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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전쟁 이야기/고대전쟁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 2차 그리스 침공 3편 아르테미시온 해전

by 금곡동로사 2021.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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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르크세스의 그리스 침공 경로를 나타낸 지도 이미지

 

BC 480년 8월 - 아르테미시온 해전

 

전조

 

아마도 7월 말 또는 8월 초에 연합군 함대는 페르시아 군대가 올림푸스 산을 지나 해안을 따라 진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아르테미시온 곶을 향해 북쪽으로 항해했다.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온에 기지를 확보하여 아마도 배를 곶의 해변에 끌어올려 두고는 필요에 따라 신속하게 출항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연합군은 페르시아 함대의 접근을 경계하기 위해 스키아토스에 3 척의 정찰선을 보냈으나 2주가 지나도록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스키아토스 앞바다에 10 척의 시돈 삼단노선이 도착했고, 연합군의 주력 함대는 섬에 켜진 신홋불을 통해 정보를 받았다. 그러나 연합군 순찰선들은 알지 못한채 두 척은 나포되었고, 한 척은 좌초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뒤이은 혼란 속에서 신홋불이 페르시아 함대 전체의 도착을 예고했는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으며 예방책으로 연합군 함대 전체가 아르테미시온 해협으로 진입했다. 페르시아 함대가 그날 도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그들은 에우보이아 서쪽 해안의 중간 지점에 있는 칼키스로 항해하기로 결정했고, 에우보이아 고지에 병사를 남겨두고 페르시아 함대의 실제 도착을 경보하게 했다.

 

역사학자들은 연합군이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잘못 해석하여 페르시아 함대가 에우보이아의 동쪽을 항해하기 위해 스키아토스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고 있다. 신홋불로 보낸 신호는 매우 단순하고 잠재적으로 잘못 해석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호원들은 페르시아 함대가 스키아토스 동쪽으로 항해하고 있다고 진짜 믿었을지도 모른다. 페르시아 함대가 에우보이아의 바깥쪽인 동쪽을 항해한다면, 그들은 곧장 아티카로 향할 수 있었고, 따라서 연합군의 퇴각로를 차단할 수 있었다. 게다가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공격하고 에우보이아 주변을 항해할 수 있는 충분한 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칼키스로의 철수는 페르시아 함대가 에우보이아 바깥쪽을 항해한다면 연합군이 에우보이아 해협에서 탈출할 기회를 제공하며 필요하다면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겨둔 감시자들은 페르시아 함대가 실제로 에우보이아 동쪽을 항해할 경우 연합군에 알릴 수 있었다. 그래서 연합군 함대는 칼키스에서 계속 대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하는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불안해한 연합군의 다소 과잉 반응일지도 모른다.

 

약 10일 후, 페르시아 군대가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했고, 칼키스에 있는 연합군은 지상군와 함대의 연락을 위해 임명된 아브로니코스를 함장으로 한 배를 통해 정보를 받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함대의 흔적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페르시아군이 테르모필라이에서 보낸 첫날은 공격을 시작하지 않고 지나갔다. 다음날, 페르시아 함대는 마침내 아르테미시온 근처에 접근하여 스키아토스의 틈(마그네시아 해안과 스키아토스 해안 사이)으로 향했을 때 여름 강풍('헬레스폰터' - 아마도 북동쪽에서 불어온 폭풍)이 닥쳐 페르시아 함대를 산악 해안으로 몰아넣었다. 폭풍은 이틀 동안 지속되어 페르시아 선박의 약 3분의 1을 파괴했다. 한편,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이 흩어지기를 계속 기다렸고, 폭풍우가 닥치는 동안 공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르테미시온 해협. 그리스 함대 기지가 있었던 해변을 향해 남쪽으로 바라본 전망

 

폭풍이 끝난 다음 날, 연합군 함대는 테르모필라이에서 지상군의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페르시아 군대가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한 이래 5일째) 페르시아군은 테르모필라이에서 연합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페르시아 함대는 마침내 사키아토스의 틈을 통해 나타나 아르테미시온의 맞은편 아페타이 해안에서 정박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15 척의 페르시아 선박이 연합군 전선으로 돌진하여 나포되었다. 분명히 폭풍우에 피해를 입었지만, 페르시아 함대는 여전히 연합군 함대보다 거의 3:1로 우세했다. 결과적으로 연합군 함대는 완전히 철수할 것을 고려했다. 에우보이아인은 페르시아군에 버려지고 싶지 않아 테미스토클레스를 매수하여 연합군 함대가 남아 있도록 했다. 테르모필라이와 아르테미시온에서의 공동작전이 애당초 그의 전략이었기 때문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원하던 것일 가능성이 크며 이 뇌물로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제독인 에우리비아데스와 아데이만토스를 차례로 매수하여 아르테미시온에 머물게 했다.

 

그날 늦게 페르시아 함대에서 탈영한 스킬리아스라고 불리는 그리스인이 연합군 진영으로 헤엄쳐 들어왔다. 그는 연합군에게 나쁜 소식을 가져왔다. 페르시아 함대의 대부분이 수리를 받고 있는 동안 페르시아군은 연합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해 200 척의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을 선별하여 에우보이아의 바깥쪽 해안을 항해했다. 페르시아군은 연합군이 단순히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합군을 아직 공격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을 가두려고 했다. 연합군은 갇히지 않기 위해 별동대를 향하기로 결심했지만 페르시아군이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리는 것을 막기 위해 해질녘에 떠날 계획이었다.

 

연합군은 이 상황이 페르시아 함대의 분리된 부분을 격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연합군이 이 별동대를 어디서 만날 계획이었는지 분명하지 않고 다만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을 뿐이라고 했다. 한 가지 가능성은 그들이 에우보이아 해협을 따라 항해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고, 아티카 해안을 순찰하는 다른 연합군 선박들이 남쪽에서 에우보이아 해협으로 진입할 때 페르시아 함대를 따라가기를 바란 것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스스로 함정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연합군은 아페타이에서 출발하여 아르테미시온을 지날 때 함대를 매복 공격할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페르시아 함대에게 아르테미시온에 머물 것처럼 확신시키기 위해 그날 남은 시간 동안 페르시아 전선을 향해 시위하기로 결정했다. 헤로도토스는 또한 이것이 그들이 페르시아의 선박 조종술과 전술을 평가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을 암시했다. 연합군은 아마도 오후 늦게까지 기다렸기 때문에 전면적인 교전을 벌일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별동대로 향하는 항해 전에 사상자를 내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결정은 마침내 전투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아르테미시온 곳의 해변. 멀리 마그네시아가 보인다 / 테르모필라이와 아르테미시온으로 향한 그리스군과 페르시아군의 경로를 나타낸 지도 / 테살리아로 떠나는 그리스 함대, 19세기 作 / 이오니아 함대와 페르시아군의 만남, 19세기 作

 

연대표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의 정확한 연대기와 서로 간의 관계는 다소 불분명하다. 아래의 연대표는 라젠비와 홀랜드를 따라 재구성한 추정 연대표이다.

 

15일 전  테르미를 떠난 페르시아 지상군

약 13일 전  페르시아 정찰 함대가 스키아토스에 도착했다. 연합군은 칼키스로 후퇴했다.

4일 전  테르모필라이에 도착한 페르시아군. 페르시아 함대가 테르미에서 출항했다.

3일 전  폭풍우 첫날

2일 전  폭풍우 둘째 날

1일 전  폭풍이 그쳤다. 연합군 함대가 아르테미시온으로 귀환했다.

첫날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군이 공격한 첫날. 페르시아 함대가 아르테미시온에 도착했다. 에우보이아 주변에 페르시아 별동 함대를 보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의 첫 교전.

둘째 날  두 전투의 이틀째

셋째 날  두 전투의 사흘째. 테르모필라이의 후위가 측면 공격을 받고 격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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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군세

 

페르시아 함대

 

헤로도토스는 BC 480년 봄에 도리스코스에 집결한 페르시아 함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함대가 마그네시아 해안에서 폭풍을 맞은 후, 함대의 약 3분의 1이 손실되었다. 따라서 헤로도토스의 계산에 의하면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시온에서 약 800 척의 삼단노선을 보유했을 것이다.

 

총 1,207 척 - 시리아와 페니키아 300 척, 이집트 200 척, 키프로스 150 척, 킬리키아 100 척, 이오니아 100 척, 폰토스 100 척, 카리아 70 척, 아이올리스 60 척, 리키아 50 척, 팜필리아 30 척, 소아시아의 도리아인 30 척, 키클라데스 17 척

 

그리스 함대

 

헤로도토스는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 그리스 함대에 280 척의 배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부대가 구성되었다(괄호 안의 숫자는 펜테콘테로스를 가리키며, 다른 함선은 모두 삼단노선이다).

 

총 271 척(9 척) - 아테나이 127 척, 코린토스 40 척, 아이기나 18 척, 칼키스 20 척, 메가라 20 척, 시키온 12 척, 스파르타 10 척, 에피다우로스 8 척, 에레트리아 7 척, 트로이젠 5 척, 타 스티라 2 척, 케오스 (2 척), 로크로이 오폰티오이 (7 척)

 

아테네인은 표면상으로는 아이기나와의 계속되는 분쟁 때문에 BC 483년부터 대규모 함대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에 의해 시작된 이 구축 역시 페르시아와의 장래에 있을 갈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아테네인은 처음에는 연합군 함대의 지휘권을 요구했지만,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파르타의 에우리비아데스가 함대를 지휘하도록 했다.

 

선수에 달린 청동 램 / 디에크플로스. 일렬로 적함 사이를 통과하여 측면으로 충돌했다 / 원형 대형을 묘사한 이미지들

 

전략적 및 전술적 고려 사항

 

전략적으로 연합군의 임무는 간단했다. 함대는 테르모필라이에 있는 군대의 측면을 보호할 필요가 있었지만, 스스로 차단되지는 않아야 했다. 페르시아의 경우 전략적인 상황은 비록 더 많은 선택권이 있지만 똑같이 단순했다. 그들은 테르모필라이나 아르테미시온 중 한 곳을 강제로 통과하거나 (연합군의 활동을 위해 둘 다 보유해야 했기 때문에) 어느 한 위치를 우회할 필요가 있었다.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우회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에우보이아의 동쪽 해안을 항해함으로써 테르모필라이를 우회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아르테미시온에서의 그리스군의 위치는 그러한 시도를 감시하기 위해 선택되었을지도 모른다. 해협의 협소함만이 유일한 결정 요인이었다면 연합군은 히스티아이아 근처에서 더 나은 위치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페르시아 함대는 연합군보다 더 많고 "더 나은 항해"를 하는 배들을 보유하면서 상당한 전술적 우위에 있었다. 헤로도토스가 언급하는 "더 나은 항해"는 아마도 선원들의 뛰어난 선박 조종술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아테네 배들은 (그리고 대부분의 함대) 새로 건조되었고 경험이 부족한 선원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해군의 전술은 충돌(선수에 램을 장착한 삼단노선)이나 함선 해병의 승선(해전을 육상 전투처럼 바꿨다)이었다. 페르시아인과 아시아계 그리스인은 이 시기에 디에크플로스로 알려진 기동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무엇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적함들 사이의 틈새로 항해한 다음 측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 기동은 숙련된 항해술이 필요했을 것이며 페르시아 함대가 그것을 사용할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전술을 특별히 개발했다.

 

헤로도토스는 연합군 함선이 더 무거웠으며 그 결과 기동성이 떨어졌음을 시사한다. 그들의 무게는 연합군 선박이 디에크플로스를 사용할 가능성을 더욱 감소시킬 것이다. 이 무거움의 원인은 불확실하다. 아마도 연합군 선박이 더 부피가 컸을 것이다. 또 다른 제안은 그 무게가 완전히 무장된 호플리테스 해병의 무게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이다. 연합군은 만약 그들의 배가 기동성이 낮았다면 추가 해병을 태웠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승선이 (배들을 더 무겁게 만드는 대가로) 그들이 이용 가능한 주요 전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로도토스는 그리스군이 배를 침몰시키기보다는 나포했다고 언급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의 주요 장소를 표시한 지도 / 아르테미시온 해전을 나타낸 지도

 

해전

 

첫날

 

페르시아 함대는 연합군 함대가 자신들을 향해 노를 젓는 것을 보고, 그들이 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뒤늦게 공격의 기회를 잡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재빨리 훨씬 더 작은 연합군 함대로 진격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 상황에 대한 전술을 고안해 냈는데, 거기서 그들은 "야만인에게 선수를 향하고, 중앙으로 함미를 모았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램들이 바깥 쪽을 가리키고 있는 원을 이루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펠로폰네소스 함대는 함미를 모은 원형 대형을 두 번 채택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는 실제로 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라젠비는 250 척의 배로 이루어진 원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펠로폰네소스 함대는 30~40 척의 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연합군은 페르시아 함선이 연합군 전선을 따라 항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날개를 뒤로 젖혀 초승달 대형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 어떤 경우든, 이 작전은 우수한 페르시아의 선박 조종술, 특히 디에크플로스의 사용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리 예정된 신호를 보내면서 이 진형을 취한 연합군 함선은 두 번째 신호에서 이 위치에서 갑자기 바깥쪽으로 이동하여 페르시아 함선으로 노를 저어 허를 찔렀다. 그들의 우월한 선박 조종술은 무너졌고, 페르시아 함대는 30 척의 함선이 나포되거나 침몰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겪었다. 전투 중에 렘노스의 안티도로스가 함장인 그리스 배가 연합군으로 망명했다. 해질녘이 되자 연합군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나아진 상태로 전투가 끝났다.

 

밤중에 또 다른 폭풍이 몰아쳐 (이번에는 아마도 남동풍과 함께 천둥을 동반한 폭풍일 가능성이 있음) 연합군이 에우보이아 바깥쪽에 보내진 페르시아 별동대에 대응하기 위해 남쪽으로 출발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폭풍은 페르시아의 별동대 선박을 강타하여 항로를 벗어나 에우보이아의 움푹 꺼진 바위 해안으로 몰아갔다. 따라서 페르시아 함대의 별동대 또한 난파되어 대부분의 배를 잃었다.

 

에우보이아 동부 해안에서 난파된 페르시아 함대, 19세기 作 / 에우보이아의 동부 해안 '할로우스'(움푹 꺼진)

 

둘째 날

 

테르모필라이 전투 이틀째이기도 한 다음 날, 페르시아 함대는 이제 두 번의 폭풍으로부터 회복하고 연합군 함대에 대한 공격을 거부하는 대신 함대를 다시 항해할 수 있게 하려고 시도했다. 에우보이아 앞바다에서 난파되었다는 소식은 그날 연합군에 도착했고, 아테네에서 53 척의 선박을 증파했다.

 

다시 늦은 오후까지 기다린 연합군 함대는 밤이 깊어지자 후퇴하기 전에 킬리키아 순찰선을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배들은 에우보이아 주변에 보내진 난파된 별동대의 살아남은 선박이거나, 아마도 따로 떨어진 항구에 정박해 있었을 것이다.

 

셋째 날

 

전투의 3일째에 페르시아 함대는 연합군 전선을 전면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페르시아 함대가 집결하는 것을 보고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최대한 봉쇄하려고 시도했고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페르시아 함대는 배를 반원형으로 형성해 연합군 함대를 포위하려고 시도했고, 연합군은 노를 저어 전투에 참가했다. 하루 종일 전투가 치열 해졌고 연합군은 전선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마침내 해질녘에 함대가 해산했을 때, 양측은 대략 동등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더 작은 규모의 연합군 함대는 그러한 손실을 거의 감당할 수 없었다. 아테네 함대(함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절반이 손상되거나 손실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테네인은 연합군에서 최고의 전사였다. 아케메네스 측에서는 그리스 호플리테스에 버금가는 무거운 장비를 착용하고 그리스 선박 5척을 완파한 이집트인이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

 

"해전에서 모든 크세르크세스의 전사들 중 이집트인이 가장 잘 싸웠다. 훌륭한 솜씨로 무기를 다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배 다섯 척과 그 선원들도 모두 거느렸다. 그날, 그리스인 가운데서, 아테네인이 가장 잘 버텼고, 알키비아데스의 아들 클리니아스는 이백 명의 병사와 자신의 배 한 척을 직접 이끌고 전쟁에 나갔다."

 

아르테미시온으로 돌아온 연합군은 입은 손실 때문에 하루 더 전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테르모필라이로부터 소식을 기다리는 동안 아르테미시온에서 철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에우보이아인의 양 떼를 도살하고 고기를 굽도록 명령했다. 테르모필라이에서 연락선이 도착하여 아브로니코스가 연합군에게 테르모필라이에서 연합군의 후위가 격파된 소식을 알렸다.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장악하는 것은 더 이상 전략적 목적을 갖지 못했으며, 그들의 손실을 감안하여 연합군은 즉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스 호플리테스 해병의 모습 / 이집트 호플리테스라 불린 중장보병

 

의의

 

아르테미시온은 그 자체로 볼 때 비교적 대수롭지 않은 전투였다. 연합군은 페르시아 해군을 물리치지도 않았고, 그리스 해안을 따라 더 나아가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반대로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 함대를 파괴하지도 않았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그리스 함대를 약화시키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해전은 어느 쪽도 만족하지 못하고 뚜렷한 결과를 내놓지 못한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의 넓은 맥락에서, 연합군에게 매우 중요한 해전이었다. 연합군은 페르시아 해군에 맞설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였고, 심지어 어떤 충돌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 많은 연합군 승무원들에게는, 첫 전투를 맛본 것이었고, 그 경험은 다가오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게다가, 아르테미시온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싸우면서 그리스 제독들이 페르시아 함대가 어떻게 성능을 발휘하는지 볼 수 있게 해 주었고, 어떻게 패배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그들에게 주었다. 또한 아르테미시온 이전과 기간 동안의 사건들은 페르시아 함대의 규모를 줄이는 데 결정적이었는데(군사 행동으로 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연합군이 직면한 역경이 압도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 핀다로스의 표현대로 아르테미시온은 "아테네인의 아들들이 빛나는 자유의 초석을 놓은 곳"이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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