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741년 레온 3세 이사우로스
레온 3세 이사우로스는 695년에서 717년 사이 비잔틴 제국에서 여러 황제가 바뀌는 거대한 불안정 기간이었던 20년간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켰다. 그는 또한 우마이야 왕조의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성상 숭배를 금지했다.
716년 우마이야의 지휘관 마슬라마는 소아시아를 침공했다. 레온 3세는 그들을 속이고 진격을 늦췄다. 소아시아 서부 해안에서 겨울을 난 아랍군은 717년 초여름 트라키아로 건너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오스 2세 시절에 이미 도시는 강화되었고 식량이 비축되었으며 해군이 재건되었다.
함대와 합류한 아랍군은 육상과 해상 양쪽에서 도시를 포위했다. 비잔틴 함대가 그리스의 불로 아랍 함대를 공격하고 골든 혼의 입구를 사슬로 막아버리자 아랍 함대는 비잔틴 함대와 교전하기를 꺼리면서 콘스탄티노플 북쪽의 소스테니온 항구로 철수했다. 해상에서의 패배로 아랍군은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굶주림과 질병이 만연했다. 아랍군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불가리아 영토로 향했지만 불가르군에게 격퇴되었다.
새로운 칼리파 우마르 2세가 이집트와 아프리카에서 대함대를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보냈지만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던 선원들이 비잔틴으로 귀순했다. 선원 부족으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랍 함대는 그리스의 불 공격을 받고 무력해졌으며 싣고 온 무기와 보급품은 유실되거나 빼앗겼다. 718년 8월 15일, 13개월의 공방전 끝에 아랍군은 철수했고 아랍 사료에 따르면 총 15만 명의 무슬림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레온 황제가 개편한 테마. 아랍군을 물리친 황제는 장기간의 혼란으로 흐트러진 행정부를 통폐합했다. 718년에는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세금의 선납 제도를 폐지하고 농노를 자유 소작민으로 격상했으며 726년에는 에클로가라는 새로운 법전을 편찬했다.
740년경 비잔틴의 동부 국경. 720년부터 재개된 아랍의 공세는 740년 벌어진 아크로이논(아나톨리아 중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미 아르다빌 전투에서 하자르 카간국에게, 파스 전투에서 튀르게시 카간국에게 패배한 우마이야 왕조는 과도하게 확장된 자원으로 인해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비잔틴은 하자르, 조지아와 동맹을 맺었다.
741-775년 콘스탄티노스 5세
콘스탄티노스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비잔틴 제국의 안전이 강화되었다.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서 콘스탄티노스는 이슬람 세계의 내전을 이용하여 아랍 국경에서 제한적인 공세를 펼쳤다. 동부 국경이 확보된 그는 발칸반도의 불가르족에 대한 반복적인 원정을 수행했다. 그의 군사 활동과 아랍 국경에서 트라키아에 기독교인을 정착시키는 정책은 발칸 영토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더욱 안전하게 만들었다. 종교적 갈등과 논쟁은 그의 치세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성상 파괴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수도원 주의에 대한 반대는 후대 비잔틴 역사가들과 작가들이 그를 비방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그를 똥을 의미하는 코프로니모스 또는 코프로니무스라고 폄하했다.
741/742년 6월-743년 11월 2일 아르타라바스도스
아르타바스도스는 라틴식으로 이름을 지은 아르메니아 혈통의 비잔틴 장군으로 콘스탄티노스 5세에 대한 찬탈 행위를 했다.
741/742년 6월-743년 11월 2일 니케포로스
니케포로스는 그의 아버지 아르타바스도스가 황위를 찬탈한 뒤 즉위했다. 콘스탄티노스는 743년 11월 2일 다시 권력을 쟁취하여 아르타바스도스, 니케타스, 니케포로스의 눈을 멀게 하고 코라 교회에 감금했다.
745년 비잔틴 제국. 742년 6월, 콘스탄티노스가 우마이야에 맞서 동쪽으로 향하고 있을 때 황제의 손위 누이 안나의 남편 아르타바스도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아모리온으로 피신한 콘스탄티노스는 743년 5월 사르디스에서 아르타바스도스에게 승리했다. 11월 초, 수도에 입성한 콘스탄티노스는 반대파를 숙청하고 도주한 아르타바스도스와 아들들을 붙잡아 민중 앞에서 눈을 멀게 하고 코라 수도원에 감금했다.
콘스탄티노스는 그의 아버지 레온 3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를 지지했다. 황제는 신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에 의문을 가졌다. 그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형상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성인 숭배에 비판적인 그의 치세가 끝날 무렵에는 성유물과 성인을 위한 기도 또한 이단으로 낙인찍거나 매우 의심스러워했다.
750년 비잔틴 제국. 746년 콘스탄티노스는 시리아를 침공하여 게르마니케이아를 점령하고 키프로스를 탈환했다. 내전으로 750년에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 반도로 축소되고 아바스 칼리파국이 대신했다. 황제는 지속적으로 시리아를 침공하여 그 지역의 인구를 트라키아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는 인구가 희박한 곳으로 만들어 아랍의 보급을 어렵게 하고 아나톨리아의 안전을 강화시켰다. 757년에 아랍과의 휴전이 이루어졌다. 755년 랑고바르드의 왕 아이스툴프는 라벤나를 점령하여 2세기가 넘게 유지된 비잔틴의 지배를 끝냈다. 이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프랑크의 왕 피피누스 3세에게 보호를 호소했다.
트라키아에 인구가 유입되자 이를 우려한 불가리아와 비잔틴 제국은 755년에 충돌했다. 불가리아가 아나스타시우스 장벽까지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마르켈라이(마켈리)에서 비잔틴군이 승리했다. 759년 불가르군이 승리했지만 이를 이어가지 못했다. 762년 콘스탄티노스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슬라브족과 전쟁을 수행했고 일부 슬라브족은 불가리아 지배 지역에서 비잔틴 아나톨리아로 이주했다. 이듬해, 황제는 9,600의 기병과 일부 보병을 이끌고 안키알로스(포모리에)에서 칸 텔레츠를 물리치고 많은 귀족을 포로로 붙잡아 콘스탄티노플 금문 밖에서 학살했다. 텔레츠는 이 패배로 인해 살해되었다. 765년에는 왕위 계승 후보자 토크투가 죽고 도주하던 파간은 노예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콘스탄티노스의 계속된 공세와 승리로 불가리아는 상당한 불안정을 겪었고 6명의 군주가 전쟁에서 패배하여 왕위를 잃었다. 그는 원정 중 재발한 종기로 인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오던 중 775년 9월 14일 사망했다.
775-780년 레온 4세 하자르
레온 4세 하자르는 750년 콘스탄티노스 5세와 하자르 출신의 치차크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듬해인 751년에 카이사르로 승격되었고, 768년에 아테네의 이리니와 결혼했다. 775년 9월 불가리아에 대한 원정을 하던 중 콘스탄티노스 5세가 사망하자 레온 4세는 775년 9월 14일 수석 황제가 되었다. 778년 레온은 아바스 왕조의 시리아를 침공하여 게르마니케이아 외곽에서 아바스 왕조 군대를 격퇴시켰다. 레온은 780년 9월 8일 결핵으로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노스 6세가 즉위했으나, 섭정을 맡은 황후 이리니에게 통치가 넘어갔으며 이리니는 나중에 여제가 되었다.
780년경 비잔틴 제국의 동부 국경. 778년 레온은 아바스 왕조를 공격하여 게르마니케이아를 포위하고 주변 지역을 습격했다. 아랍 영토에 살던 많은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 트라키아로 이주되었다. 779년 아바스 왕조는 소아시아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레온 4세는 이듬해인 780년 9월 8일 결핵으로 인한 고열로 사망했다.
780-797년 콘스탄티노스 6세
콘스탄티노스 6세는 레온 4세의 외아들로 776년 5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공동 황제가 되었고, 780년 9세의 나이에 그의 뒤를 이어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 이리니는 790년까지 총리 스타우라키오스의 도움을 받아 섭정으로서 그를 통제했다. 콘스탄티노스가 성숙함에 따라 섭정은 끝났지만 이리니는 통치에 계속 참여하려고 했다. 콘스탄티노스는 몇 년 동안 단독 통치를 한 뒤 792년 어머니를 공식 통치자로 삼았다. 콘스탄티노스는 군사적 패배를 겪었고 그의 정부 테오도테와 불법적으로 결혼하는 등 논란이 많은 결정을 내렸다. 이리니는 아들의 인기가 없는 것을 이용하여 797년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폐위하고 눈을 멀게 만들어 투옥시켜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의 첫 번째 여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그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콘스탄티노스 6세는 동방에서 다스리던 로마 제국과 교황권, 교황이 종주권을 쥐고 있던 서유럽 열강들에게 인정받은 로마 황제로서 보편적으로 인정된 마지막 통치자였다. 아랍 정복 이후 교황권을 보호하던 비잔틴 제국의 능력은 약화되었고, 교황청은 점점 더 프랑크인에게서 보호를 구하게 되었다. 이는 800년 프랑크인에게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빚진 교황 레오 3세가 카롤루스(샤를마뉴) 대제를 '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여성이 그 자체로 여제가 될 수 없다는 주장에 기초하여, 이것은 동방에서 독립한 새로운 정치의 토대가 되었고, 이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797-802년 이리니
사란타피카니아라는 성을 가진 이리니는 레온 4세의 황후(775-780년)였으며 어린 콘스탄티노스 6세가 성장하는 동안 780-790년까지 섭정을 했다. 792-797년까지 공동 통치 황후였고 797년부터 802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단독 통치자이자 첫 번째 여제를 지냈다. 정치적으로 저명한 사란타페코스 가문의 일원으로, 그녀는 768년 알 수 없는 이유로 레온 4세의 신부로 선택되었다. 남편이 우상 파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상숭배자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있었다. 섭정 시절인 787년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성상 파괴주의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제1차 성상 파괴 시대(730-787년)를 종식시켰다. 이리니의 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성숙해지면서 그는 어머니의 영향 아래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790년대 초, 몇몇 반란이 그를 단독 통치자로 선언하려고 했다. 이러한 반란 중 하나는 성공했지만, 792년 이리니는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모든 제국 권력에 다시 세워졌다. 797년 이리니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아들의 눈을 도려내고 심한 불구로 만드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투옥되었고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것이다. 그가 물러나자, 이리니는 자신이 유일한 통치자라고 선언했다. 이리니는 로마 제국의 여성 통치자라는 전례가 없는 지위를 얻었고, 이에 따라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성탄절에 여성은 통치를 할 수 없고 로마 제국의 황좌는 사실상 공석이라는 이유를 대며 카롤루스 대제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포했다. 802년 반란이 일어나 전복되어 이리니는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었으며 니케포로스 1세가 황위에 올랐다. 이리니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유배 중에 사망했다.
콘스탄티노스는 건전한 통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792년 마르켈라이 전투에서 비잔틴군은 불가리아의 칸 카르담에게 패배했다. 황제는 그의 숙부 니케포로스의 지지도가 올라가자 숙부의 눈을 뽑고 아버지의 이복형제 네 명의 혀를 잘라냈다. 793년 아르메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잔혹하게 진압했다. 그는 정실부인과 이혼하고 불법적으로 여겨지는 정부와 결혼하여 인기가 바닥을 쳤다. 797년 8월 19일 콘스탄티노스는 모친의 수하들에게 붙잡혀 장님이 되어 감금되었으며 입은 상처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을 것이다.
800년경의 지중해 세계. 이리니는 781년 카롤루스 왕조의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와 세 번째 부인 힐데가르드의 딸 로트루데를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약혼시켰지만 787년에 이 약혼을 파기했다. 782년 아바스 왕조가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자 그녀는 아랍에 공물을 지급하고 물러가게 했다. 같은 해 환관 스타우라키오스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족을 진압하고 제국 확장의 토대를 마련했다. 787년에는 성상 숭배를 부활시켜 동방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을 재통합했다. 797년 아들 콘스탄티노스를 몰아내고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798년 아바스의 공세가 다시 이어져 그들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교황은 800년 성탄절에 카롤루스 대제에게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거행하고 그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했다. 802년 10월 31일, 귀족의 음모로 그녀는 폐위되고 재무장관 니케포로스가 황제로 등극했다. 그녀는 레스보스 섬에 유배되어 양털로 실을 뽑아 생계를 꾸려야 했고 이듬해 8월 9일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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