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랴로도 알려진 웃시야("야훼는 나의 힘"이라는 의미)는 남유다 왕국의 열 번째 왕이자 아마샤의 아들 중 하나였다(대하 26:1).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통치의 첫 24년은 그의 아버지 아마샤와 공동 통치였다.
에드윈 R. 틸레의 연대기에 따르면 웃시야는 BC 791년 경에 그의 아버지 아마샤와, BC 768/767년 경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유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웃시야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나병에 걸렸다(왕하 15:5, 대하 26:19-21). 틸레는 웃시야가 BC 751/750년 경 나병에 걸렸을 때 그의 아들 요담이 통치권을 인수했으며 웃시야는 BC 740/739년 경까지 살았다. 베가는 웃시야의 통치 마지막 해에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족보에 웃시야가 나와 있다.
성격적 이야기 : 통치
웃시야는 16세에 왕위를 차지하여 약 52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통치는 "솔로몬 시대 이후 여호사밧의 통치를 제외하고는 가장 번영"했었다.
그의 통치 초기에 스가랴 선지자의 영향을 받아 그는 하나님께 충실했고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했다"(왕하 15:3, 대하 26:4-5).
예루살렘에서 그는 숙련된 사람들이 탑과 모퉁이 방어에 사용하는 화살을 쏘고 큰 돌을 던지는 기계를 만들었다. 대하 26장에 따르면 웃시야는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정복하고 암몬 사람들로부터 공물을 받았다. 그는 국가를 재건하고 군대를 재조직하고 재 장비했으며 직접 농업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활기차고 유능한 통치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이집트 변방까지 퍼져 나갔다"(대하 26:8-14).
그런 다음 그의 자존심은 그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는 향단에 분향하기 위해 야훼의 성전에 들어갔다. 대제사장 아사랴는 이것을 제사장들의 특권을 빼앗으려는 시도로 보고 80명의 제사장 무리와 그를 가로막고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대하 26:18). 그동안 큰 지진이 땅을 뒤흔들고 성전에 균열이 일어났으며 갈라진 틈으로 비친 태양의 밝은 광선이 왕의 얼굴에 떨어지더니 나병이 즉시 그에게 난 것을 알 수 있었다(요세푸스 플라비우스, Antiquities IX 10:4). 웃시야는 향을 드리기 전에 갑자기 이마에 문둥병이 발했고(대하 26:19) 성전에서 쫓겨나 죽을 때까지 "별궁"에 살도록 강요되었다(왕하 15:5, 대하 26:21). 통치권은 그의 아들 요담에게 넘겨졌는데(왕하 15:5), 이는 웃시야의 생애의 마지막 11년(BC 751/750에서 740/739) 동안 지속된 공동 통치였다.
역사성
BC 740년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3년의 포위 공격 끝에 아르파드를 점령하고 하맛을 파괴했다. 웃시야는 하맛 왕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티글라트 필레세르는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매년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님루드에서 발견된 아시리아 서신 및 행정 문서의 형태로 된 메소포타미아의 고고학적 발견과 니네베 왕궁의 조각은 웃시야와 므낫세 통치 사이에 아시리아와 유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며 웃시야가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와 동시대였다는 증거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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