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이스라엘

[남유다] 아하시야

by 금곡동로사 2021. 2. 12.
728x90

아하시야를 상상한 그림, 16세기 유럽

 

아하시야 또는 여호아하스 1세(대하 21:17, 25:23)는 남유다의 여섯 번째 왕이자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 아달랴의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다윗 가문과 오므리 가문의 혈통을 이은 최초의 유다 왕이었다.

 

왕하 8:26에 따르면 아하시야는 그가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22세였으며 예루살렘에서 1년 동안 통치했다. 대하 22:2은 그의 통치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을 때 그의 나이를 42세로 알려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하 22:2에 나오는 42세를 사본을 기록한 사람의 실수로 간주한다. 일부 그리스어 및 시리아어 번역본의 대하 22:2에서 22세로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BC 842-841년 경에 통치했다.

 

 

통치

 

아하시야는 유다 왕 여호람의 막내아들이었다. 대하 21:16-17에 따르면 그의 형들은 블레셋과 아랍의 습격으로 끌려갔다.

 

그의 어머니 아달랴의 영향으로 아하시야는 야훼를 섬기는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숭배의 형태를 도입했다.

 

그녀의 가족은 그의 조언자가 되어 아람 왕 하사엘을 상대로 한 원정에서 북이스라엘의 왕인 삼촌 여호람과 합류하도록 격려했다. 여호람은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이스르엘로 회복하러 갔다. 아하시야도 길르앗의 분쟁 지역을 떠나 예루살렘에 들린 후 여호람과의 집회를 위해 이스르엘로 갔으며 예후의 반란에 휘말렸다. 열왕기 하의 기록에 따르면 아하시야와 여호람은 모두 반역적인 장군을 맞이하러 나갔으며 여호람은 예후의 살인 의도를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 아하시야는 그의 삼촌 여호람이 활로 무장한 예후의 화살에 맞아 죽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하시야는 목숨을 걸고 도망쳤지만 이블르암 부근의 구르를 지나갈 때 부상을 입었으며 므깃도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죽었다(왕하 9:22-28). 그러나 역대 하에서는 예후의 쿠데타 후 사마리아에 숨어있던 아하시야를 예후의 부하들이 발견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 다소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예후의 반란, 1. 여호람이 요양을 위해 길르앗 라못에서 이스르엘로 향함, 아하시야도 합류함 2. 예후가 길르앗 라못에서 이스르엘에 도착 3. 여호람이 살해된 후 아하시야는 도주했지만 이블르암 근처에서 치명상을 입음 4. 부상을 입은 아하시야는 므깃도에 도착해서 죽음 5. 예후는 이스르엘로 돌아가 이세벨을 죽임

 

 

 

출처 : 위키피디아

728x90

'고대 이야기 > 이스라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유다] 요아스  (0) 2021.02.12
[남유다] 아달랴  (0) 2021.02.12
[남유다] 여호람  (0) 2021.02.12
[남유다] 여호사밧  (0) 2021.02.11
[남유다] 아사  (0) 2021.02.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