여자가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나보니두스 연대기에는 왕의 아내가 죽었을 때 제국의 일부인 25개국과 함께 페르시아에서 오랫동안 대중의 애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카산다네 왕비는 페르시아의 젠단-에 솔레이만(Zendān-e Soleymān)이라고 불리는 탑에 묻혔다.

 

키루스 대왕과 그가 사랑하는 샤흐바누, 카산다네 왕비

페르세폴리스의 유적 : 입구를 지키는 사자의 몸을 가진 독수리 머리 그리핀

 

국제 키루스의 날

10월 29일은 전 세계적으로 기념되는 키루스 인권의 날이다. 인권 지지자들은 이 날을 세계 인권의 첫 장으로 알려진 유명한 키루스 실린더를 기념하기 위해 소중히 여긴다. 이 날은 키루스가 노예제도와 독재적인 억압을 종식시킨 날이며, 그의 목표는 전 세계에서 그러한 비인간적인 전통을 근절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페르시아인들은 세계의 소수민족의 종교와 문화의 자유를 개척했다. 이날 키루스가 정식으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대관식 당일 마르둑 사원에서 손으로 왕관을 쓴 뒤 키루스는 자유헌장을 낭독했다. 키루스는 그의 시대에 관용과 평등의 정책을 준수했는데,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형태의 연방국가 및 제국을 만드는 열쇠였다.

BC 539년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에 입성하여 바빌로니아인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5만 명의 유대인을 해방하고 보호했으며, 그들이 고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도왔고, 페르시아의 납세자 비용과 왕실 국고의 자금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도왔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키루스의 칙령은 유대인 역사에 큰 한 획을 그었고, 그는 후에 히브리 성경(구약성서)에서 유대인의 후원자이자 구원자로서 야훼가 보낸 메시아로 여겨졌다. 이들 진술에서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이 포로 및 노예 생활을 끝낸 군주인 것으로 나타난다.

 


키루스 대왕의 자유 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페르시아 왕국의 왕관을 씌운 지금, 나는 내 제국의 국가들의 전통, 관습, 종교를 존중하고, 나의 총독과 부하들이 그들을 멸시하거나 모욕하지 못하도록 할 것을 선언한다. 나는 어떤 나라에도 나의 군주제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그것을 받아들일 자유가 있고, 그들 중 누군가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나는 결코 통치하기 위해 전쟁을 결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두지 않을 것이며,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그의 권리를 되찾고 압제자에게 벌을 줄 것이다. 나는 누구도 강제로 또는 보상 없이 다른 사람들의 동산 및 토지 재산을 점유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무급 강제 노동을 금지한다. 오늘, 나는 모든 사람이 종교를 선택할 자유가 있음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모든 지역에서 자유롭게 생활하고 직업을 가질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친족의 잘못으로 인해 처벌을 받을 수 없다. 나는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나의 총독과 부하들은 자신의 통치 영역 내에서 남자와 여자를 노예로 교환하는 것을 금지할 의무가 있다. 그런 전통은 전 세계적으로 근절되어야 한다...'

 

역사 유물 - 대영박물관의 키루스 인권 헌장


키루스 대왕이 작성한 인권 선언문은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보다 거의 2천년기(-1700년) 앞선 최초의 인권 헌장으로 환영받았고 1971년 유엔은 이를 모든 공식 언어로 번역하여 출판했다.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역사적 기록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키루스 인권 헌장의 복제품이 뉴욕의 유엔 본부에 보관되어 있다.

 

페르세폴리스의 재건, 페르시아 제국의 왕실 의례 수도

 

키루스 대왕이 살해당하다

대왕은 BC 530년 중앙아시아의 마사게타이에 대한 원정 중 독화살을 맞아 전장에서 사망했다. 키루스의 시신은 페르시아의 파사르가다이로 옮겨졌다. 여전히 존재하는 그의 무덤은 6단의 기초에 하나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신은 황금 석관에 안치되었고, 무덤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가장 존경받는 세계 지도자로 여겨진다. 그는 모든 민족이 그들의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생각했고, 정복된 민족들의 문화, 언어, 종교를 존중했다. 키루스는 비교적 자유주의자였다. 그 자신은 조로아스터교의 신앙에 따라 통치했지만, 그는 자신의 영토에 속한 사람들에게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항상 자신의 병사들과 나란히 싸웠으며 전장에서 그들을 외로이 두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다시 한번 페르시아 국토가 되기 위해 파사르가다이에 묻히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형태의 연방국가를 창설한 키루스 대왕은 파사르가다이에서 세계 문명의 미래를 조명하며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파사르가다이 - 평화의 궁전과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 무덤

파사르가다이 - 2500주년을 맞은 키루스 대왕의 무덤

 

신비스러운 군주 캄비세스 2세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캄부지야)는 페르시아의 왕(BC 530-522년)으로 즉위했다. 캄비세스는 그의 아버지가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 넓은 마음의 관용을 동일하게 보여주었다. 캄비세스는 추측으로 가득 찬 통치기를 보냈고 편파적인 그리스 역사가(헤로도토스)가 쓴 그의 삶을 둘러싼 많은 소문과 거짓말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를 이집트의 신성한 아피스 황소를 죽이고, 아마시스(마지막 이집트 파라오)의 몸을 불태우고, 자살한 정신병에 걸린 왕으로 묘사한다...

BC 525년 캄비세스가 펠루시움에서 이집트를 정복했을 때, 그는 자신의 병사들이 훼손한 네이트의 거대한 신전을 수리하고, 스스로 이시스의 신비에 대해 가르쳤다. 50,000명 이상의 정예 병사를 거느린 캄비세스의 전설적인 군대는 페르시아로 귀환하는 동안 격변하는 모래 폭풍에 삼켜졌다. 잃어버린 페르시아 군대의 전설은 수천 년 동안 미스터리였다.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그의 형제 스메르디스를 자칭하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선언했다. 스메르디스는 그 후 다리우스 대왕에게 타도되었다.

페르세폴리스의 유적 : 수호 사자상 (사자는 불의 조로아스터교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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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대왕

다리우스 대왕의 통치(BC 522-486년)는 페르시아 제국의 정점을 나타냈다. 키루스가 확립한 전통을 고수하면서, 다리우스는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중시했고 그의 목표는 위대한 입법자이자 조직가가 되는 것이었다. 다리우스는 BC 550년에 태어났고 그가 28세가 되었을 때 그는 약 5천만 명, 즉 세계 인구의 적어도 44%를 통치했다. 그는 민족적 및 지방 정부와 유사한 사트라피 제도 하에서 제국을 구성했다. 그는 많은 도로, 항구, 금융회사, 정교한 지하 관개 시스템, 그리고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수에즈 운하의 초기 선구자)를 건설했다. 다리우스는 세계 최초로 세금 체계, 관세, 공식 기록, 법전을 제정했다. 페르시아 제국의 부와 다문화적 측면을 반영하여, 다리우스는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설을 시작했다. 건설을 위해, 제국의 여러 곳에서 장인들과 자재가 모였다.

다리우스는 역사상 최초의 (확실히 그렇게 방대한 규모의 최초) 통용 주화인 다릭을 도입함으로써 인류의 경제 활동에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계획은 도량형 표준화 및 상법의 성문화와 함께 세계 무역을 촉진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경제를 새로운 차원의 번영으로 끌어올렸다. 추가적으로, 20개의 사트라피를 연결하는 2,500 km의 거대한 도로 프로젝트는 제국의 모든 나라에 대한 경제를 강화하고 풍요롭게 했다.

보고 부조로 알려진 다리우스 대왕의 노루즈 알현의 얕은 돋을새김


다리우스가 수행한 또 다른 프로젝트는 세계에서 가장 긴 왕도로 1,500 마일에 달하는 것이었다(지도 참조). 광범위한 중계망 덕분에 우편배달부는 6일에서 9일 안에 도로를 이동할 수 있었고, 일반적인 이동 시간은 3개월이었다. 페르시아 우편 서비스의 모토는 눈, 비, 더위, 밤의 어둠에도 멈추지 않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미국 우편 서비스도 이 모토를 채택했고 유명한 포니 익스프레스 우편배달은 원래 페르시아의 디자인과 비슷했다.

페르세폴리스 궁전 입구를 지키는 아케메네스 장교

아케메네스 예술의 걸작, 페르세폴리스 기념물 건축

내크쉬에로스탬(Naghsh-e Rostam) - 다리우스 대왕과 아투사 샤흐바누의 무덤

 

강력한 왕비 아투사

아투사(Atusa, BC 550-475년) 샤흐바누는 페르시아의 왕비로, 다리우스 대왕의 아내이자 키루스 대왕과 카산다네 왕비의 딸이며, 캄비세스 2세의 누이이고 크세르크세스 대왕(케샤야르 샤)의 어머니이다. 그 시대의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은 무시무시한 아투사가 모든 권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아투사는 아케메네스 왕실에서 막강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권력과 영향력 그리고 키루스 대왕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 때문에 다리우스 1세와의 결혼한 것으로 제안되었다. 그녀의 어머니 카산다네가 사망했을 때 페르시아 제국의 모든 나라는 몇 달 동안 지속된 큰 애도를 표했다. 아투사는 궁정의 일을 관장했다. 그녀는 군사 임무에 투입할 사람을 결정할 때 발언권이 있었다. 그녀는 다리우스 대왕의 후계자로 그의 장남 아르토바자네스가 아닌 크세르크세스임을 확실히 했다. 고대 페르시아 문자의 발명은 그녀 덕분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투사는 매우 강한 여성의 직관력과 육감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왕은 이를 매우 존중하고 따랐다고 한다. 아투사는 페르세폴리스의 행정 기록 보관소인 페르세폴리스 요새 서판에 잘 언급되어 있다. 그녀는 자신의 행정부와 거대한 개인 군대를 보유하고 매우 부유했다. 아투사와 다리우스 대왕은 키루스 대왕의 발자취를 따랐고, 정복한 국가들의 문화, 언어, 종교를 존중했으며, 모든 나라가 그들의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여겼다.

 

다리우스 대왕(다리우스 1세)과 그의 강력한 왕비 아투사 샤흐바누

역사 유물 - 이란 국립 박물관에 있는 BC 5세기 아토사의 흉상

왕비의 왕궁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페르시아와의 전쟁(BC 490-479년)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결코 페르시아 심장부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리스인은 세월 동안 페르시아 영토에 대한 테러 공격을 수행해 왔다. 그들은 페르시아 도시들을 공격하고, 페르시아 신전에 불을 질렀으며, 주요 무역로를 어지럽혔으며,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상선을 해적질했다. 그들은 페르시아 속주 내에서 반란을 선동했지만, 아마도 페르시아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그리스인들이 손쉽게 조약을 파기하고 페르시아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었을 것이다. 페르시아는 폭력에 호소하기보다는 친페르시아 성향의 그리스 정치인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리스인을 견제하려 했지만, 마침내 페르시아의 분노를 촉발한 것은 잘 문서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편향적인 헤로도토스(역사의 아버지)가 서구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BC 498년,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주요 도시인 사르디스에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아테네인은 사르디스 외곽 지역에 불을 질렀고, 대부분의 인구를 불의 고리에 가두어 말 그대로 수십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죽였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정복하려 하지 않았고, 제국은 이미 3개 대륙과 25개 이상의 국가에 걸쳐 확장되어 있었다. 많은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은 보호령으로서 이미 페르시아의 일부였고 페르시아인은 그리스 철학자들을 존경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을 고용했다. 또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항상 서로 싸우느라 바빴고 페르시아 왕들은 그 지역을 매우 불안정하다고 보고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페르시아는 주로 페르시아 영토에 대한 테러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만 그리스를 공격했다(미국이 9/11 이후에 한 것과 유사).

페르시아의 분노와 응징

BC 490년 혜성의 밤, 그가 가장 신뢰하는 정예 부대인 강력한 불사 부대 앞에서 다리우스 대왕은 그가 사랑하는 조상인 키루스 대왕에게 경의를 표했다... 파사르가다이에 있는 그의 안식처에서. 그는 자유와 응징의 상징으로 죽은 왕의 검을 들고 페르시아 영토와 민간인에 대한 모든 그리스 테러 공격에 대해 아테네를 처벌하기 위해 복수를 외쳤다. 다리우스는 병사들에게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는 날까지 결코 쉬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의 조상들에게 키루스 대왕의 무덤에 새겨진 글이 영원히 귀에 울려 퍼지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페르시아 법에 따르면,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은 그러한 진지한 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유언장을 작성하고 후계자를 선택해야 했다. 떠나기로 한(BC 487-486) 중대한 결정에 다리우스는 그의 무덤을 내크쉬에로스탬에 마련하고 아들 크세르크세스를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다리우스의 건강 악화로 인해 그는 원정을 이끌 수 없었고, BC 486년 10월에 사망하여 아들 크세르크세스에게 임무를 맡겼다.

 

다리우스 대왕의 무덤에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위대하신 신의 은총으로 나는 정의를 믿고 불의를 혐오한다. 약자가 강자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페르세폴리스 유적 : 새벽에 페르시아 왕 중의 왕의 궁전

 

역사적 여성 사업가

이르다바마는 크세르크세스 대왕(BC 518-465년)의 통치기에 살았던 매우 성공적인 페르시아 여성 사업가였다. 그녀는 강력한 지주였고 거대한 노동력을 통제했다. 그녀는 자신의 와인 및 곡물 사업을 운영했다. 페르세폴리스 요새 서판에는 그녀의 부, 작업장, 그리고 남녀노소 수백 명의 일꾼들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대단한 위신과 권력을 의미하는 자신의 인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귀족 계급이었지만, 대부분의 귀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르다바마는 막대한 재산과 부, 높은 사회적 지위가 왕실 여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근면과 결단력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비 왕실 계급의 그녀는 상당한 재산, 영향력 및 자율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국제 역사책에서도 잘 언급되어 있다. 이르다바마는 고대 페르시아 세계의 성공적이고 강력한 많은 여성 사업가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자율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여성의 권위와 독립을 받아들이는 평등한 사회 제도의 존재를 나타내는 자신의 인장과 서신을 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이르다바마 이후 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럽에서 로마 여성은 자신의 사업과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안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부유한 가정의 여성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와 그리스 역사가들에 따르면 노동은 노예와 하층민을 위해 남겨졌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이 열등한 종으로 여겨졌다. 여성의 권리는 그리스 로마 문화 및 법률, 유대교, 기독교 및 특히 이슬람교와 같은 아브라함계 종교의 확산으로 크게 감소했다.

페르시아인은 유럽 남부, 이집트, 인도 및 중국과 같은 먼 곳까지 와인을 수출/거래했다

역사 유물 - 이란 국립 박물관에 있는 BC 5세기 아케메네스 황금 리톤

역사 유물 - BC 4세기의 매우 희귀한 고대 페르시아 금잔

 

크세르크세스 대왕

크세르크세스(BC 518-465년)는 다리우스 대왕과 아투사 왕비(키루스 대왕의 딸)의 아들이다. BC 486년 10월에 즉위한 후, 그는 제국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는 이전 해에 발발한 이집트와 바빌론의 반란을 진압했다. 그의 초기 아내이자 왕비(에스더 이전의)인 아메스트리스 샤흐바누는 오타네스(헤로도토스의 히스토리아이(역사)에서 민주주의 옹호자로 언급된 페르시아 귀족)의 아름다운 딸이었다. 그녀는 또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사 지휘관이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제국 군대의 아르테쉬보드 장군이었다. 아메스트리스는 편향적인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제국에서 법치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선례를 남기기 위해 법을 어긴 자들을 상대로 한 어떤 페르시아 왕보다도 더 피에 굶주린 것으로 명성을 떨쳤다. 아메스트리스 왕비는 위대하고 매우 엄격한 입법가였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그녀가 죽은 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2세 왕이 딸의 이름을 그녀의 이름을 따서 아메스트리스로 지었다는 것이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케샤야르 샤)와 그의 초기 아내 아메스트리스 샤흐바누

만국의 문이자 고대 도시 페르세폴리스로 들어가는 입구

페르세폴리스 유적 : 만국의 문이자 고대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

 

페르시아의 분노 - 2부

다리우스 대왕은 아테네인이 이오니아 반란에 개입한 것과 사르디스 도시를 불태운 것에 대해 처벌하는 임무를 그의 아들에게 남겼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10,000명의 정예 전사들(불사 부대)과 약 50,000명의 전투원과 함께 원정을 준비했다. 게다가, 많은 그리스 소국들도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다.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가 승리한 후, 아테네는 버려졌고 크세르크세스 왕은 페르시아 영토와 민간인에 대한 이전의 모든 그리스 테러 공격에 대한 응징이자 경고로 정부 본부와 궁전의 일부를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크세르크세스는 나중에 파괴된 도시의 민간인 거주 지역 일부를 재건하고 아테네 시민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를 영원히 떠났다. 이는 아테네인들이 페르시아 도시 사르디스와 그 모든 시민들을 전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얼마나 인도적이고 민간인들을 얼마나 존중했는지를 보여준다. 페르시아는 전쟁을 통해 성공한 것이 아니라 외교를 통해 얻은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지휘한 크세르크세스 대왕

페르세폴리스 유적 : 그랜드 엔트리에서 사자 대 황소 : 궁전의 이중 입구

 

아르테미시아 대제독

아르테미시아(BC 500-450년)는 할리카르낫소스(그리스 도시 국가이자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녀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 1세(케샤야르 샤) 대군주 치하에서 통치했다. 그녀는 전설적인 대제독이자 페르시아 해군의 지도자였고, 크세르크세스가 대단히 사랑했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강력하고 독립적이며 지적인 여성이다. BC 480년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와 전쟁을 벌였을 때, 아르테미시아는 강력한 선단을 이끌고 살라미스 해전 초기 단계에서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군을 물리치는 것을 도왔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역사의 아버지)는 상당히 당황한 듯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보기에 여자인 그녀가 그리스에 대한 캠페인에 참여했어야 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 것 같다. 헤로도토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무장을 한 여자들을 원망했다고 언급한다. 그리스군은 아르테미시아의 머리를 가져오는 대가로 10,000 드라크메를 보상하겠다고 했지만, 아무도 상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페르시아는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었고 그리스는 수십 개의 분리되고 흩어져 있는 도시 국가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각 고유한 음악을 연주하고 항상 서로 싸우느라 바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도시 국가 중 일부는 친페르시아였고, 일부는 반페르시아였으며, 일부는 중립이었고, 일부는 보호령으로서 페르시아의 일부였다! 아르테미시아 제독은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고 제국과 알려진 문명 세계의 모든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었다.

 

아르테미시아 대제독과 크세르크세스 대왕

왕실 해군 장교와 전투 전략에 대해 논의하는 아르테미시아 대제독

 

역사에 대한 음모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물론 고전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가 썼다. 그의 책 "히스토리아이"는 최근에야 서구 민속학의 일부가 되었다. 약 1850년이 되어서야 미국은 헤로도토스를 페르시아 역사의 최고 권위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1850년 이전에 서방은 인도적인 페르시아 연방 제국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고 진실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페르시아 역사에 대한 서방의 주요 출처가 성서와 키루스 대왕의 군주제 및 페르시아 제국의 인간성을 찬미한 키로파이디아(키루스의 교육)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의 군주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운 두 번의 유혈 혁명의 결과로, 19세기 중반 유럽 전역에 민주주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주요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헤로도토스는 완벽한 선전 도구였으며 역사의 아버지로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1850년경, 그의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페르시아 군주제의 강력한 세력에 대항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서구의 투쟁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믿기 쉽다. 300명의 용감한 스파르타 야만인이 3백만 명의 사악한 페르시아인으로부터 서구 민주주의를 구했다! 그러나 허황된 숫자들을 차치하고라도, 이 기발한 이야기는 역사에 대한 편견에 불과한 설명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2천 년 이상 동안 동서양을 갈라놓은 가장 강력한 쐐기였다. 동양과 서양이 서로의 차이를 조정해야 하는 시기에, 그 쐐기를 더 깊게 박을 영화 300이 나왔다.

스파르타인은 매년 스포츠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극도로 잔인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주변에 살던 무방비 상태의 헤일로타이(그리스 노예)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문명화된 고대 세계 전체가 그들을 피에 굶주린 야만인으로 여겼다. 헤로도토스는 사실상 모든 서구 인구통계학에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노예제도가 그리스 사회의 필수적인 초석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아마도 현대에 있어서 최고의 정부 형태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민주주의라기보다는 그들의 권리장전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를 위대하게 만든 것이다. 민주주의는 종종 여성, 노예, 외국인에게 투표권이 없었던 민주적인 아테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다수에 의한 폭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군주제 페르시아에서 여성들은 오늘날까지도 비길 데 없는 수준의 양성평등을 누렸고, 노예제도는 행해지지 않았다. 사실, 페르시아의 군주제는 모두 페르시아의 권리장전 덕분에 아테네 민주주의보다 더 자유로웠다.

 


... 역사는 항상 승자에 의해 쓰이는 불행한 이야기이며, 일반적인 그리스 시대착오주의는 종종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변질시킨다.

 

성서의 에스더

 

에스더(출생 시 하닷사, BC 492-460년)는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아내이자 페르시아의 첫 유대인 왕비이며 페르시아 왕이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도움을 준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성서 에스더서의 여주인공이다. 많은 면에서, 에스더의 이야기는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읽힌다. 성서 원문에서 실제 역사와 허구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많은 현대 학자들은 에스더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성서 에스더에 따르면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는 자신의 제국의 광대한 부와 당당한 웅장함과 위엄과 영광을 세상에 과시하기 위해 수사에서 180일간의 잔치를 열었다. 왕의 마음이 포도주에 흥겨워지자 왕은 일곱 신하에게 명하여 왕후 와스디에게 왕후의 관을 쓰고 손님들 앞에 불러 그 아름다움을 과시하게 했다. 그녀는 6개월 가까이 이어지는 수사 축제에 오기를 거부하고 술에 취한 왕궁 손님들 앞에서 다시는 부끄럽고 싶지 않아 밤에 궁전을 떠났다. 그녀의 거절에 격분한 왕은 현자와 페르시아의 일곱 군주에게 조언을 구했고, 그들은 새로운 왕비를 찾으라고 충고했다. 왕은 이 조언에 따라 반항적인 왕후 와스디를 추방하고 전국적인 대규모 미인대회를 통해 새로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


모든 지역에서 아름다운 젊은 여성들이 왕궁으로 모였다. 에스더는 그녀의 양부이자 보호자인 모르드개가 이 역할을 맡았다. 12개월간 각 여성은 하렘에서 미용 치료와 왕실 예절과 에티켓의 교육적 중요성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하렘에서 왕의 궁전으로 가지고 가거나, 갖고 싶은 모든 것을 받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왕의 눈과 관심을 끌기 위해 화려한 색상의 드레스를 선택하고, 짙은 화장을 하고, 최대한 많은 금과 다이아몬드 장신구를 차고 다녔다. 에스더가 왕궁에 갈 때가 되었을 때, 그녀는 찾을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흰색 드레스를 골랐고, 최소한의 화장과 장신구를 착용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젊고 아름다운 다른 여자들보다 에스더를 더 좋아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만큼 그를 기쁘게 하지 못했고, 그는 곧바로 그녀의 타고난 아름다움, 소박함, 성실함, 지성에 반해 그녀를 자신의 아내이자 왕비로 삼았다. 에스더를 기리기 위해, 그는 자신의 군주들과 신하들을 위해 성대한 만찬을 베풀었다. 그때에 그는 자기의 제국에 속한 스물다섯 나라 모두와 함께, 광대한 왕국에 도처에 휴일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었다. 에스더와 그녀의 양아버지 모르드개는 모두 페르시아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다.

 

크세르크세스 대왕의 환영을 받은 샤흐바누 에스더

궁전의 사자 아래에서 샤흐바누 왕비 에스더와 함께 크세르크세스 대왕

페르세폴리스의 재건 : 왕 중의 왕의 관저

 

파리사티스 왕비

파리사티스(Pari Satis)는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사생아로 크세르크세스 2세의 이복 누이이며 다리우스 2세 왕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었을 때, 그녀는 장군이기도 한 어린 아들 키루스 왕자를 지원했다. 키루스는 쿠나크사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사트라프 티사페르네스의 탓으로 돌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아들을 죽인 자에게 복수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은 자신을 배신한 동생을 제거하고 싶어 했지만, 파리사티스가 성공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군대와 함께 질서와 평화를 회복했다(페르시아 왕비는 대규모 사유지와 개인 군대를 보유했다).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소행성 888 Parysatis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는 것이다.

아파다나 궁전의 재건 - 페르세폴리스의 알현홀

페르세폴리스 유적 : 날개 달린 인간 얼굴 사자 수호자


아마존

국제 학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지 못한 분야 중 하나가 고대 페르시아 여전사들의 역할이다. 고대 페르시아 여전사의 역할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아마존이라고 알려진 여전사들은 BC 5세기 또는 그 이전에 이란의 북부(오늘날의 길란, 마잔다란, 고르간)와 북서부(오늘날 이란의 아자르바이잔)에서 우세했던 전사들의 전형이다. 스키타이인(페르시아어로 사카)과 그들의 후계자로 알려진 사르마티아인(또는 아르드-알란)의 고대 북이란 전사들의 무덤에서 수많은 발견이 있었다. 고대 무덤은 종종 칼, 방패, 그리고 기타 전쟁 장비들과 함께 묻힌 여전사들의 유해를 산출했다. 이 무덤들은 코카서스와 이란(북쪽과 북서쪽)으로 들어가는 길에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페르시아 여전사의 아케메네스 부대. 지휘관이 전면에 있다

전투 중인 북이란 사카족 또는 스키타이인의 재건


중앙아시아 스텝은 수천 년 동안 이란 유목민의 본거지였다. 이란계 스키타이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사르곤 2세의 통치(BC 713년 이전)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시리아 기록에서 나온다. 스키타이인은 다양한 군국주의적 이란계 목축 집단이었으며 그들의 언어는 이란어족(동이란어족)에 속한다. 오늘날 이란의 시스탄 주는 역사적으로 삭스(Saks)의 땅(스키타이인의 발상지)을 의미하는 사케스탄으로 알려져 있다.

 

BC 6세기 유목 및 정주(제국) 이란 민족

 

시시감비스(시시캄비스)

시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쟁에서 통치가 끝난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놀랄만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여성이다. 이소스 전투(BC 333년)에서, 다리우스의 군대는 패주했고 페르시아 왕은 그의 어머니, 아내 스타테리아 1세, 자녀들, 그리고 많은 다른 이들을 포함한 그의 확장된 가족을 떠나 전장에서 달아났으며, 이들은 알렉산드로스의 자비에 맡겨졌다. 페르시아 군대의 스키타이 기병대가 그들에게 도달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돌파했을 때, 그녀는 가족을 버린 아들 다리우스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페르시아의 승리로 보였던 것을 축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사로잡힌 후 그에게 헌신했고, 알렉산드로스는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으며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의 두 번째 양어머니가 되었다.

새벽에 페르세폴리스 유적


페르시아 관문 전투

아리오바르잔(아리아인을 칭송한다는 의미)이라고도 하는 전설적인 페르시아의 영웅 아리오바르자네스(고대 그리스어 Ἀριοβαρζάνης) 장군은 BC 330년 겨울에 페르세폴리스 근처의 페르시아 관문에서 수적으로 열세였던 페르시아 군대의 마지막 저항을 이끌었다(페르시아 관문 전투). 침략하는 그리스 동맹에 맞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성공적으로 매복 공격하여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한 달 동안 마케도니아군을 저지했다. 150년 전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현지 그리스인이 페르시아군에게 고개 주변의 비밀 경로를 보여줬던 것처럼... 이란의 양치기가 페르시아 방어선 주변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를 이끌었다는 역사적 기록도 있다.

그의 용감한 누이 유타브 아리오바르잔도 페르시아 군대의 일부를 지휘했고, 많은 전투 동안 그녀의 형제와 나란히 서 있었다.

 

아리오바르잔 장군과 그의 여동생 유타브의 예술적 재구성


아래 이미지 : 이란 청년들이 2011년 7월 초 아리오바르잔 동상 주변에 인간 사슬을 형성하여 극우 종파에 의한 파괴를 방지해 야수즈(이란 남부) 도시에서 유산을 지속하고 있다.

 

 

 

 

출처 : PERSEPO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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