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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헬레니즘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 상

by 금곡동로사 2021.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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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모자이크(BC 100년경), 이탈리아 폼페이에 있는 바닥 모자이크, 알렉산더가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세와 싸우는 모습.

 

일반적으로 알렉산더 대왕(그리스어 : 메가스)으로 알려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BC 356년 7월 20/21일-BC 323년 6월 10/11일)는 고대 그리스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바실레우스)이자 아르게아다이 왕조의 일원이었다. 그는 BC 356년 펠라에서 태어나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를 계승하여 20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대부분의 통치 기간을 서아시아와 동북 아프리카 사이에서 전례 없는 군사 활동으로 보냈으며, 30세에 그리스에서 인도 북서부까지 뻗어있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 중 하나를 만들었다. 그는 전투에서 무적이었으며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16세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도를 받았다. BC 336년 필리포스가 암살된 후, 그는 아버지를 계승하여 강력한 왕국과 경험 많은 군대를 물려받았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지휘권을 수여받았으며 이 권한을 사용하여 페르시아 정복에서 그리스인을 이끌 필리포스의 범 그리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BC 334년 그는 아케메네스 제국(페르시아 제국)을 침공하고 10년 동안 지속되는 일련의 정복 활동을 시작했다. 아나톨리아 정복 이후 알렉산더는 결정적인 전투, 특히 이수스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힘을 깨뜨렸다. 그는 이후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3세를 전복시키고 아케메네스 제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그 시점에서 그의 제국은 아드리아 해에서 베아스 강까지 확장되었다.

 

알렉산더는 "세계의 끝과 대외(大外) 해(海)"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고 BC 326년에 인도를 침공하여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파우라바스에 대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결국 향수병에 걸린 군대의 요구로 돌아섰고 BC 323년 아라비아 침공으로 시작될 계획된 캠페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자신의 수도로 세울 예정이었던 바빌론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몇 년 동안 계속된 내전으로 제국이 갈라졌으며 그 결과 알렉산더의 살아남은 장군이자 상속인인 디아도코이가 통치하는 여러 나라가 세워졌다.

 

알렉산더의 유산은 그리스 불교와 같은 그의 정복이 낳은 문화적 확산과 혼합주의를 포함했다. 그는 그의 이름을 딴 약 20개의 도시, 특히 이집트에서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다. 알렉산더가 그리스 식민지 주민들을 정착시키고 그에 따른 그리스 문화가 동쪽으로 확산됨에 따라 새로운 헬레니즘 문명이 생겨났으며, 그 측면은 서기 15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의 전통과 1920년대 그리스 대량 학살과 인구 교류 때까지 중부 및 극동 아나톨리아 지역에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존재로 분명했다. 알렉산더는 아킬레스 시대의 고전적 영웅처럼 전설이 되었으며 그리스와 비 그리스 문화의 역사와 신화적 전통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그는 전투에서 무적이었고 군 지휘관들이 자신들을 비교하는 척도가 되었다. 전 세계의 군사 아카데미에서 여전히 그의 전술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종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생애 초반

 

혈통과 어린 시절

 

알렉산더는 BC 356년 7월 20일에 해당하는 고대 그리스의 헤카톰바이온 달의 6일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수도 펠라에서 태어났지만 정확한 날짜는 확실하지 않다.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와 에피로스의 왕 네오프톨레모스 1세의 딸이자 필리포스의 네 번째 아내인 올림피아스의 아들이다. 필리포스에게는 7~8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올림피아스는 알렉산더를 낳았기 때문에 한동안 그의 주된 아내였다.

 

알렉산더의 탄생과 어린 시절을 둘러싼 여러 전설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전기 작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필리포스와의 결혼식이 끝나기 전날 밤 올림피아스는 그녀의 자궁이 벼락에 맞아 죽어 가기 전에 불꽃이 "멀고 넓게" 퍼지는 것을 꿈꿨다.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포스는 꿈에서 사자상이 새겨진 인장으로 아내의 자궁을 보호하는 모습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러한 꿈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제공했다. 올림피아스는 결혼 전에 임신한 것을 그녀의 자궁의 봉인으로 표시되었거나 알렉산더의 아버지가 제우스였다는 것이다. 고대 평론가들은 야심 찬 올림피아스가 알렉산더의 신성한 혈통에 대한 이야기를 선포했는지, 알렉산더에게 말했거나 아니면 그 제안을 불경스럽다고 일축했는지에 대해 다양한 주장으로 나뉘었다.

 

알렉산더가 태어난 날 필리포스는 칼키디케 반도의 포티다이아 시를 포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같은 날 필리포스는 그의 장군 파르메니온이 일리리아인과 파이오니아인의 연합군을 격파했으며 그의 말이 올림픽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이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마그네시아의 헤게시아스는 아르테미스가 알렉산더의 탄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불에 탔다고 말했다. 그러한 전설은 알렉산더가 왕이 되었을 때 그리고 아마도 그의 선동으로 그가 초인적이며 탄생부터 위대한 업적을 이룰 운명임을 보여주기 위해 나타냈을 것이다.

 

유아기에 알렉산더는 그의 장래의 장군 검은 클레이토스의 누이인 유모 라니케에 의해 자랐다. 어린 시절 후반에 알렉산더는 어머니의 친척인 엄격한 레오니다스와 아카르나니아의 리시마코스에게 지도를 받았다. 알렉산더는 고귀한 마케도니아 청소년의 방식으로 자랐으며, 읽기, 리라 연주, 타기, 싸움 및 사냥을 배웠다.

 

알렉산더가 열 살이었을 때 테살리아의 상인이 필리포스에게 말을 가져와 13 달란트에 ​​팔겠다고 제안했다.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을 거부했고 필리포스는 말을 치워버렸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자신의 그림자에 대한 말의 두려움을 감지하고 말을 길들여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성공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용기와 야망의 과시에 기뻐했던 필리포스가 아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입을 맞추며 "내 아들아, 야망을 감당할 만큼 큰 왕국을 세워야 한다. 마케도니아는 너에게 너무 작다."라고 말하고 그를 위해 말을 샀다고 했다. 알렉산더는 "황소 머리"를 의미하는 부케팔라스라고 이름 지었다. 부케팔라스알렉산더를 머나먼 인도까지 데려갔다. 말이 죽었을 때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30년은 노년기이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말의 이름을 따서 부케팔라(Bucephala)라는 도시를 명명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어린 알렉산더의 흉상 / 테살로니키의 알렉산더 대왕 동상 /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교육

 

알렉산더가 13살이 되었을 때 필리포스는 가정교사를 찾기 시작했고 이소크라테스스페우시포스와 같은 학자를 고려했는데 스페우시포스에게는 아카데미의 원장 직분에서 사임하여 직책을 맡을 것을 제안했다. 결국 필리포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선택하고 미에자에 있는 님프 사원을 교실로 제공했다. 알렉산더를 가르치는 대가로 필리포스는 필리포스가 파괴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 스타게이라를 재건하고 노예였던 시민들을 사서 해방하거나 망명 중인 사람들을 용서하여 다시 사람들이 살도록 동의했다.

 

미에자는 알렉산더와 프톨레마이오스, 헤파이스티온, 카산드로스와 같은 마케도니아 귀족의 아이들을 위한 기숙학교와 같았다. 이 학생들 중 상당수는 그의 친구이자 장군이 될 것이며 종종 '벗'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와 그의 동료들에게 의학, 철학, 도덕, 종교, 논리 및 예술에 대해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도하에 알렉산더는 호머, 특히 일리아드의 작품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주석이 달린 사본을 주었고 알렉산더는 나중에 정복 활동 중에도 계속했다.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페르시아의 망명자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에 반대하면서 몇 년 동안 필리포스 2세의 보호를 받았다. 그들 중에는 BC 352년부터 342년까지 마케도니아 궁정에서 지냈으며, Amminapes, 알렉산더의 미래 사트라프 또는 Sisines라는 페르시아의 귀족인 아르타바조스 2세와 알렉산더의 미래 안주인이 되는 그의 딸 바르시네가 있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 궁정에 페르시아 문제에 대한 좋은 지식을 줬고 심지어 마케도니아 국가 관리의 일부 혁신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수더(Suda : 10세기 비잔틴 백과사전)는 또한 Anaximenes of Lampsacus가 그의 교사 중 한 명이라고 썼다. Anaximenes도 그의 정복 활동에 동행했다.

 

 

필리포스의 후계자

 

마케도니아의 섭정과 상승

 

필리포스 2세 / 알렉산더 조각상

 

16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교육이 끝났다. 필리포스는 비잔티움에 맞서 전쟁을 벌였고 알렉산더를 섭정이자 상속인으로 세웠다. 필리포스가 없는 동안 트라키아의 마이도이족은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영토에서 그들을 몰아냈다. 그는 그리스인과 함께 그곳을 식민지로 만들고 알렉산드로폴리스라는 도시를 세웠다.

 

필리포스는 돌아온 뒤 트라키아 남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작은 병력과 함께 알렉산더를 파견했다. 그리스 도시 페린투스에 맞서 군사 행동을 벌이던 중 알렉산더는 아버지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암피사 시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 문제에 더 개입할 기회를 준 신성 모독인 델포이의 아폴로에게 신성한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여전히 트라키아에 체류하고 있던 그는 알렉산더에게 그리스 남부의 군사 행동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그리스 국가들이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진 알렉산더는 대신 일리리아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 혼란 속에서 일리리아인들은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지만 알렉산더에게 쫓겨났다.

 

필리포스와 그의 군대는 BC 338년에 그의 아들에 합류했고 그들은 테베 수비대의 완고한 저항 끝에 테르모필라이를 통해 남쪽으로 진군했다. 그들은 아테네와 테베에서 불과 며칠 진군 거리에 있는 엘라테이아 시를 점령했다.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아테네인은 마케도니아에 대항하여 테베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아테네와 필리포스는 테베의 호의를 얻기 위해 대사를 보냈지만 아테네가 이겼다. 필리포스는 암피사로 진군하여 데모스테네스가 보낸 용병을 붙잡고 도시의 항복을 수락했다. 그런 다음 필리포스는 엘라테이아로 돌아와 아테네와 테베에 최종 평화 제안을 보냈지만 두 도시 모두 이를 거부했다.

 

필리포스가 남쪽으로 진군하자 적들은 그를 보이오티아카이로네이아 근처에서 막았다. 이어지는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리포스는 우익을 지휘하고 알렉산더는 좌익을 지휘했으며 필리포스의 신뢰받는 장군들과 함께 했다. 고대 자료에 따르면 양측은 한동안 격렬하게 싸웠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의도적으로 그의 군대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했고 확실하지 않은 아테네 호플리테스(중장보병)의 추격을 믿고 대열을 깨뜨렸다. 알렉산더는 테베의 대열을 처음으로 깨뜨린 사람이었고 필리포스의 장군들이 뒤를 이었다. 적의 결속력을 파훼한 필립은 군대에게 전진하라고 명령하고 신속하게 경로를 설정했다. 아테네군이 패배하자 테베군은 포위되었다. 홀로 싸워야 했지만 패배했다.

 

카이로네이아에서 승리한 후 필리포스와 알렉산더는 반대 없이 모든 도시가 환영하는 펠로폰네소스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들이 스파르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거부되었지만 전쟁에 의지하지 않았다. 코린트에서 필리포스는 스파르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를 포함하는 "헬레닉 동맹"(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오래된 반 페르시아 동맹을 모델로 함)을 확립했다. 필리포스는 이 동맹(현대 학자들에 의해 코린토스 동맹으로 알려짐)의 헤게몬(종종 "최고 사령관"으로 번역됨)으로 지명되었으며 페르시아 제국을 공격할 계획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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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 및 귀환

 

필리포스가 펠라로 돌아왔을 때 그는 BC 338년에 그의 장군 아탈로스의 조카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결혼으로 인해 알렉산더의 지위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의 아들은 마케도니아의 피를 온전히 이은 후계자였던데 비해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피가 절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결혼식 연회에서 술에 취한 아탈로스는 둘의 결합으로 합법적인 상속인을 낳을 것을 신들에게 공개적으로 기도했다.

 

「 필리포스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에서 그에게 너무 어린 그녀의 삼촌 아탈로스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신들에게 그의 조카에 의해 왕국의 합법적인 후계자를 줄 것을 간청하기를 원했다. 알렉산더는 너무 짜증이 나서 컵 중 하나를 그의 머리에 던지면서 "이 악당아"라고 말했다. "뭐라고, 날보고 악당이라고?" 그러자 필리포스는, 아탈로스의 편을 들고 일어나서 그의 아들을 해치우려고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에게 요행인지, 분노로 과도하게 땀을 흘렸거나 그가 흘린 포도주 때문인지 발이 미끄러져 바닥에 쓰러졌다. 알렉산더는 그를 비웃으며 "저기 봐라"고 말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남자가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가는 것도 못해 넘어졌다." 」

 

- 플루타르코스, 필리포스의 결혼식에서의 불화를 설명했다.

 

BC 337년 알렉산더는 어머니와 함께 마케도니아를 떠나 그녀의 동생인 몰로시아의 수도 도도나에 있는 에피루스의 왕 알렉산더 1세에게 그녀를 맡겼다. 그는 일리리아로 계속 가서 한 명 이상의 일리리아 왕들, 아마도 Glaukias와 함께 피난처를 찾았고, 몇 년 전에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손님으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훈련된 아들을 의절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알렉산더는 양측을 중재한 온 가족의 친구 데마라투스의 노력으로 6개월 만에 마케도니아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카리아의 페르시아 사트라프(총독) 픽소다루스는 알렉산더의 이복형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에게 장녀를 바쳤다. 올림피아스와 알렉산더의 몇몇 친구들은 이것이 필리포스가 아리다이오스를 그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알렉산더는 배우 코린트의 테살루스를 보내 픽소다루스에게 딸의 손을 정당하지 않은 아들에게 제안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대신 알렉산더에게 보내라고 했다. 필리포스는 이 소식을 듣자 협상을 중단하고 알렉산더에게 카리안의 딸과 결혼하고 싶냐고 꾸짖으며 아들을 위해 더 나은 신부를 원한다고 설명했다. 필리포스는 알렉산더의 친구 Harpalus, 네아르코스, 프톨레마이오스, Erigyius 네 명을 추방하고 코린트가 테살루스를 사슬로 묶어서 데려오도록 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즉위

 

BC 336년 여름, 아이가이에서 그의 딸 클레오파트라와 올림피아스의 형제 알렉산더 1세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동안 필리포스는 그의 경호 대장인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했다. 파우사니아스가 탈출하려고 할 때 그는 포도나무에 걸려 알렉산더의 두 동료 페르디카스와 레온나토스를 포함한 그의 추격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알렉산더는 20세에 귀족과 군대에 의해 그 자리에서 왕으로 선포되었다.

 

BC 336년 마케도니아 왕국

 

권력의 통합

 

알렉산더는 왕좌에 대한 잠재적인 라이벌을 제거하면서 그의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그의 사촌인 전 아민타스 4세를 처형했다. 그는 또한 린케스티스(Lyncestis) 지역에서 두 명의 마케도니아 왕자를 죽였지만 세 번째인 알렉산더 린케스테스는 살려주었다. 올림피아스는 클레오파트라 에우리디케와 필리포스의 딸인 에우로파를 산 채로 불태웠다. 알렉산더가 이것에 대해 알았을 때 그는 분노했다. 알렉산더는 또한 소아시아 군대의 선봉대를 지휘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삼촌 아탈로스의 처형을 명령했다.

 

아탈로스는 당시 아테네로의 망명 가능성에 대해 데모스테네스와 연락했다. 아탈로스는 또한 알렉산더를 심하게 모욕했으며 클레오파트라가 살해된 후 알렉산더는 그가 살아남기에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알렉산더는 올림피아스에 의한 음독의 결과로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아리다이오스를 구했다.

 

필리포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은 테베, 아테네, 테살리아, 마케도니아 북부의 트라키아 부족을 포함한 많은 지역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소식이 알렉산더에게 전해지자 그는 신속하게 대응했다. 외교를 권유했지만 알렉산더는 3,000의 마케도니아 기병을 소집하고 테살리아를 향해 남쪽으로 갔다. 그는 올림푸스 산과 오사 산 사이의 고갯길을 점령하고 있는 테살리아 군대를 발견하고 부하들에게 오사 산을 타라고 명령했다. 테살리아 군대가 다음날 깨어났을 때 그들은 뒤에서 알렉산더를 발견하고 즉시 항복하여 그들의 기병들을 알렉산더의 군대에 추가했다. 그런 다음 그는 펠레폰네소스를 향해 남쪽으로 계속 갔다.

 

알렉산더는 테르모필라이에 멈춰서 남쪽의 코린트로 향하기 전에 Amphictyonic League(고대 그리스에서 종교 중심지를 둘러싸고 형성된 인접도시들의 연합)의 리더로 인정받았다. 아테네는 평화를 청했고 알렉산더는 반군을 용서했다. 알렉산더와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사이의 유명한 만남은 알렉산더가 코린트에 머무는 동안 발생했다.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에게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었을 때 철학자는 알렉산더에게 햇빛을 가리고 있을 때 약간 옆으로 서 있으라고 경멸스럽게 요청했다. 이 답변은 분명히 "하지만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 알렉산더를 아주 기쁘게 했다. 코린트에서 알렉산더는 헤게몬("지도자")의 칭호를 받았고 필리포스처럼 다가오는 페르시아 전쟁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트라키아의 봉기 소식을 받았다.

 

BC 300년경 사슴 사냥 모자이크의 상징. (도끼를 든) 헤파이스티온과 알렉산더
BC 335년 트라키아인과의 "Carts 전투"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발칸 캠페인

 

알렉산더는 아시아로 건너가기 전에 북쪽 국경을 안전하게 만들고 싶었다. BC 335년 봄, 그는 여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아갔다. 암피폴리스에서 시작하여 그는 동쪽의 "독립된 트라키아인"의 나라로 여정을 떠났다. 그리고 히머스 산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는 고지대에 있는 트라키아 군대를 공격하고 격파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트리발로이의 나라로 진군하여 Lyginus 강(다뉴브의 지류) 근처에서 군대를 격파했다. 알렉산더는 3일 동안 다뉴브로 행진하여 반대편 기슭에서 기티(Getae) 족을 만났다. 밤에 강을 건너면서 그는 그들을 놀라게 하고 첫 기병 대전 후 군대를 퇴각시켰다.

 

알렉산더에게 일리리아의 왕 클레이토스와 타울란티의 글라우키아스 왕이 그의 권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쪽으로 진군하여 일리리아로 진격한 알렉산더는 차례로 승리하여 두 통치자가 군대와 함께 도망가도록 했다. 이러한 승리로 그는 북부 국경을 확보했다.

 

알렉산더가 북쪽에서 캠페인을 벌이는 동안 테베와 아테네는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더는 즉시 남쪽으로 향했다. 다른 도시들이 다시 망설이는 동안 테베는 싸우기로 결정했다. 테베의 저항은 효과가 없었고 알렉산더는 도시를 파괴하고 다른 보이오티아의 도시들에 영토를 나누었다. 테베의 끝은 아테네를 휩쓸고 그리스 전체를 일시적으로 평화롭게 만들었다. 알렉산더는 아시아 캠페인에 착수하여 안티파트로스를 섭정으로 남겼다.

 

캠페인 맵

 

BC 336 이오니아 / BC 333 시리아와 이집트
BC 331 페르시아 / BC 326 인도

 

페르시아 제국 정복

 

소아시아

 

BC 336년 필리포스 2세는 이미 파르메니온을 아민타스, 안드로메네스, 아탈로스, 10,000명의 군대와 함께 아나톨리아로 보내 서부 해안과 섬에 살고 있는 그리스인들을 아케메네스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침략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렸다.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에 있는 그리스 도시들은 필리포스가 살해당하고 그의 젊은 아들 알렉산더가 계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마케도니아인들은 필립의 죽음으로 사기를 잃었고 이후 로도스의 용병 멤논의 지휘 아래 마그네시아 근처에서 아케메네스에 패배했다.

 

필리포스 2세의 침공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알렉산더의 군대는 BC 334년에 헬레스폰토스마케도니아와 다양한 그리스 도시 국가, 용병, 그리고 트라키아, 파이오니아, 일리리아에서 봉건적으로 길러진 병사들로 구성된 약 48,100명의 병사, 6,100의 기병과 38,000명의 선원이 포함된 120척의 함대와 함께 건넜다. 그는 창을 아시아 땅에 던지고 아시아를 신들로부터 선물로 받았다며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정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외교를 선호한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알렉산더의 싸움에 대한 열의도 보여주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군대과의 그라니코스 전투에서 첫 승리를 한 후 페르시아 지방 주도와 사르디스 보고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그런 다음 그는 이오니아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도시에 자율성과 평등을 부여했다. 아케메네스 군대가 보유한 밀레투스는 근처에 페르시아 해군이 있어 섬세한 공성 작전이 필요했다. 더 남쪽인 카리아의 할리카르낫소스에서 알렉산더는 첫 번째 대규모 포위 공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며 결국 적군인 로도스의 용병 대장 멤논과 카리아의 페르시아 사트라프 오론토바테스가 바다로 퇴각하도록 만들었다. 알렉산더는 카리아 정부를 알렉산더를 양자로 삼은 Hecatomnid 왕조의 일원 아다에게 맡겼다.

 

알렉산더는 할리카르낫소스에서 산악 지대인 리키아와 팜필리아 평야로 진군하여 모든 해안 도시를 장악하고 페르시아 해군 기지를 없앴다. 팜필리아부터는 해안에 주요 항구가 없었고 알렉산더는 내륙으로 향했다. 테르미소스에서 알렉산더를 변변치않게 만들었지만 피시디아의 도시를 습격하지는 않았다. 고대 프리기아의 수도 고르디움에서 알렉산더는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었다. 이 일은 미래의 "아시아의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야기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매듭을 풀지 않고 칼로 베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레반트와 시리아

 

BC 333년 봄 알렉산더는 타우루스를 넘어 킬리키아로 들어갔다. 병으로 인해 긴 휴식을 취한 그는 시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다리우스의 훨씬 더 많은 대군은 압도적이었지만 그는 킬리키아로 진군하여 이수스에서 다리우스를 물리쳤다. 다리우스는 전투에서 도망쳐 군대는 붕괴되었으며 아내와 두 딸, 어머니 시시감비스와 멋진 보물을 남겼다. 그는 이미 잃어버린 땅을 포함하는 평화 조약과 가족을 위해 1만 달란트의 몸값을 제안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이제 아시아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영토 분할을 결정할 사람은 자신 뿐이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더는 시리아와 레반트 해안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듬해인 BC 332년 그는 길고 어려운 포위 공격 끝에 점령하게 되는 티레를 공격했다. 도시의 남자들은 학살당했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이집트

 

알렉산더가 티레를 파괴했을 때 이집트로 가는 방향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가 빠르게 항복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가자에서 저항에 부딪혔다. 요새는 많이 무장되었고 언덕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포위 공격이 필요했다. "기술자들이 언덕의 높이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지적했을 때... 알렉산더는 더 많은 시도를 하도록 격려했다.". 네 번의 공격 후 요새가 무너졌지만 알렉산더가 심각한 어깨 부상을 입었다. 티레에서와 같이 남성은 검에 죽었고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다.

 

알렉산더는 BC 332년 이집트로 진출하여 해방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의 신탁에서 신 Amun의 아들로 선언되었다. 이후 알렉산더는 종종 제우스-암몬을 그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불렀고 그의 죽음 이후 화폐는 그를 신성의 상징으로 암몬의 뿔로 장식하여 묘사했다.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웠는데 그가 죽은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번영하는 수도가 되었다.

 

이집트 상형 문자로 된 알렉산더의 이름(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작성), BC 332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BC 331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떠나 북부 메소포타미아(현재의 이라크 북부)에 있는 아케메네스 아시리아의 동쪽으로 진군하여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를 다시 격파했다. 다리우스는 다시 한번 들판을 떠났고 알렉산더는 그를 아르빌까지 쫓았다. 가우가멜라는 둘 사이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만남이 되었다. 다리우스는 산을 넘어 엑바타나(현재의 하마단)로 도망쳤고 알렉산더는 바빌론을 점령했다.

 

페르시아

 

바빌론에서 알렉산더는 아케메네스의 수도 중 하나인 수사로 가서 보고를 차지했다. 그는 그의 군대 대부분을 페르시아 왕도를 통해 페르시아의 의식용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로 보냈다. 알렉산더 자신은 도시로 가는 직선로로 선택된 군대를 데려갔다. 그런 다음 그는 아리오바르자네스의 페르시아 군대가 가로막고 있는 페르시아 게이트(현재의 자그로스 산맥)의 고개를 습격한 다음 수비대가 보고를 약탈하기 전에 페르세폴리스로 서둘러 갔다.

 

페르시아 게이트가 위치한 곳과 1990년대 건설된 도로

 

페르세폴리스에 들어가자 알렉산더는 그의 군대가 며칠 동안 도시를 약탈하도록 허용했다. 알렉산더는 5개월 동안 페르 세폴리스에 머물렀다. 그가 머무는 동안 크세르크세스 1세의 동쪽 궁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졌다. 가능한 원인으로는 술에 취한 사고나 크세르크세스가 2차 페르시아 전쟁 동안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태운 것에 대한 고의적인 복수가 있다. 플루타르코스와 디오도루스는 알렉산더의 동반자인 헤타이라 타이스가 불을 지펴서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도시가 타는 것을 보았을 때 알렉산더는 즉시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가 부하들에게 불을 끄라고 명령했지만 불길이 이미 도시 대부분에 퍼졌다고 주장했다. 쿠르티오스는 알렉산더가 다음날 아침까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더가 쓰러진 크세르크세스 동상에 잠시 멈춰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리스 침략으로 인해 누워있는 당신을 두고 지나가야 하나, 아니면 당신의 위대함이나 다른 면의 미덕 때문에 다시 당신을 세워줘야 하나?"

 

제국의 몰락과 동쪽

 

알렉산더는 다리우스를 쫓아 먼저는 메디아로 그리고 파르티아로 향했다. 페르시아의 왕은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지 못하고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이자 친척인 베소스에게 포로로 잡혔다. 알렉산더가 다가오자 베소스는 그의 부하들이 대왕을 죽이게 하고 자신을 다리우스의 후계자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로 선언하고 중앙아시아로 후퇴하여 알렉산더를 상대로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장례식에서 다리우스의 시신을 그의 아케메네스 전임자 옆에 묻었다. 알렉산더는 죽어가는 동안 다리우스가 그를 아케메네스 왕좌의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했다. 아케메네스 제국은 일반적으로 다리우스와 함께 몰락한 것으로 간주된다.

 

알렉산더는 베소스를 강탈자로 보고 그를 물리치기 위해 나섰다. 처음에 베소스를 상대로 한 이 캠페인은 중앙아시아의 대 여정으로 바뀌었다. 알렉산더는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와 타지키스탄의 알렉산드리아에 샤테("The Furthest")를 포함하여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는 일련의 새로운 도시를 세웠다. 캠페인은 알렉산더를 메디아, 파르티아, 아리아(서 아프가니스탄), 드랑기아나, 아라코시아(남부 및 중앙 아프가니스탄), 박트리아(북부 및 중앙 아프가니스탄) 및 스키티아로 데려갔다.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제국과 그의 캠페인 경로

 

BC 329년 소그디아나의 사트라피에서 정의되지 않은 위치를 차지했던 스피타메네스는 베소스를 배신하여 알렉산더의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넘겼고 베소스는 처형당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기마 유목민 군의 침입으로 시르다리야 강(Jaxartes)에 있을 때 스피타메네스소그디아나에서 반란으로 일으켰다. 알렉산더는 Jaxartes 전투에서 스키타이족을 격파하고 즉시 스피타메네스에 대한 캠페인을 시작하여 Gabai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다. 패배 후 스피타메네스는 부하들에게 살해되었고 그들은 화평을 요청했다.

 

알렉산더 통치 7년(BC 324)의 박트리아의 행정 문서, 그의 이름 "알렉산드로스" 형태의 첫 번째 알려진 사용, 아람어 문서 / 클레이토스의 죽음

 

문제와 음모

 

이 기간 동안 알렉산더는 자신의 궁정에서 페르시아 복장과 관습의 일부 요소를 채택했으며 특히 페르시아인이 지배자에게 보여준 상징적인 손 키스나 땅에 엎드려서 절하는 관습을 채택했다. 그리스인들은 제스처를 신들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알렉산더가 그것을 요구함으로써 자신을 신성화하는 의미로 믿었다. 이로 인해 많은 동포들의 민심을 잃었고 그는 결국 그것을 포기했다.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밝혀졌고 그의 장교 중 한 명인 필로타스는 알렉산더에게 알리지 않은 혐의로 처형되었다. 아들의 죽음은 아버지의 죽음을 필요로 했고 따라서 엑바타나에서 보고를 지키는 임무를 받은 파르메니온은 복수 시도를 막기 위해 알렉산더의 명령에 따라 암살되었다. 가장 악명 높았던 일은 그라니코스에서 알렉산더의 목숨을 구해준 검은 클레이토스를 마라칸다(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서 술에 취해 격렬한 논쟁을 하던 중 살해한 것이었다. 클레이토스는 알렉산더가 여러 가지 판단 실수, 특히 부패한 동양 생활 방식을 선호하여 마케도니아 방식을 잊었다고 비난했다.

 

나중에 중앙아시아 캠페인에서 두 번째 음모가 드러났는데 이 음모는 왕의 심부름꾼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공식 역사가 올린투스의 칼리스네스는 음모에 연루되었으며 알렉산더의 아나바시스에서 아리아노스는 칼리스네스심부름꾼이 처벌로 선반에서 고문당했고 곧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칼리스네스가 실제로 음모에 연루되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의 고발 이전에 그는 Proskynesis(엎드려 손 키스하는 행위)를 도입하려는 시도에 대한 반대를 이끌면서 호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없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가 아시아로 떠날 때 그는 경험이 풍부한 군사 및 정치 지도자인 필리포스 2세의 "올드 가드"의 일원인 안티파트로스 장군에 마케도니아를 맡겼다. 알렉산더가 테베를 약탈함으로써 그리스는 그의 부재 기간 동안 조용히 있었다. 한 가지 예외는 BC 331년 스파르타의 왕 아기스 3세의 무장 요청으로, 안티파트로스는 메갈로폴리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를 죽였다. 안티파트로스는 스파르타의 처벌을 코린트 동맹에 회부했고 이를 용서하기로 선택한 알렉산더를 따랐다. 안티파트로스와 올림피아스 사이에는 상당한 마찰이 있었고 각각 알렉산더에게 서로에 대해 불평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는 알렉산더의 아시아 캠페인 기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알렉산더는 그의 정복에서 막대한 금액을 돌려보냈고 이는 경제를 자극하고 제국 전역의 무역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병사를 보내라는 끊임없는 요구와 함께 제국 전반에 걸친 마케도니아인의 이주는 마케도니아의 힘을 고갈시켰고 알렉산더 이후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궁극적으로 3차 마케도니아 전쟁(BC 171-168) 이후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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