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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이스라엘

[남유다] 요담

by 금곡동로사 2021.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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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담을 상상한 그림, 16세기 유럽

 

요담 또는 요탐은 남유다의 열한 번째 왕이자 웃시야 왕과 사독의 딸 여루사의 아들이었다. 요담은 그의 통치를 시작했을 때 25세였으며 16년 동안 통치했다(왕상 15:33, 대하 27:1). 에드윈 R. 틸레는 11년 동안 지속된 아버지와 함께 그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아버지 웃시야는 향을 피우기 위해 성전에 들어간 후 나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요담은 당시 왕궁과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나병 환자로 별궁에서 살았다.

 

그는 BC 751/750년에 웃시야와 공동 통치를 시작했고 BC 740/739에서 736/735까지 단독으로 통치했으며, 당시 그는 아들 아하스를 위해 친 아시리아 세력에 의해 물러났다. 틸레에 따르면 그는 BC 732/731년에 사망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족보에 남유다의 요담이 나와 있다.

 

 

통치

 

요담은 강력한 정부를 물려받았고 잘 관리되고 통치되었다. 그는 예레미야 36:10에 언급된 새 문인 (17세기 잉글랜드의 신학자 매튜 풀에 의해 확인된) 예루살렘 성전의 높은 또는 위쪽 문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었다(왕하 15:35, 대하 27:3). "그는 유다 산맥에 도시를 건설하고 숲에 성과 탑을 세웠다."(대하 27:4)

 

왕하 15장에서 요담이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와 싸웠음을 언급했다(15:37). 그는 또한 그에게 막대한 연례 공물을 바치게 되는 암몬 사람들을 물리쳤다(대하 27:5). 그러나 북 왕국의 부패가 증가하면서 유다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요담은 선지자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 미가와 동시대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조언을 통해 혜택을 얻었다.

 

미켈란젤로의 웃시야-요담-아하스, 전통적으로 요담은 왼쪽의 녹색 남자이며 함께 있는 아이는 아들 아하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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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 문제

 

BC 8세기의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두 왕국에 대한 성경적 연대기는 풍부하고 당혹스럽다. 통치 기간 중 일부는 단독 통치가 시작될 때 기록되는 반면, 다른 일부는 공동 통치가 시작될 때 또는 베가의 경우 경쟁 통치가 시작된 때부터 기록되었다. 틸레는 이러한 기록을 이해하는 열쇠는 두 왕국이 직면한 아시리아의 위협이 증가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BC 754년에 아슈르 니라리 5세아람 북부의 아르파드에 맞서 아시리아인을 이끌었다. 그의 후계자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BC 743년부터 740년까지 아르파드와 전쟁을 벌여 3년 만에 도시를 점령했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다마스쿠스의 르신은 이스라엘의 베가와 동맹을 맺었고, 따라서 두 사람은 친 아시리아의 유다 왕 아하스의 적이었다(이사야 7:1). 한편, 사마리아에서 다스리는 므나헴은 그의 반 아시리아 경쟁자인 베가에 대항하여 "왕국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티글라트 필레세르(성서의 불)에게 조공을 보냈다(왕하 15:19). 틸레에 따르면 당시의 연대기 자료가 기록된 방식의 해명은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에서 존재한 강력한 친 아시리아와 반 아시리아 파벌이었다.

 

요담이 유다에서 그의 통치를 시작했을 때 둘 다 왕좌에 있었지만 그의 통치는 므나헴이 아니라 베가의 통치와 일치했다. 이것은 므나헴보다 베가와의 유대 관계를 닫고 아시리아의 위협에 대한 공통된 저항이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했다. 751/750년에 요담의 통치가 베가의 해와 일치한다는 사실은 당시 베가가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다는 강력한 증거를 나타낸다. 그리고 736/735년에 아하스의 즉위가 752/751년에 시작된 베가의 통치와 마찬가지로 동시대였다는 사실은 베가가 그의 통치를 시작한 것이 그 당시였다는 추가적인 증거를 보여준다. 왕하 15:32와 16:1의 이러한 기록은 인위적이지 않다. 그 시대의 역사적 세부 사항에 익숙하지 않은 후대의 서기관은 그것들을 날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유다에서 증가하는 아시리아의 압력은 북쪽의 적으로부터 협상을 모색한 사람들의 세력을 강화하여 지도자를 바꾸었다.

 

736년과 735년에 티글라트 필레세르는 다시 북서쪽, Nal 산과 우라르투 지역에 있었다. 유다의 많은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복종하거나 무너질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735년에는 친 아시리아 집단이 요담을 퇴위시키고 아하스를 왕좌에 올릴 만큼 강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요담은 아하스의 20세(732/731)까지 계속해서 살았지만 735년부터 일을 지휘한 사람은 아하스였다.

 

틸레는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이 기간에 대한 연대기 자료의 복잡성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으며 그는 성경 본문에서 구성할 수 있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정규 연도가 이 기간 동안 알려진 아시리아 왕들의 움직임에 부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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