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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그외 이야기/도시

런던 - 조지 및 빅토리아 시대

by 금곡동로사 2024.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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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스 강에서 본 '시티오브런던'과 세인트 폴 대성당, 카날레토의 그림(1748)

1700년에 런던의 인구는 60만 명에 달했다. 세기말까지 도시의 인구는 두 배로 증가하게 된다. 런던은 이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주민 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도시는 사방으로 확장되었다. 서쪽의 고급 주택으로 이루어진 새 부지에 사는 부유층, 동쪽과 템스 강을 따라 뻗어나가는 산업, 특히 부두에 가까이 사는 상인들과 노동자들. 1750년에 완공된 새로운 웨스트민스터 다리는 중세에 런던 브리지가 재건된 이후 두 번째로 완공된 강 다리로 템스 강 남쪽의 도시 개발을 촉발시켰다. 한때 런던 외곽 너머에 있던 패딩턴"Paddington"과 세인트 메릴번"St Marylebone"과 같은 마을들은 점차 도시로 흡수되었다.

1806년에 처음 출판된 파노라마 삽화의 '시티오브런던'과 연안


조지 런던

18세기 런던의 커피 하우스. 플리트 스트리트에서 인쇄된 런던의 첫 신문들. 사람들은 도시의 새로운 커피 하우스에 모여 신문을 읽고 아이디어를 논의했다.

 

18세기에는 도시 상인, 선주, 은행가 등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번창했다. 대부분은 이제 살기에 매우 불쾌한 곳인 '시티오브런던'을 떠나기로 선택했다. 가정용 연료가 나무에서 석탄으로 바뀌면서 발생하는 연기 덩어리가 그 위에 자주 드리워졌다. 런던 사람들은 이질, 천연두 및 기타 질병과 같이 끊임없는 전염병의 위협 속에서 살았다. 거리는 범죄, 폭력 및 알코올 중독의 온상이 되었다. 부유층은 웨스트엔드의 메이페어"Mayfair"와 같은 새로운 부지의 우아한 광장 주변에 지어진 큰 집을 구입했다. 중산층 또한 도심과 이스트엔드를 떠나 블랙히스"Blackheath", 브릭스턴"Brixton", 덜위치"Dulwich", 퍼트니"Putney"와 같은 강의 남쪽에 있는 새로운 공동체로 향했다.

한편 가난한 사람들은 시골에서 온 이주자들로 인해 그들의 수가 점점 더 불어나 공동 주택으로 몰려들었다. 이곳은 부유층이 떠나면서 남겨진 건물들로, 여러 가구로 나뉘었다. 이 건물들은 세인트 자일스"St Giles", 클러큰웰"Clerkenwell", 스피탈필즈"Spitalfields", 화이트채플"Whitechapel", 서더크"Southwark"와 같이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는 지역에 모여있었다.

1815년 웨스트민스터 전경의 일부, 런던의 부유층이 거주하는 우아한 주택을 보여준다

 

이민

찰스 디킨스가 1823-24년에 소년 시절 일했던 채링 크로스"Charing Cross"의 헝거퍼드 스테어에 있는 워렌의 흑색 도료 공장

 

19세기에 런던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런던의 많은 작업장, 공장, 부두에서 일하기 위해 시골에서 이주했다.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항구가 있는 무역과 금융의 주요 중심지였다. 대영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다. 1825년경 런던은 16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1848년 이후, 고국의 기근을 피해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대거 런던에 도착했다. 노동자로 일하고 도시 가장자리 주변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 집중된 아일랜드인은 곧 런던 인구의 20%를 차지했다. 1880년대에는 동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유입된 유대인 인구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1901년까지 런던 인구는 650만 명으로 급증했다.


빅토리아 런던

1880년 캠벌웰"Camberwell"의 그로브 레인"Grove Lane". 19세기 중반까지 캠벌웰은 시골의 평온함과 런던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광천수의 효능으로 유명했다. 1860년대에 철도가 도래하고 런던의 중산층이 그곳에 지어지고 있는 새로운 넓은 주택으로 이사하면서 캠벌웰은 변모했다. 1889년 캠벌웰은 새로 창설된 런던 카운티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 인식하는 런던의 많은 부분은 빅토리아 시대에 생겨났다. 이 시기에 테라스(주택이 이어진 긴 거리)가 런던 전역에 건설되었다. 부유한 중산층이 도심에서 홀로웨이"Holloway"나 캠벌웰과 같이 더 깨끗하고 안전한 교외로 이주함에 따라 그들을 위해 지어진 더 큰 테라스 주택은 덜 부유한 가족이 거주할 수 있도록 세분화되었다. 런던은 거주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부유한 정도를 특징으로 하는 뚜렷한 사회적 영역의 패치워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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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잭 더 리퍼의 희생자 중 한 명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는 1888년 런던 이스트엔드의 빈곤 지역인 화이트채플에서 활동했던 신원 미상의 연쇄 살인범이었다.

 

런던의 많은 가난한 지역에서는 인구 과밀이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가난하고 더럽고 황폐한 빈민가에 살았던 이스트엔드와 같은 지역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범죄는 흔했고 질병은 빠르게 퍼졌다. 공기에 노출된 모든 것이 먼지로 뒤덮일 정도로 오염이 심했다. 건물, 사람들의 피부와 옷, 심지어 풀과 꽃도 그을음으로 검게 변했다.

19세기 초 런던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가 중 하나인 세븐 다이얼스"Seven Dials"의 더들리 스트리트를 묘사한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1872). 시인 존 키츠는 그곳을 "약간의 따뜻함을 위해 비참함이 비참함에 달라붙고, 궁핍과 질병이 나란히 누워 함께 신음하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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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악취"The Great Stink"

1855년 펀치에 실린 풍자만화로,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가 타임스 신문에 쓴 "템스 강의 오물에 관한 관찰"이라는 문구에 대해 논평했다.

 

1858년, 유난히 더웠던 여름에 템스 강둑을 따라 있던 처리되지 않은 하수가 태양빛으로 뜨거워지면서 런던에 "대악취"가 발생했다. 냄새가 너무 심해져서 시 공무원들은 즉시 런던의 하수도 시스템을 설계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7년 후에 개장했을 때, 런던은 훨씬 더 깨끗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물을 통해 퍼지는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도 크게 감소했다. 런던의 하수도 건설을 담당한 토목 기사인 조셉 바잘제트는 그 업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1845년 플리트 스트리트의 하수구를 깊게 하는 공사. 런던의 하수구 대부분은 1859년 이후 토목 기사 조셉 바잘제트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폐기물을 런던 중심부 하류의 템스 하구로 보내는 광범위한 지하 하수도 시스템을 설계했다. 6개의 주요 차단 하수관이 건설되었고, 일부는 플리트를 포함하여 런던의 "사라진" 강들을 통합했다. 차단 하수관은 메인 하수관의 내용물과, 차례로 더 작은 지역 하수관의 내용물을 운반하면서 총길이가 약 21,000km에 달했다. 포틀랜드 시멘트가 터널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150년 이상 지난 오늘날에도 양호한 상태이다.

 

 

제국의 심장

만국 박람회에서 인도 전시의 일부. 영국의 산업적 성과를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만국 박람회가 1851년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개관한 하이드 파크의 크리스털 팰리스로 알려진 유리 홀에서 열렸다. 13,000개 이상의 전시업체가 다양한 산업제품을 전시했다.

 

영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일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은 "제국의 심장"이자 세계 금융 수도였다. 웨스트민스터의 정부 건물과 도시의 금융 기관, 중심부의 다른 곳에 많은 사무실과 백화점이 생겨났다. 세인트 팽크러스(1868)와 같은 웅장한 철도 종착역이 세워졌다. 1850년대 빅토리아 여왕의 배우자인 앨버트 공이 주도한 프로젝트 "알베르토폴리스"를 통해 19세기 후반 사우스켄싱턴"South Kensington"에 (자연사, 과학, 빅토리아 및 앨버트 박물관을 포함한) 여러 박물관, 앨버트 홀과 임페리얼 칼리지 등이 들어섰다.

1851년 런던의 지도, 19세기 초 도시(빨간색 표시) 너머로 런던이 확장되어 주변 마을을 삼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운송

1872년 귀스타브 도레가 제작한 런던 브리지의 인쇄물, 교통체증이 심한 다리를 보여준다

인구 증가에 따라 런던의 지리적 영역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수도를 돌아다니기 위해 새로운 형태의 교통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옴니버스("모든 사람들을 위한"이라는 의미, 줄여서 "버스")라고 불리는 말이 끄는 마차가 1829년에 처음 등장했다.

1861년 킹스크로스 근처에 세계 최초의 지하철인 메트로폴리탄 철도가 건설되었다. 그림은 부분적으로 완성된 개착식 터널을 보여준다. 철도는 2년 후인 1863년에 개통되었다.

 

1860년에 런던 중심부를 막히게 하는 버스와 해크니 마차 등 지상 교통을 완화하고 런던의 주요 거리 아래를 달리도록 설계된 지하철(세계 최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메트로폴리탄 철도로 명명된 지하철의 첫 노선은 1863년에 개통되었으며, 열차는 패딩턴과 패링던"Farringdon" 사이를 운행했다. 세기말까지 두 개의 심층 "튜브" 노선이 지하 네트워크에 추가되어, 현재 연재 2억 명 이상의 승객을 수송하고 있다. 시티와 웨스트엔드 외곽의 마차(Horse Tram)가 1870년대 교외 거리에 처음 등장했다. 트램은 1900년대 초에 전기화되었다.

새로 지어진 유스턴"Euston" 기차 종착역의 1837년 인쇄물. 막 출발하려는 열차의 지붕이 없는 객차에 승객들이 앉아 있다

유스턴(1837), 패딩턴(1838), 킹스크로스(1852)를 포함한 런던의 주요 철도 종착역은 런던과 나머지 지역을 철도로 연결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새로운 선로, 고가교 및 역의 건설은 대규모 철거와 도시 경관의 중대한 변화를 수반했다.

 

1890년의 플리트 스트리트. 플리트 스트리트는 (웨스트민스터 시와의 경계에 있는) 템플 바"Temple Bar"에서 '시티오브런던'의 러드게이트 서커스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다. 러드게이트 서커스는 한때 런던에 흘렀던 템스 강의 지류인 플리트 강(현재 런던 하수도의 일부)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이름을 따서 거리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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