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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중세로마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4편 20년의 혼란

by 금곡동로사 2021.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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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0년대 비잔틴 제국의 영토. 680년에 일어난 아랍의 내전(피트나)으로 동쪽 국경의 압박이 줄어들어 비잔틴 제국은 상대적인 평온을 누리게 되었다.

 

 

695-698년 레온티오스

레온티오스 또는 레온티우스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소아시아 이사우리아에서 태어났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파트리키오스 칭호를 받았고 콘스탄티누스 4세 치세에 아나톨리아 테마의 스트라테고스가 되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 치세 초기에 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우마이야 칼리파 압드 알 말릭 이븐 마르완이 평화 조약을 맺도록 만들었다. 692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시 우마이야에 전쟁을 선포하고 레온티오스를 보내 그들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해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를 투옥시켰다. 그는 695년에 석방되어 그리스 남부에 있는 헬라스 테마의 스트라테고스 칭호를 받았다. 풀려난 후, 그는 유스티니아누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같은 해에 황제가 되었다. 레온티오스는 카르타고를 되찾기 위해 시작한 원정에 실패했으며 697년에 이 원정에 참여한 드룬가리오스 아프시마르에게 전복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아프시마르는 티베리우스 이름을 얻었고 레온티오스의 코와 혀를 잘랐다. 그는 달마투 수도원으로 보내져 705년 8월부터 706년 2월까지 머물렀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가 왕위를 되찾으면서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우스를 처형했다.

 

아랍 세력의 서쪽 확장. 레온티오스는 즉위 후, 온건한 정책을 취해 군대의 활동을 제한하고 국경의 소규모 기습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았으며 내부의 통합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란이 끝난 아랍은 다시 정복을 시작하여 696년 아프리카 총독부를 공격했고 697년에는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황제는 파트리키오스 요안네스가 이끄는 원정군을 파견했고 요안네스는 급습을 통해 도시를 탈환했다. 하지만 곧 우마이야 증원군이 도착하여 카르타고를 탈환하고 요안네스는 크레타로 물러났다. 레온티오스의 처벌을 두려워한 한 장교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드룬가리오스 아프시마르를 황제로 선포하고 선단을 모아 녹색당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다. 몇 달간의 포위 끝에 698년 2월 15일경 티베리우스는 승리하여 레온티오스의 코를 자르고 수도원에 감금했다.

 

 

698-705년 티베리우스 3세 아프시마르

티베리우스 3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키비라이오트 테마의 중급 지휘관인 드룬가리오스와 그의 출생명이 아프시마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696년 티베리우스는 아랍 우마이야 왕조에 점령당한 아프리카 총독부의 카르타고를 탈환하기 위해 비잔티움 황제 레온티오스가 파견한 파트리키우스 요안네스가 이끄는 군대의 일원이었다. 도시를 탈환한 후, 원정군은 우마이야 지원군에게 밀려 크레타 섬으로 퇴각했다. 일부 장교들이 레온티오스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요안네스를 죽이고 티베리우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티베리우스는 재빨리 함대를 모아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으며 레온티오스를 퇴위시켰다. 티베리우스는 우마이야로부터 비잔틴 아프리카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지만, 동쪽 국경을 따라 그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705년 레온티오스에 의해 폐위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슬라브족과 불가르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여 비밀리에 입성한 후 티베리우스를 폐위시켰다. 티베리우스는 비티니아로 도망갔지만, 몇 달 후 붙잡혀 705년 8월에서 706년 2월 사이에 참수당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 바다에 던져졌지만 나중에 회수되어 프로테 섬의 교회에 묻혔다.

 

700년 당시의 정세. 티베리우스는 비잔틴 아프리카를 탈환하려는 시도보다 제국의 동쪽 국경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는 형제 헤라클리우스를 아나톨리아 테마들의 모노스트라테고스(스트라테스고들의 수장)로 임명했다. 헤라클리우스는 698년 늦가을에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킬리키아로 진격하여 안티오키아에서 보낸 아랍군을 격파하고 사모사타를 급습한 뒤 699년 봄에 비잔틴 영내로 철수했다. 이로 인해 아랍은 비잔틴 아르메니아의 나머지 지역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지만 702년 아르메니아에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704년 압달라 이븐 압드 알 말릭이 아르메니아 탈환을 시작했지만 킬리키아에서 헤라클리우스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그는 시시움에서 아랍군을 격파하고 소수의 생존병을 노예로 삼았다. 

 

650-850년의 하자르 카간국 영역. 티베리우스가 시칠리아 테마와 사르데냐 테마를 신설하여 아랍에 대한 해상 방위를 강화하고 있는 동안, 693년 케르손에서 탈출한 유스티니아누스는 하자르의 카간 부시르의 지지를 얻고 그의 누이 테오도라를 신부로 주었다. 703년 티베리우스가 복권을 꿈꾸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소식을 들었지만 그의 손길을 피하면서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가리아의 칸 테르벨에게 지원을 구했다. 705년 여름, 유스티니아누스는 슬라브족과 불가르족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여 도시를 점령하고 도주한 티베리우스를 붙잡았다. 705년 8월에서 706년 2월 사이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우스를 히포드롬에 끌고 가 공개적으로 굴욕을 주었으며 이후 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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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5-711년 11월 4일 유스티니아누스 2세

복위한 황제는 불가리아 왕국과 칼리파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만 실패했으며 국내에서는 잔혹한 진압을 시행했다. 잘린 코는 금으로 만들어 가렸다고 한다. 반란이 일어나 군대를 보냈지만 진압군은 반군에 합류하여 수도를 점령했다. 711년 11월, 유스티니아누스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그의 머리는 로마와 라벤나에 효시되었다.

 

 

 

 

 

 

 

 

705-711년 11월 4일 티베리우스

때때로 티베리우스 4세로 열거되는 티베리우스는 70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2세와 하자리아의 테오도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그는 706년부터 711년까지 그의 아버지 유스티니아누스 2세와 함께 비잔틴 제국의 공동 황제를 지냈다. 두 사람 모두 711년 바르다네스가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을 때 살해되었다. 티베리우스가 죽은 후, 두 명이 그를 흉내 냈는데, 그중 한 명인 바시르는 우마이야의 칼리파 히샴 이븐 압드 알 말릭이 음모를 꾸민 것으로, 그는 거짓말이 발각되어 십자가형을 당했다.

 

705년 불가리아 제국. 708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칸 테르벨을 배신하고 불가리아를 침공했지만 패배하고 안키알루스(포모리에)에서 봉쇄되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비잔틴은 다시 불가리아와 화친을 맺었다.

 

710년 비잔틴 제국. 709-711년 아랍은 카파도키아를 침공하여 여러 도시를 손에 넣었다. 유스니티아누스는 교황 요한 7세에게 퀴니섹스툼 공의회의 결정을 인정하라고 명하고 709년 파트리키오스 테오도루스를 보내 라벤나를 응징하여 새로운 교황 콘스탄티누스가 710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했다. 그는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이스탄불에 방문하기 전까지 이 도시를 찾은 마지막 교황이 되었다. 케르손에서 반란이 일어나 필리피코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수도를 점령하여 711년 11월, 유스티니아누스는 처형되어 로마와 라벤나에 효시되었다. 아들 티베리우스도 살해되어 헤라클리우스의 혈통은 근절되었다.

 

 

711년 11월 4일-713년 6월 3일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

필리피코스 또는 필리피쿠스의 본명은 바르다네스로 페르가몬의 아르메니아계 귀족 니케포루스의 아들이다. 안소니 칼델리스는 그가 페르시아 혈통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저항한 첫 반란에서 단의론 파의 지지를 입어 황위에 오르는 시늉을 냈다. 이로 인해 케팔로니아로 좌천된 그는 이후 유스티니아누스의 명으로 케르손으로 유배되었다. 이곳에서 바르다네스는 필리피코스라는 이름으로 하자르인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도주한 유스티니아누스를 붙잡아 참수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들 티베리우스와 바라스바쿠리오스와 같은 선제의 주요 장교들도 살해되었다.

 

 

713년 6월 4일-715년 11월 아나스타시우스 2세 아르테미오스

아나스타시오스의 본명은 아르테미오스(아르테미스의 남성형)로 황제의 관료이자 비서(아세크레티스)를 지냈다.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가 필리피코스 황제를 타도한 후 그들은 아르테미오스를 황제로 칭송했다. 그는 아나스타시오스를 황제 이름으로 선택했다. 즉위 직후 그는 군대 규율을 강화하고 필리피코스를 전복한 일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장교들을 처형했다. 또한 황제는 제6차 세계 공의회 결정을 지지하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요안네스 6세를 폐위시키고 715년 정교회 총대주교 게르마누스로 대신했다. 이는 카톨릭 교회와의 짧은 지역 분열을 종식시켰다.

 

 

715년 5월-717년 3월 25일 테오도시우스 3세

테오도시우스 3세 또는 테오도시오스 3세는 권력을 잡고 비잔틴 제국의 황좌를 차지하기 전에 아드라미티움에서 세금 징수원으로 있었다. 715년 비잔틴 해군과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는 아나스타시오스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꺼려하는 테오도시우스를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로 칭송했다. 테오도시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715년 11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아나스타시오스는 몇 달이 지나도록 항복하지 않았고, 안전을 대가로 수도원으로의 유배를 받아들였다. 많은 테마는 테오도시우스가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 특히 아나톨리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 이사우리아인 레오와 아르메니아콘 테마의 스트라테고스 아르타바스도스의 꼭두각시라고 믿었으며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레오는 716년 여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이슬람 제국 우마이야 칼리파국과 동맹을 맺었다. 테오도시우스는 테르벨 칸(재위 700-721년)이 이끄는 불가리아인과 동맹을 맺어 트라키아에 확고한 국경을 설정하고 자고레 지역을 불가리아인에게 양도했으며 불가리아인에 대한 공물 지급을 규정했다. 레오 2세는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여 니코메디아를 점령하고 테오도시우스의 아들을 포함한 많은 관리를 포로로 잡았다. 717년 봄 테오도시우스는 게르마누스 총대주교와 비잔틴 원로원의 권고를 받아들여 레오와 협상을 벌여 자신이 퇴위하고 레오를 황제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레오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여 717년 3월 25일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테오도시우스와 그의 아들이 수도원으로 은퇴하는 것을 허락했다. 테오도시우스는 에페소스의 주교가 되어 754년 7월 24일에 사망했다.

 

712-717년 비잔틴 제국. 712년 불가리아의 칸 테르벨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외곽까지 약탈했다. 필리피쿠스가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를 발칸반도의 감시를 위해 이동시키자 우마이야의 알 왈리드 1세가 약화된 소아시아의 방어를 가로질러 침입했다. 713년 5월 말, 옵시키온 군대가 트라키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6월 3일, 도시에 진입한 여러 장교가 히포드롬에 있던 필리피코스의 눈을 멀게 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가 황제로 선포되고 같은 해, 필리피코스가 죽었다. 714년 우마이야군이 갈라티아까지 침투하여 아나스타시우스는 수도의 성벽을 보강하고 로마 함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이사우리아인 레오가 이끄는 군을 시리아를 향해 보냈고 함대는 로도스에 파견했다. 아나스타시우스의 엄격함에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요안네스 제독을 죽이고 세금을 적게 징수한 테오도시우스 3세를 황제로 선포했다. 6개월간의 공방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어 니케아로 도주한 아나스타시우스는 항복하고 테살로니키의 수도원에 은거하게 되었다. 716년 술라이만이 이끄는 아랍군이 아모리움을 포위하고 카파도키아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레오는 술라이만에게 많은 양보를 하여 그들이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니코메디아를 점령하고 테오도시우스의 아들을 붙잡은 레오는 크리소폴리스로 진군했다. 717년 3월 25일 권력을 장악한 레오가 즉위하고 테오도시우스와 그의 아들은 수도원에 은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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