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여 년 전 AD 14년 8월 19일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죽었다. 그는 로마의 첫 번째 황제였으며 40년 전에 내전에서 이기고 역기능적인 로마 공화국을 제국으로 변모시켰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이끄는 제국은 200년 동안 상대적인 평화와 번영을 경험했다. 다음은 로마 제국의 흥망 성쇠, 문화와 경제, 그리고 그것이 현대 세계의 기초를 놓은 방법을 설명하는 40개의 지도이다.
1. 로마의 흥망 성쇠
BC 500년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였다. BC 200년에 로마 공화국은 이탈리아를 정복했으며 이후 2세기 동안 그리스와 스페인, 북아프리카 해안, 중동의 많은 부분, 오늘날의 프랑스, 심지어 외딴섬인 영국까지 정복했다. BC 27년에 공화국은 제국이 되었고 4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마침내 광대한 지역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커졌다. 로마는 점차 동과 서로 나뉘었고 AD 476년까지 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족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기반을 둔 동 로마 제국은 그 후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2. 로마 제국은 광대했다
AD 100년 경에 로마 제국은 북서쪽의 영국에서 남동쪽의 이집트까지 뻗어있었다. 얼마나 큰지 이해하려면 현대 미국과 비교하는 것이 좋다. 영국과 이집트의 로마 지방은 미국 플로리다와 워싱턴 주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은 로마 제국의 중간에 지중해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보급품을 먼 거리로 이동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도와 전신이 있기 오랜 세월 전에 (비행기와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이) 황제들이 이렇게 광대한 영역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다.
3. 제국 사방을 여행하는 것은 엄청나게 느렸다
이 지도는 당시의 운송 기술에 비해 로마 영토가 얼마나 큰지에 대한 몇 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Stanford의 연구자들이 만든 이 문서는 누군가 로마를 떠나 제국 주변의 여러 위치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추정했다. 지중해는 주변을 돌아 다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중해 서부의 대부분의 해안 지역은 일주일 이내에 도달할 수 있으며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과 같은 멀리 떨어진 해안 도시까지도 2주 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륙으로 여행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영국과 같이 제국에서 가장 먼 지점에 도달하는 데는 거의 한 달이 걸릴 수 있다. 물론 제국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하는데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연구원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제국의 동쪽 끝)에서 런던(극 서쪽)까지 여행하는데 7주가 걸렸다고 추정했다.
4. 117년 로마의 속주들
로마 제국은 AD 117년 트라야누스의 통치 아래 가장 큰 규모에 도달했다. 행정을 돕기 위해 속주로 나뉘었다. 영토를 얻거나 잃고 더 큰 속주가 더 작은 속주로 나뉨에 따라 속주의 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경되었다. 트라야누스 아래에는 46개의 속주가 있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285-305)의 통치에 의해 96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트라야누스 시대에 내부의 속주는 주요 귀족들이 운영하는 입법 기관인 원로원이 선택한 총독이 운영했다. 반대로, 국경 지역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총독이 운영했다. 이것은 안보를 위한 조치였다. 국경 지역은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가 필요했고 황제는 이 군대가 황제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지 않는 사람의 통제하에 놓이면 그 사람이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을 황제라고 선언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것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쿠데타와 내전은 제국에 반복되는 문제였다.
로마의 부상
5. 로마가 정복하기 전의 이탈리아
초기에 로마는 다른 여러 민족과 이탈리아를 공유했다. 로마 인근의 지배적인 세력은 에트루리아인이었다. 우리는 이 사람들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부분적으로 그들의 독특한 언어를 읽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거는 로마가 반란을 일으켜 공화국을 수립할 때까지 에트루리아인 왕이 로마를 통치한 것이 시사한다. 이 사건은 전통적으로 BC 5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동부는 로마인의 원주민인 라틴어와 관련된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부족이었다. 그리고 BC 400년 경 기술적으로 번영하는 그리스인들은 이탈리아의 남쪽 끝에 식민지를 세웠다.
6. 로마가 이탈리아를 정복하다
로마는 BC 340년에 많은 도시 국가 중 하나였으나 264년까지 반도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정복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 340년에 로마는 동맹이었던 이웃 라틴인과 충돌하여 338년까지 그들을 제압했다. 326년부터 로마는 282년 로마가 승리할 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는 동부에서 삼니움인과 싸웠다. 로마는 또한 이 기간 동안 북쪽에서 에트루리아인과 갈리아인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 후 로마는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인에게 주의를 돌렸고 그리스 왕 피로스와 전쟁을 벌였다. 피로스는 각각 280년과 279년에 로마인과의 두 번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그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냈기 때문에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여 "피로스의 승리"라는 용어가 생겼다.
7. 카르타고와의 첫 번째 전쟁
이탈리아에 대한 확고한 통제로 로마는 지중해의 주요 강국 중 하나가 되었다. 로마인들은 바다 건너편에 위치한 또 다른 세력인 카르타고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튀니스 근처의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카르타고는 지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해양 제국의 수도였으며 서부 지중해의 상업을 지배했다. 로마는 BC 264년에서 146년 사이에 포에니 전쟁으로 알려진 카르타고와 세 번의 갈등을 겪었다. 첫 번째 갈등은 카르타고가 이탈리아 남단에서 약간 떨어진 시칠리아 섬에서 분쟁에 개입한 후 발생했다. 당시 시칠리아는 로마 영토가 아니었지만 로마인들은 이것이 영토와 너무 가깝다고 느꼈다. 그들은 카르타고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 결과 20년 이상 지속된 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다. 이 지도는 전쟁 후 상황을 보여준다. 로마는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섬을 장악하여 처음으로 주목할만한 해군을 보유한 세력이 되었다.
8. 한니발, 코끼리로 로마 공격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군사 정신 중 하나는 한니발이었다.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태어난 카르타고인인 그는 로마에 대해 평생 원한을 품었다. BC 218년에 그는 카르타고가 지배하는 스페인에서 알프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 북부까지 유명한 수십 마리의 코끼리를 포함한 군대를 이끌었으며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2차 전쟁을 시작했다. 한니발은 이탈리아인들이 로마인의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도착이 이탈리아에 대한 로마의 통제를 무너뜨리는 광범위한 반란을 유발하기를 바랐다. 한니발은 216년 칸나에에서 로마 군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을 포함하여 전장에서 끊임없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칸나에 이후 몇몇 이탈리아 도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의 패배를 가져올 만큼 충분한 이탈리아 동맹을 가져오지 못했다. 로마인들은 한니발이 파괴한 군대를 대신할 새로운 군대를 모집할 수 있었으며 한니발의 군대는 로마를 점령할 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한니발은 로마인들과 결론을 내지 못하는 소규모 접전으로 15년을 보냈다. 마지막으로 한니발은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반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국으로 소환되었다. 그는 202년 자마 전투에서 패했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해외 재산을 몰수하고 카르타고의 해군을 해체하는 가혹한 조건을 가했다. 그 후 149년에 편집증적인 로마인들은 무력한 카르타고인에 대한 3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켜 문명을 완전히 파괴했다.
로마의 군대
9. 로마의 강력한 마니풀루스 대형
공화국 초기에 로마 보병은 그리스 팔랑크스의 형태를 사용했다. 이 대형에서 병사들은 십여 명의 병사보다 깊을 수 있는 빽빽한 대형으로 어깨를 나란히 서 있었다. 전방에 있는 병사들은 커다란 방패 벽으로 보호받고 있었고 적을 찌르기 위해 긴 창으로 방패 주위에 손을 뻗으려고 했다. 이 대형은 평지에서 잘 운용되었지만 로마인들은 전투가 많이 있었던 언덕이 많은 지형에서는 너무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열에 격차가 생기면 극도로 취약해졌다. 이 약점을 해결하기 위해 로마인은 그림에 설명된 마니풀루스 대형을 개발했으며, 때로는 "관절이 있는 팔랑크스"이라고도 한다. 한 줄의 병사 대신 로마군은 보병을 약 120명의 병력으로 나누고 각각 독립적으로 기동 할 수 있으며 체커보드 패턴으로 배치했다. 마니풀루스 뒤의 앞 라인은 최전선에서 열리는 틈새로 들어갈 수 있다. 로마인들은 경험이 적은 병사들(Hastati)을 최전선에 배치하여 적이 그들과 싸우는 동안 에너지를 소모하기를 바랐으며 그들이 더 경험이 많은 (그리고 더 나은 무장을 한) 병사에게 도달했을 때 싸움을 하기에는 너무 지치도록 유도했다.
10. 로마 군대의 변화하는 문화
BC 200년에서 AD 14년 사이 로마는 서유럽, 그리스, 발칸 반도,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한 가지 결과는 로마 군대의 중대한 변화였다. 이전에 군복무는 재산을 보유한 로마인으로 제한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몇 시즌 동안 복무한 후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BC 107년 증가하는 병력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로마 사령관 마리우스는 토지 없는 농민들에게 군대를 개방하고 병역 기간을 연장했다. 다음 세기에 걸쳐 로마 군대는 풀타임의 전문 전투력으로 변모했다. 마리우스는 또한 로마인의 전투 진형을 재구성하여 코호트(cohort)라고 하는 10개의 더 큰 대형이 엇갈리는 마니풀루스로 바뀌었다. 이 대형에서 효과적으로 싸우려면 더 많은 기술이 필요했지만 전문화된 로마 군단은 필요한 기동을 배울 시간이 있었다.
11.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군단을 길들인 방법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로마 장군은 병사들을 깃발로 끌어들이기 위해 해외에서 점령한 전리품이나 귀환시 그들에게 수여된 땅에 대한 보상을 약속해야 했다. 지휘관이 이러한 약속을 지키는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로마 국가에 대한 추상적인 충성보다는 이 장군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을 점점 더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공화정 말기(BC 107-27)에 승리 한 사령관이 군대를 로마로 진군하고 군대가 약속된 땅을 받을 수 있도록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점점 일반화되었다. 이것은 반복되는 내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로마는 적당히 민주적인 공화국에서 독재 제국으로 변모했다. 이 지도는 로마의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AD 14년에 사망했을 때 로마 군단의 배치를 보여준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국경을 따라 로마 군대를 배분하여 어느 한 장군도 한 번에 로마 군대의 일부 이상을 지휘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리고 황제는 제국 국고에서 봉급을 지급함으로써 군인들의 지휘관에 대한 의존도를 줄였다.
12. 로마 군함
로마는 처음에는 주요 해군 세력이 아니었지만 로마인이 카르타고 인과 충돌했을 때 따라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즉시 3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진 삼단노선(trireme) 20척과 5개의 노가 있는 무거운 선박인 오단노선(quinquereme) 100척을 만들었다. 201년 카르타고인에 대한 승리를 시작으로 로마는 패배한 적들이 해군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로마는 지중해에 대한 확실한 지배력을 갖게 되었다. 제국 시대의 첫 2세기 동안(BC 27년부터 시작) 로마는 지중해를 완전히 장악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주요 해전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공화국이 제국이 되다
13.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BC 5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북부 국경을 장악하고 대략 오늘날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국에서 명성을 높이기 위해 외국 정복을 주도한 야심 찬 다른 로마 정치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었다. 이 지도는 거의 10년이 걸렸고 그를 오늘날 프랑스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데려온 카이사르의 공적을 보여준다. 카이사르는 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이 정복 활동에 대한 설명을 썼다. 그가 정복을 하는 동안 카이사르의 적들은 로마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카이사르가 그의 군대 없이 민간 시민으로 로마로 돌아왔다면 그는 출발하기 전에 혐의로 의심되는 행위에 대한 재판에 직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법은 장군이 군대의 수장으로 이탈리아에 입국하는 것을 금지했다. BC 49년 카이사르는 군대와 함께 이탈리아의 북쪽 국경으로 표시된 루비콘 강을 건너는 운명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로마 공화국을 파괴할 내전을 촉발시켰다.
14. 카이사르가 내전에서 승리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반대하는 세력은 한때 동부에서 군사적 승리를 누렸던 카이사르의 전 정치적 동맹인 폼페이우스가 이끌었다. 이 지도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폼페이우스의 아군을 상대로 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폼페이우스는 처음에는 동쪽으로 도망쳤다. 카이사르는 그를 뛰쫓기 전에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통제권을 강화했다. 결정적인 전투는 BC 48년 8월 10일, 카이사르가 현대 그리스 북부의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물리쳤을 때였다. 폼페이는 이집트로 도망쳤지만 그곳 관리들은 그를 배신하고 카이사르에게 그의 머리로 보냈다. 이 시점에서 카이사르의 로마 통치는 기정 사실이었지만 폼페이우스군의 저항을 걷어내는데 3년이 더 걸렸다. 그는 BC 45년에 마지막으로 로마로 돌아왔다.
15.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처음으로 수도에 행진하여 무력으로 장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구 공화국의 법을 지키고 있는 척조차 하지 않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하고 왕위에 연관되었다. 이것은 로마 문화의 깊은 금기 사항에 어긋난 것이었다. 로마의 건국 전설은 로마 시민들이 일어서서 전 제왕을 쫓아낸 것이었다. 그래서 BC 44년 3월 15일 아마도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살인 사건에서 불만을 품은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둘러싸고 그를 찔러 죽였다. 암살자 중 한 명인 브루투스는 아마도 끔찍한 일이지만 치명적 일격을 가하면서 “sic semper tyrannis(항상 폭군에게)”를 외쳤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공모자들은 스스로를 로마의 공화국 정부 체제의 수호자로 여겼지만 실제로는 공화국을 되찾을 계획이 없었다. 대신 카이사르의 죽음은 로마 세계를 또 다른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16. 악티움 해전으로 아우구스투스 로마 최초의 황제가 되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은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가장 강력한 주장을 한 두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하나는 카이사르의 오랜 부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다. 다른 하나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사후 입양한 카이사르의 조카의 아들인 10대의 옥타비아누스였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나란히 싸웠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동쪽으로 가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낭만적으로 연루된 후 그와 옥타비아누스는 사이가 틀어져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지도는 BC 31년 전쟁의 결정적 전투인 악티움 해전을 보여준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바다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진군하는 군대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부장인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해군에 의해 요격당했다. 옥타비아누스의 군함이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탈출했지만 옥타비아누스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힘이 더 이상 없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1년 후 사망하여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에 그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로 변경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이 된 해로 간주한다.
출처 : V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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