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2-811년 니케포로스 1세
니케포로스 1세는 811년 플리스카 전투에서 전사했다. 즉위하기 전에는 로고테티스와 게니코스 또는 게니쿠스로 불리기도 하는 게니코스 로고테티스(재무장관)를 지냈다.
802년 비잔틴 제국. 셀레우키아 시데라 출신의 파트리키 니케포로스는 귀족들과 환관들의 도움으로 이리니를 몰아내고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발칸반도에 새로운 테마를 조직하고 국경을 강화했다. 군대 양성을 위한 제국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 엄격하게 세제를 통제했다.
810년 비잔틴 제국. 니케포로스는 프랑크 왕국과 조약을 맺었지만 관계가 악화되어 806-810년 베네치아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807년 베네치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프랑크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이 분쟁은 황제가 죽은 후 해결되어 베네치아,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해안, 남이탈리아는 비잔틴에 속하고 로마, 라벤나, 펜타폴리스(이탈리아 아드리아 연안의 다섯 도시)는 프랑크에 속하게 되었다.
니케포로스는 이리니가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아바스와 전쟁을 벌였다. 805년 프리기아의 크라소스에서 크게 패한 황제는 806년 무슬림의 13만 5천 대군이 쳐들어오자 5만 노미스마타를 지불하고 다시 조약을 맺어 매년 3만 노미스마타를 지불하기로 했다. 809년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가 사망하고 승계 투쟁이 벌어짐에 따라 비잔틴은 불가리아 문제에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803-814년 불가리아 칸 크룸의 확장. 칸 크룸이 세르디카(소피아)를 점령하자 811년 니케포로스는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크룸을 두 차례 격파하고 수도 플리스카를 약탈했다. 불가르군이 고갯길에서 매복해 철수하던 비잔틴군을 격파하였고 니케포로스는 전사했다.
불가리아의 칸 크룸은 전사한 니케포로스 황제의 목을 베어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고 한다.
811년 7월 26일-10월 2일 스타우라키오스
스타우라키오스는 790년대 초, 아마도 791년에서 793년 사이에 니케포로스 1세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802년 니케포로스는 이리니로부터 비잔틴 제국의 황좌를 빼앗았고, 803년 12월 스타우라키오스를 공동 황제로 승격했다. 811년 7월 26일 니케포로스가 플리스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타우라키오스는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로 추대되었다. 그의 치세는 척추가 절단된 것을 포함한 그의 상처를 둘러싼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짧았다. 그는 811년 10월 2일 처남 미카엘 1세 랑가베에게 쫓겨났다. 권좌에서 물러난 후, 그는 수도원으로 보내져 812년 1월 11일 괴저 또는 독살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811년 10월 2일-813년 7월 11일 미하일 1세 랑가베
미하일 1세 랑가베는 에게 해 함대의 제독인 파트리키 테오필락트 랑가베의 아들이다. 그는 훗날 황제가 된 니케포로스 1세의 딸 프로코피아와 결혼하였으며 802년 장인이 즉위한 후 최고 궁정 칭호인 쿠로팔라테스를 받았다.
811년 10월 2일-813년 7월 11일 테오필락토스
테오필락토스는 미하일 1세 랑가베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였다. 그는 타도된 후 거세되어 유스타티우스로 이름이 바뀌어 수도사 신분으로 플라테 섬에 유배되었다.
황제가 된 미하일 1세는 엄격한 세금 정책을 버리고 군대와 관료, 교회에 아낌없이 돈을 뿌렸다. 812년 프랑크와 협상을 하여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의 황제가 아닌 임페라토르이자 바실레오스로 인정하고 베네치아를 돌려받았다. 불가리아에 공세를 취한 황제는 그들의 도시 메셈브리아(네세바)를 점령했다. 813년 6월, 아드리아노플 근처의 베르시니키아에서 비잔틴군이 패배했다. 813년 7월 11일, 미하일은 레온에게 양위하고 수도사가 되어 844년 1월 11일에 타계했고 아들 테오필락토스는 849년 1월 15일에 사망했다.
813-820년 레온 5세 아르메니아스
고위 장군이었던 레온 5세는 선황 미하일 1세 랑가베를 퇴위시키고 즉위했다. 그는 불가리아와의 10년 전쟁을 끝내고, 제2차 비잔틴 성상 파괴 시대를 시작했다. 그는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장군 중 한 명인 미하일 아모리우의 지지자들에게 암살당했으며 미하일이 그의 뒤를 이었다.
813-820년 콘스탄티노스
심바티오스 또는 심바테스는 레온 5세의 장남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대관식 이후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이름을 콘스탄티노스로 바꿨다. 그는 820년 퇴위되어 프링기포니시아(영주들의 제도)의 프로테 섬으로 유배되었다.
813년 비잔틴 제국. 레온 5세는 814년 크룸이 사망하자 메셈브리아에서 불가르군을 물리치고 815년 30년의 평화 조약을 맺었다. 815년 황제는 성상 파괴 정책을 부활시켜 많은 재산을 압류했다.
프링기포니시아(군주들의 제도). 비잔틴 제국의 정권이 전복될 때마다 수많은 황족이 이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유배되었다. 레온 5세가 미하일을 음모 혐의로 투옥시키자 그는 레온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820년 성탄절, 레온이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성가대원으로 위장한 암살자들이 그를 공격했다. 제단의 무거운 십자가로 방어하던 황제는 팔을 시작으로 신체가 절단되었다. 암살자들이 미하일을 감옥에서 꺼내어 그는 황제로 즉위했으며 레온의 가족 모두를 섬에 있는 수도원으로 유배 보냈다.
820-829년 미하일 2세 아모리우
말더듬이(트라블로스 또는 프셀로스)라는 별명을 가진 미하일 2세는 아모리움 태생의 군인으로 레온 5세와 함께 고위직에 올랐다. 그는 레온의 미하일 1세 타도를 도왔다. 하지만 그들의 사이가 틀어지자 레온은 미하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미하일은 음모를 꾸며 820년 성탄절에 레온을 암살했다. 직후 일어난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은 황제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824년 봄까지 완전히 진압하지 못했다. 통치 후반기에는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이 시작되고 사라센에게 크레타를 상실하는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 주요 군사 재난이 있었다. 내적으로는 레온 5세 치세에 재개된 성상 파괴를 지지하고 강화했다.
7-11세기 무슬림과 비잔틴의 지중해 세력 다툼을 나타낸 지도. 미하일 2세가 즉위하자 그의 전우였던 슬라브인 토마스는 군을 이끌고 821년 12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미하일은 불가리아의 지원을 받아 823년 봄에 도시의 포위를 풀게 하고 10월에 토마스를 멈출 수 있었다. 약화된 제국은 824년 아랍의 크레타 정복을 막을 수 없었다. 아랍인은 827년에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라쿠사를 포위했고 황제는 829년 사망했다.
829-842년 테오필로스
테오필로스는 아모리우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자 성상 파괴주의를 지지한 마지막 황제이다. 테오필로스는 831년에 시작된 아랍과의 긴 전쟁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834-835년경 콘스탄티노스
콘스탄티노스가 조부 미하일 2세와 함께 새겨진 주화. 콘스탄티노스는 테오필로스의 아들로 그의 친척 안나, 아나스타시아, 그리고 장래의 미하일 3세도 출생 직후에 왕관을 썼기 때문에 그 역시 황제로 승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830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여 황제가 직접 방어했지만 패배하고 여러 요새를 잃었다. 831년 테오필로스는 대군을 이끌고 킬리키아의 타르수스를 점령했다. 831년 가을에는 카파도키아에서 패배했고 833년 같은 곳에서 다시 패배한 황제는 평화를 원했지만 이듬해 알 마문이 죽은 뒤 조약이 이루어졌다. 다시 관계가 악화되어 837년 7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 테오필로스는 멜리테네, 아르사모사타, 칼리파 알 무타심의 출생지 자페트라(소조페트라)를 점령하고 파괴했다. 838년 아바스군이 아나톨리아를 두 갈래로 침공하여 황제는 아프신의 군대를 다지몬에서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칼리파 알 무타심은 왕조의 요람 아모리움을 공격하여 838년 8월 12일 또는 15일에 점령하면서 복수를 달성했다. 839년 또는 840년에 아바스 왕조와 맞서기 위해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토후국과 동맹을 맺었다.
842년경 비잔틴 제국. 831년 팔레르모를 점령한 시칠리아 토후국은 점차 시칠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841년경 베네치아 공화국이 60 척의 갤리선(각 200명의 병력 수송)을 보내 크로토네에서 아랍인을 몰아내기 위해 지원했지만 실패했다.
836년 테오필로스는 불가리아와의 20년 평화 조약이 만료되자 불가리아 국경을 황폐화시켰다. 세르비아의 블라스티미르가 부족을 통합하자 황제는 세르비아의 독립을 허락했다. 이를 우려한 불가리아의 칸 프레시안 1세는 839년 세르비아 영토를 침공했다. 침공은 3년의 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블라스티미르가 승리했으며 842년 블라스티미르를 제국에 대한 의무에서 해방시킨 테오필로스의 죽음과 함께 전쟁은 끝났다.
842-867년 미하일 3세 메티소스
미하일 3세는 아모리우 왕조(또는 프리기아)의 세 번째이자 전통적으로 마지막 황제였다. 그는 후임 마케도니아 왕조의 적대적인 역사가들로부터 술주정뱅이(메티소스)라는 비하하는 별명을 얻었지만, 현대 역사 연구는 그의 치세가 9세기 비잔틴 제국의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의 명성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840년에 태어난 미하일 3세는 2세가 되던 해 부친이 사망하여 842년 1월 20일에 황제가 되었다. 제국은 모친 테오도라, 그녀의 숙부 세르기오스, 장관 테오크티스토스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843년에는 제2차 성상 파괴가 종식되었다. 황제의 허락하에 851년 11월 테오크티스토스가 살해되었고 856년 3월 15일에 숙부 바르다스와 페트로나스의 지원을 받아 섭정을 끝내고 857년 모친과 누이들을 수도원으로 유배 보냈다. 팜필리아와 시리아 국경에서 아바스 왕조에게 패배했지만 853년 해전에서 승리했다. 856년 페트로나스가 이끄는 비잔틴 원정군이 승리하여 동부 국경의 인구를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850년경 불가리아 제국. 855-856년에 비잔틴과 불가리아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불가리아가 동프랑크와의 전쟁에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자고라 지역을 포함하여 필리포폴리스(플로브디프), 데벨토스, 안키알로스, 메셈브리아 등 많은 도시를 탈환했다. 863년에는 모라비아의 개종을 확보하고 글라골 문자를 고안하여 슬라브 민족이 정통파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게 했다. 864년 불가리아의 칸 보리스 1세는 정통파 기독교로 개종하고 자고라 지역을 돌려받았다.
864년 비잔틴 제국. 미하일은 856-863년에 아바스 왕조의 토후국과 전쟁을 벌였고 857년에는 멜리테네의 에미르를 상대로 5만의 군대를 파견했다. 859년 직접 사모사타 공성전을 이끌었지만 860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루스인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원정을 중단했다. 863년 페트로나스는 랄라카온 전투에서 멜리테네의 에미르에게 승리하여 그를 죽였다. 황제는 866년 4월 마케도니아의 바실레이오스가 숙부 바르다스를 죽이도록 허락했다. 866년 5월 26일 바실레이오스는 나이가 더 어린 미하일 3세의 양자가 되었다. 867년 9월 24일 총애를 잃은 바실리스키아노스라는 인물이 술을 마시고 자고 있는 미하일의 양손을 자르고 심장을 찔렀다. 황제가 사망하자 바실레이오스가 그의 자리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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