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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그외 이야기/도시

런던 - 1900년 이후

by 금곡동로사 2024.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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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7일 폭격이 시작될 무렵 독일 루프트바페(공군) 하인켈 He 111 폭격기가 런던 이스트엔드의 와핑"Wapping"과 서리"Surrey" 부두 상공을 비행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650만 명, 즉 영국 전체 인구의 1/5이 런던에 살았다. 1900년대 초, 도시 계획가들은 빈민가를 정리하고 좁은 거리를 킹스웨이와 알드위치와 같은 넓은 도로로 대체하면서, 도심의 일부 지역(시티와 웨스트민스터에 가까운 주거 지역)을 변모시키기 시작했다. 트라팔가 광장에서 버킹엄 궁전으로 이어지는 더 맬"The Mall"은 웅장한 왕실 퍼레이드를 위한 의례적인 경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스트엔드 대부분은 개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런던의 가난한 사람 중 다수는 자신이 일하는 공장과 부두 근처에 있는 습하고, 낡고, 전기와 수돗물이 부족한 과밀 주택에서 살아야 했다.

1914년 채링크로스와 임뱅크먼트의 지상 및 지하철역


교외 주택지"Suburbia"

최근 개통된 채링크로스, 유스턴 및 햄스테드 철도의 북쪽 끝인 골더스 그린에 사는 이점을 광고하는 1908년 포스터

 

제1차 세계대전(1914-18) 동안, 런던의 부두와 이스트엔드는 독일 체펠린(비행선)과 나중에 항공기의 폭격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는 1918-1939년 사이에 3백만 채의 새로운 집을 지으면서 런던의 주택 부족을 해결하려 했다. 지하철(튜브) 네트워크가 전기화된 철도와 트램 및 버스의 새로운 경로와 함께 확장되면서, 런던의 성장하는 중산층에게 더 나은 품질의 저렴한 주택과 가족을 부양하기에 더 적합한 주변 환경을 제공하는 교외 지역들이 팽창했다. 때때로 서버비어"Suburbia"라고 불리는 교외의 더 깔끔한 지역들은 런던(메트로랜드)의 북쪽과 북서쪽, 그리고 남쪽 변두리 주변에서 성장했다. 주변 카운티의 도시와 마을이 런던의 도시 지역으로 흡수되었다. 런던 도심의 제조업 또한 중심부에서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따라 늘어선 파크 로열"Park Royal"과 같은 산업 단지로 이전했다.

교외 지역을 포함한 런던 도시 지역 전체는 1921년의 750만 명에서 1939년의 860만 명으로 증가한 반면, 도심 인구는 45만 명 가까이 감소했다.

런던 북서부 교외 지역인 "메트로랜드"의 피너"Pinner"에 있는 깔끔한 반단독 주택들은 전간기(1919-39)에 메트로폴리탄 선을 중심으로 개발되었다.

 

 

영국 대공습"The Blitz"

대공습(1940-41) 때 투하된 폭탄에 의해 무너진 집들

제2차 세계대전(1939-45) 동안 런던은 공중 폭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특히 블리츠(독일어로 "전격전電撃戰")라고 알려진 1940년 9월부터 1941년 5월까지 9개월간 독일 항공기에 의한 공습 기간 동안 더욱 심했다. 폭격으로 런던의 건물 수만 채가 파괴되었다. 처음에 독일 항공기가 군수품 공장과 부두를 목표로 삼았지만 나중에 주택가도 폭격했다. 이스트엔드와 웨스트민스터의 일부 지역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도시 동쪽의 템스 강을 따라 위치한 부두 지역은 특히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런던에 대한 공습은 1944년 6월 V-1 비행폭탄과 V-2 로켓으로 재개되었고 전쟁이 거의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40년 5월 18일 런던역에서 아이들이 대피하고 있다

1939년 9월 70만 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런던을 떠나 다른 지역의 더 안전한 장소로 보내져, 그곳에서 가족친지들과 피난민으로 함께 생활했다(많은 사람들이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런던으로 돌아왔지만). 많은 런던 시민이 지하철역에서 공습을 피했다. 이 폭격으로 런던에서 약 3만 명이 사망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다.

1940년 공습대피소로 사용되고 있는 알드위치 지하철역


전후 런던

1950년대 런던 남동부 루이셤"Lewisham"에 지어진 타워 블록

전쟁의 참화는 런던을, 특히 이스트엔드에서 빅토리아 시대 도시의 쇠락해 가는 잔재물인 빈민가를 없애려는 정부의 계획이 가속화되었다. 여기에는 밀집된 테라스식 주택들을 대체할 다층 아파트 블록들을 건설하는 것이 포함되었지만, 이 정책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빈곤과 범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1950년대에 카리브해와 남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이 대거 런던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정 지역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로 인해 20세기말에는 브릭스턴"Brixton"의 자메이카인, 사우설"Southall"의 펀자브인, 타워햄리츠"Tower Hamlets"의 방글라데시인과 같은 뚜렷한 공동체가 생겨났다.

런던 이스트엔드의 브릭레인"Brick Lane"

일부 이민자 공동체는 이전의 공동체를 대체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시티의 바로 동쪽에 있는 브릭레인 지역은 대부분 방글라데시인이 되어 이전의 유대인 공동체를 대체했다. 유대인들은 런던 교외로 이주하여 많은 사람이 다른 영국인들과 섞였다. 브릭레인에서는 일부(전부가 아닌) 유대인 빵집이 커리 하우스로 바뀌었고, 보석상점은 잡화점이 되었으며, 유대교 회당은 드레스 팩토리(의류점)나 모스크로 바뀌었다. 오늘날 브릭레인은 많은 전시회를 개최하는 인기 있는 명소이자 예술과 패션의 중심지이다.

 

 

빅 스모크

1952년의 대스모그를 통과하고 있는 런던 2층 버스와 운전자를 안내하기 위해 조명탄을 들고 있는 검사관

18세기 이래로 런던 사람들은 집을 난방하기 위해 석탄을 사용해 왔고, 그것을 태운 연기는 도시에 거대한 스모그(연기와 안개의 조합) 구름을 만들었다. 런던은 이러한 "농무"로 유명해졌고, 이로 인해 도시는 "빅 스모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때로는 스모그가 너무 짙어서 사람들이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가로등이 하루 종일 켜져 있어야 했다. 4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1952년 12월의 극심한 스모그 이후, 1956년 무연 연료 사용을 의무화한 청정 공기법이 통과되면서 런던은 더욱 안전하고 건강한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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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벨트

2015년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를 찍은 위성사진. 건물이 있는 지역은 옅은 파란색으로 표시된다. 가장 큰 도시 지역인 런던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도시 사이에 있는 지역이 그린벨트이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중심부에서 이사 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교외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철도나 지하철을 이용한 통근은 런던 중심부에서 사무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통제되지 않은 도시의 확장이 주변 시골의 도시 및 마을을 집어삼키기 시작할 위험이 있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계획가들은 런던을 둘러싸고 있는 건설할 수 없는 넓은 공터인 그린벨트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교외로, 또는 그린벨트 안이나 그 너머에 있는 도시와 마을로 계속 이주하면서 런던의 인구는 전쟁 전 총 870만 명에서 1990년까지 670만 명으로 감소했다.

 


고급 주택화

런던 북부 이즐링턴"Islington"의 반즈버리 스트리트. 1800년대 초, 이즐링턴의 큰 주택과 세련된 광장으로 인해 전문직 종사자들이 이 지역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부터 런던 도심에서 쫓겨난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이즐링턴에 정착했다. 중산층이 떠났고 지역은 오랜 쇠퇴에 빠졌다. 1960년대에 조지 시대 테라스가 중산층에게 재발견되면서 이 지역이 새롭게 유행하게 되었다.

 

한편, 조지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훌륭했지만 지금은 낡은 집들이 있는 이즐링턴이나 노팅힐 같은 특정 오래된 지역이 다시 런던의 전문직 종사자 계층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자 계층 주민들이 이사를 가고,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비교적 부유한 신규 전입자들이 이주해 오고, 그들을 위한 지역 상점과 식당이 들어서면서 동네 전체가 "고상해" 졌다.

 

 

도클랜즈

런던 도클랜즈의 항공사진. 템스 강 굽이 안쪽의 역 L자 수역은 1868년에 개장했다가 1981년에 폐쇄된 옛 밀월 부두이다. (상단에 같은 지역 상공을 비행하는 1940년도 독일 폭격기 사진이 있다)

 

컨테이너선이 해상 운송에 활용되면서 1960년대부터 19세기 범선과 증기선에만 적합했던 런던의 부두가 폐쇄되기 시작했다. 대신 템스 하구에 더 가까운 틸버리"Tilbury"에 새로운 부두가 문을 열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런던의 마지막 부두가 폐쇄되었고, 도클랜즈 지역은 제2의 금융 중심지인 커네리워프"Canary Wharf"로 개발되었다.


모던 런던

런던 서부 노팅힐의 거리 풍경

런던 도시 지역의 대부분을 포함하는 그레이터런던은 1965년에 창설되었다. 이는 32개 광역 자치구와 '시티오브런던'으로 나뉘었으며 오늘날 런던시장이 런던의회와 함께 관리한다. 그레이터런던의 인구는 다시 약 900만 명으로 늘어나 모스크바와 파리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시티오브런던'의 스카이라인. 사진 중앙의 독특한 곡선 테이퍼 고층건물이 거킨"Gherkin"(오이피클)이다. 왼쪽의 사진에서 가장 높은 고층건물인 122 리든홀 스트리트는 쐐기 모양 때문에 치즈그레이터(치즈 강판)로도 알려져 있다. 맨 왼쪽의 곡선과 함께 윗부분이 무거운 모양의 마천루는 20 펜처치 스트리트 또는 워키토키이다.

 

오늘날 런던은 세계를 선도하는 금융 중심지 중 하나이자, 박물관, 극장, 건축물, 대학교로 유명한 주요 문화 중심지이다. 매년 6천5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런던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적인 도시 중 하나로, 영국 밖에서 태어난 약 3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해외에서 태어난 부모를 두고 있다. 도시의 주민들은 30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다.

런던에는 5개의 공항(히스로, 개트윅, 스탠스테드, 루턴, 런던 사우스엔드)과 18개의 기차역,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지하철 시스템이 있으며 M25 고속도로로 둘러싸여 있다. 2000년대에는 "거킨"으로 알려진 수상 경력의 30 세인트 메리 액스를 포함하여 새로운 초고층 건물이 커네리워프와 시티오브런던 금융 지구에 지어졌다. 런던의 가장 높은 건물인 더 샤드는 2012년에 완공되었다. 높이는 309.6미터(1016피트)이다.

 

썰물 때의 템스 방벽

런던은 조수 간만 차가 있는 템스 강 위에 건설되었다. 잉글랜드 남동부가 천천히 가라앉고 만조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홍수 위험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커지고 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82년에 템스 방벽이 건설되었다. 필요할 때 밀물을 막기 위해 수심 아래에서 수문을 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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