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스(“여호와께서 주셨다”라는 의미)는 유다의 여덟 번째 왕으로 그의 할머니 아달랴가 명령한 왕실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하시야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브엘세바의 시비아였다. 요아스는 통치가 시작되었을 때 7세였으며 40년 동안 통치했다(왕하 12:1, 대하 24:1). 그는 아들인 유다의 아마샤가 계승했다. 그는 "제사장 여호야다의 모든 날"(대하 24:2)에 의로웠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야훼에 대한 충실함에서 벗어났다고 한다(대하 24:17-19).
요아스는 BC 835-796년 경까지 통치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족보에 유다의 요아스가 나열되어 있지 않으며, 생략된 유다의 네 왕 중 하나이다. 나머지 세 명은 아하시야, 아마샤, 여호야김이다.
유년기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아하시야가 사망한 후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결혼한 요아스의 고모 여호세바에 의해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의 광란으로부터 구해졌다(왕하 11:2, 대하 22:11). 여호야다는 그를 성전에 6년 동안 숨긴 후 다윗의 왕좌를 빼앗은 아달랴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요아스를 왕위에 올렸다. 아달랴는 쿠데타로 사망했다(왕하 11:4, 대하 23:3, 왕하 11:12, 대하 23:11).
요아스가 왕위에 오른 후 하나님과 왕과 민족 사이의 언약이 새롭게 되었다. 여호람 치세에 도입되어 아달랴 치세 때 강화된 티레의 바알 숭배가 억제되었다. 바알의 제사장 맛단은 바알의 제단이 파괴되면서 살해되었다. 유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과 그 신권은 국가적 의의를 달성했다(왕하 11:17-19, 대하 23:16-20).
업적
왕하 12장의 기록에 따르면 요아스는 성전에서 숭배자들이 지불한 돈을 수리비로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그의 통치 23년이 되도록 그는 사제들이 복원 사업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민중의 기부금을 받아 성전을 원래 상태로 복원하고 더욱 강화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대하 24장의 기록은 왕하 12장의 기록을 따르지만 민중의 기부를 "성막과 관련하여 광야에서 징수된 세금과 유사한 세금의 한 형태"로 취급한 점에서 달랐다.
생애 후반부와 죽음
여호야다가 죽은 후 요아스는 제사장 대신 유다의 방백들의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해 그는 이전 북이스라엘 왕들처럼 야훼를 숭배하는 것을 버리고 우상과 아세라 숭배로 돌아섰다. 대하 24장에서 여호야다의 아들이자 계승자이며 요아스의 사위인 제사장 스가랴가 요아스가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해 그들을 꾸짖었고 그 결과 요아스가 돌로 쳐 죽이는 처형을 명령했다(대하 24:20-21). 역대기에서 이 잔인한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요아스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또한 여호아스의 행위로 인해 억압을 겪게 된 것은 아람 침략자들의 손에 의해 하나님의 징벌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대하 24:22-24).
왕하 12장의 기록에 따르면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할 때 요아스는 왕실과 신성한 보물의 모든 금을 내어 공격을 중단하도록 설득했지만(왕하 12:17-18) 역대 하의 기록에 따르면 아람 군대는 "백성 중에서 그 모든 방백들을 멸절하고 노략한 물건을 다메섹 왕에게로 보내니라",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하고 그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혔다(대하 24:23-25).
요아스는 결국 밀로 궁에서 자신의 종들에 의해 살해되었고(왕하 12:20) 그의 죽음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대한 복수 행위로 묘사되었다. 요아스는 "왕들의 무덤에 묻히지 않았음에도"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성에 묻혔다(왕하 12:21, 대하 24:25).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위를 이었다.
탈무드의 랍비들은 랍비 전통에 근거하여 선지자 아모스가 당시 유다의 왕인 아마샤의 형제였다고 공표했다(선지자 이사야도 왕실의 일원이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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