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비잔틴 제국. 마우리키우스가 제국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포카스의 찬탈은 7세기 이슬람 세력이 발흥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610-641년 헤라클리우스
헤라클리우스의 권력 상승은 608년에 그의 아버지, 아프리카 총독 헤라클리우스가 인기 없는 찬탈자 포카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이끌었을 때 시작되었다. 헤라클리우스의 치세는 여러 번의 군사 캠페인으로 특징지어진다. 헤라클리우스가 집권한 해에, 제국은 여러 국경에서 위협을 받았다. 헤라클리우스는 즉시 602년부터 628년까지 벌어진 비잔틴-사산 전쟁을 지휘했다. 이 캠페인의 첫 번째 전투는 비잔틴의 패배로 끝났다. 페르시아 군대는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진군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뚫을 수 없는 성벽과 강력한 해군으로 보호되었고 헤라클리우스는 완전한 패배를 피할 수 있었다. 곧, 그는 군대를 재건하고 강화하기 위한 개혁을 시작했다. 헤라클리우스는 페르시아를 소아시아에서 몰아내고 그들의 영토 깊숙이 침투하여 627년 니네베 전투에서 그들을 결정적으로 물리쳤다. 페르시아의 왕 호스로 2세는 그의 아들 카바드 2세에게 전복되어 처형되었고, 카바드 2세는 곧 평화 조약을 요청하여 모든 점령 지역에서 철수하기로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극도로 긴장된 두 제국이 평화로운 관계로 회복되었다. 헤라클리우스는 새로 되찾은 많은 땅을 이슬람의 정복으로 잃었다. 아라비아 반도에서 나온 무슬림은 재빨리 사산 제국을 정복했다. 634년에 무슬림은 헤라클리우스의 동생 테오도루스를 물리치고 로마 시리아로 진군했다. 아랍인은 짧은 시간 내에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이집트를 정복했다. 헤라클리우스는 발칸반도에서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는 단의론이라 불리는 절충 교리를 장려함으로써 단성론에 관한 기독교 교회의 분열을 수습하려 했다. 동방 교회(통칭 네스토리우스 파로 불리는)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 결국 이 통합 프로젝트는 분쟁의 모든 당사자에게 거부되었다.
사산 제국의 최대 영토. 포카스의 찬탈 후, 사산 제국의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아들 테오도시우스를 주장하는 사람을 궁정에 두었다. 복권을 명분으로 비잔틴을 침공한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와 코카서스를 정복하고 611년에는 시리아를 정복하고 아나톨리아로 진입했다. 즉위한 헤라클리우스는 전쟁의 명분이었던 포카스를 타도한 것을 들면서 화해를 시도했지만 이미 많은 영토를 차지한 페르시아는 제안을 거부했다.
613년,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헤라클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패배하면서 권위는 붕괴되었고 615년, 페르시아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에 있는 칼케돈을 점령했다. 613년 유대인의 도움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614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617년 또는 618년에 이집트를 점령했다. 곡물을 공급하던 이집트가 정복되자 헤라클리우스는 무료 배급제를 폐지했다. 아바르와 슬라브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발칸반도를 유린했고 620년 또는 622년에 아나톨리아 중부의 안키라가 점령되었으며 622/3년에 로도스와 에게 해 동부의 여러 섬이 함락되자 헤라클리우스가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을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619년 창궐한 전염병으로 수입이 더 줄어든 상황에서 헤라클리우스는 급여를 반으로 줄이고 세금을 올렸으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모든 귀금속과 청동 기념물을 모으고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금도 벗겼다. 제국의 성직자들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싸울 의무를 선언했다. 황제는 페르시아에 집중하기 위해 아바르에게 금 20만 솔리디를 지불하기로 했다. 624년 약 2만 4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헤라클리우스는 아르메니아를 지나 코카서스로 향했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드빈을 파괴했다. 간자크에서 호스로가 이끄는 약 4만의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 월동을 하며 병력을 모은 로마군은 625년 티그라케르트에서 샤라플라칸과 샤힌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2월, 샤흐르바라즈가 매복을 위해 병력을 나눴을 때 헤라클리우스가 페르시아 본진을 기습하여 격파하고 샤흐르바라즈는 혼자서 겨우 탈출했다. 625년 킬리키아에서 샤흐르바라즈가 로마군에게 패배했지만 칼케돈으로 향할 수 있었고 헤라클리우스는 트레비존드에 머물렀다.
626년, 페르시아의 호스로는 샤흐르바라즈를 칼케돈으로 보내 아바르의 카간과 합동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비잔틴 해군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고 있어 페르시아는 군대를 보낼 수 없었다. 6월 29일, 약 8만 명의 아바르와 그 아래에 있던 스클라베니(슬라브족) 군대가 무거운 공성 병기를 이끌고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달간 계속되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총대주교 세르기우스가 성모 마리아상을 들고 성벽을 순회하면서 이교도들을 상대하고 있던 수비병들은 사기가 올라갔다.
아바르-슬라브와 페르시아 함대는 비잔틴 제국 함대를 상대로 각기 다른 해전에서 침몰하면서 포위망을 포기하고 달아났다. 8월 7일, 골든 혼을 넘어 해안 성벽을 공격하려는 슬라브군의 시도는 실패했고 파트리키 보누스의 갤리선이 슬라브 함선을 격파했으며 8월 6일과 7일에 시도한 아바르의 지상 공격도 실패했다. 테오도루스가 샤힌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아바르군은 발칸반도 내륙으로 후퇴했다. 샤흐르바라즈의 군대가 여전히 칼케돈에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위협은 끝났다.
626년, 코카서스에 기반을 둔 하자르족(서돌궐계 부족) 괵튀르크군이 비잔틴의 동맹에 대응해 4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연합군은 티플리스를 공격했고 비잔틴 제국은 이 공성전에서 최초로 트레뷰셋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스로가 도시를 지키기 위해 기병대 1천을 보냈지만 628년 말에 함락되었다. 627년 9월 중순, 헤라클리우스는 지벨이 이끄는 투르크군에게 포위 공격을 계속하게 하고 페르시아의 중심부로 진격하여 니네베 유적 근처에서 라자드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에게 승리했다. 황제는 628년 1월 크테시폰으로 진격하여 수사 산지로 도주한 호스로에게 최후통첩을 보냈고 페르시아는 전복되어 호스로의 아들 카바드 2세가 등극했다. 카바드는 로마군에게 화평을 제의했다.
633년 비잔틴 제국. 헤라클리우스가 개선할 당시만 해도 제국은 새로운 황금시대를 맞이할 것만 같았다. 사산 제국은 내전으로 나라가 흔들리고 있었고 통치자가 계속 바뀌고 있었다. 페르시아는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전쟁으로 인한 중과세, 종교 불안, 지방 토호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다. 회복한 비잔틴 역시 발칸반도는 주로 슬라브족의 손에 넘어갔고 아나톨리아는 거듭된 전쟁으로 황폐해졌으며 되찾은 코카서스,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이집트의 장악력은 떨어졌다. 국고는 고갈되어 전쟁을 치른 병사들에게 급여를 지급하고 신병을 모집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베리아 반도 남단의 스파니아 속주는 629년 서고트 왕국에 정복되었다.
634년까지 이슬람 세력의 확장. 두 제국이 장기간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분열되어 있던 아랍 부족을 예언자 무함마드가 통일했다. 632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 아부 바크르는 초대 칼리파가 되어 이슬람 세력을 이끌었다.
비잔틴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단성론을 믿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아랍인을 해방자로 환대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병에 걸려 군대를 직접 이끌 수 없었다. 634년 아자나다인에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는 비잔틴군에게 승리했다. 양측의 군세는 엇비슷한 약 1만 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36년 5월, 다시 대규모 군대를 보냈지만 아랍인은 전략적으로 철수해 야르무크 평야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비잔틴군을 물리쳤다.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는 이 승리로 명성을 누렸고 무슬림은 서쪽으로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637년 4월, 예루살렘이 함락되었고 638년과 639년 사이에 비잔틴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를 제압했으며 아스칼론을 끝으로 팔레스타인 정복을 완료했다.
헤라클리우스 사망 당시의 비잔틴 제국. 무슬림의 물결은 제국의 동쪽 지방을 상실하게 했고 이제는 경제적으로 중요한 이집트가 공격을 받고 있었다. 짧은 시간 이루어진 무슬림의 정복은 비잔틴인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641년 2월 11일-5월 25일 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누스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함께 있는 아들 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누스(오른쪽)를 나타낸 주화. 종종 콘스탄티누스 3세로 열거되는 헤라클리우스 콘스탄티누스는 3개월 동안 짧게 통치한 황제였다. 그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첫 번째 부인 에우도키아의 장남이다.
641년 2월 11일-9월 헤라클로나스
드물게 헤라클리우스 2세로 알려진 콘스탄티누스 헤라클리우스는 헤라클리우스와 그의 질녀 마르티나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언장에서 그의 아들 헤라클로나스와 콘스탄티누스 3세가 공동으로 통치할 것을 명문화했다. 헤라클리우스는 또한 아내 마르티나가 궁정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어머니와 황후"로 불릴 것이라고 명시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641년 2월에 부종으로 죽었다. 마르티나가 황제의 유언장을 공개했을 때, 그녀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헤라클로나스와 콘스탄티누스는 무사히 641년 2월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콘스탄티누스가 641년 4월/5월에 결핵으로 사망한 후, 헤라클로나스는 어린 나이였기에 어머니의 섭정 하에 단독 황제가 되었다. 6개월 후, 그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아들 콘스탄스 2세를 세운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이자 찬탈자인 발렌티누스에 의해 전복되었다. 발렌티누스는 헤라클로나스의 코를 잘라 로도스로 유배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곧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641년 10월-11월 또는 642년 1월 다비드 티베리우스
다비드는 티베리우스라는 존호로 641년 말(또는 642년 초)에 몇 달 동안 비잔틴 제국의 세 공동 황제 중 한 명이었다. 다비드는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그의 아내이자 질녀인 마르티나 황후의 아들이다. 그는 황제와 황후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에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은 황실과 성서의 다윗을 연결시키려는 의도적인 시도를 반영했다. 다비드 그릇은 마찬가지로 어린 왕자를 위해 만들어졌거나 그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다비드는 7세의 나이에 그의 형 헤라클로나스가 썼던 카멜라우키온 모자를 수여받으면서 카이사르라는 고위 궁정 칭호를 받았다. 641년 2월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사망한 후, 다비드가 10세였을 때, 황실의 다른 분파 사이에 권력 다툼이 뒤따랐다. 타협안의 일환으로, 다비드는 그의 형제 헤라클로나스, 그들의 조카 콘스탄스 2세와 함께 통치하면서 티베리우스라는 존호를 가진 공동 황제가 되었다. 세 황제 모두 어렸기에 마르티나 황후가 섭정을 했다. 마르티나는 헤라클리우스와의 근친상간 관계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습관 때문에 매우 인기가 없었다. 그녀는 아마도 642년 1월에 반란으로 폐위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들은 로도스로 유배되었고, 비잔틴 시대의 정치적 훼손의 초기 사례로서, 마르티나는 혀가 잘리고 그녀의 아들들은 코가 잘렸다. 티베리우스가 공동 황제였던 시기에 비잔틴은 계속되는 이슬람의 이집트 정복과 단의론과 다른 기독교 교리에 대한 계속되는 종교적 분쟁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641년 11월-668년 콘스탄스 2세
콘스탄티누스 3세와 그레고리아의 아들 콘스탄스 2세는 집정관(642년)을 지낸 마지막 황제였다. 콘스탄스는 플라비우스 헤라클리우스(플라비오스 헤라클레이오스)로 세례를 받고 공식적으로 "콘스탄티누스"로 통치한 황제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이 별명은 비잔틴 문헌에서 확립되었고 현대 역사학에서 표준이 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확장을 나타낸 지도. 641년 마르티나는 아들의 황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에 대해 온건한 정책을 지키면서 이집트를 순순히 내주었다. 발렌티누스가 마르티나와 아들들을 쫓아내고 콘스탄스 2세가 단독으로 통치하게 되었지만 642년에 이집트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645년 마누엘 제독이 이끄는 비잔틴 함대가 알렉산드리아를 탈환했지만 곧 귀국하게 되었다. 서쪽에서는 단의론에 대한 성직자들의 격렬한 반대와 아프리카의 총독 그레고리우스가 연관된 반란으로 상황은 복잡해졌다. 647년 그레고리우스가 칼리파 우스만의 군대에 맞서다 전사했고 지역에 내전이 발발하여 제국의 통치가 회복할 때까지 잠시 아랍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같은 해, 아르메니아와 카파도키아가 칼리파군에 약탈당했다. 648년 콘스탄스는 예수의 본성에 대한 논쟁을 중단하는 칙령을 내렸지만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648년 아랍인은 프리기아를 침입했고 649년에는 크레타에 대한 첫 원정을 시작했다.
650년경의 비잔틴 제국. 650-651년에 킬리키아와 이사우리아에 대한 아랍의 공세는 황제가 아랍의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와 협상하도록 만들었다. 짧은 휴전은 제국이 아르메니아 서쪽 지역을 고수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654년 무아위야는 로도스를 약탈하며 공격을 재개했다. 655년 리키아 앞 포이니케에서 벌어진 마스트 해전에서 콘스탄스가 이끄는 비잔틴 함대가 대패하여 500 척이 격파되고 황제도 겨우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656년 아랍에서 내전(피트나)이 발발하여 공세가 잠시 중단되었다. 658년 동쪽의 압박이 줄어들자 콘스탄스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족을 물리치고 그들 중 일부를 아나톨리아에 정착시켰다. 659년 그는 아랍인과 평화 조약을 맺고 이탈리아 원정을 떠났고, 가는 길에 테살로니키에서 슬라브족을 물리치고 662/663년 겨울에는 아테네에서 지냈다. 663년 타란토에 상륙하여 베네벤토 공국을 공격한 콘스탄스는 패배하여 물러나면서 12일 동안 로마를 방문했다. 2세기 만에 처음으로 로마에 발을 디딘 황제는 판테온을 포함한 건물의 장식과 청동을 빼앗고 칼라브리아와 사르데냐에서는 이탈리아 민중의 분노를 사게 한 조치를 취했다. 668년 7월 15일, 그는 목욕탕에서 자신의 시종에게 살해되었다.
643년 장안을 방문하여 당 태종을 알현한 콘스탄스 2세의 사절단. 방문한 이유는 실크로드에서 상품의 안전을 담당했던 서돌궐 카간국의 부족 분쟁으로 인한 수송 지연이었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태종은 카간국의 이르비스 칸의 선출을 지지하여 비잔틴 제국에 이를 알렸다.
668-685년 콘스탄티누스 4세
654년 아버지와 공동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4세는 "젊은"(호 네오스)으로 불리며 때로는 그의 아버지 콘스탄스 2세와 혼동하여 포고나토스("수염 달린")로 잘못 불리기도 했다. 그의 치세는 거의 50년 동안 중단되지 않은 이슬람 팽창에 대한 첫 번째 심각한 견제를 본 반면, 제6차 세계 공의회 소집에서 비잔틴 제국의 단의론 논쟁의 종식을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9월 3일 축일과 함께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659-681년 헤라클리우스
비잔틴 제국의 공동 황제인 헤라클리우스는 콘스탄스 2세와 파우스타의 아들로 659년 아버지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즉위했다. 콘스탄스가 죽은 후, 헤라클리우스의 형제 콘스탄티누스 4세가 수석 황제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헤라클리우스와 티베리우스를 공동 황제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681년에 대중의 반란을 촉발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반란군의 요구에 응하겠다고 약속하고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며 그들의 지도층을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옴으로써 반란을 종식시켰다. 도착한 콘스탄티누스는 그들을 처형하고 나서 티베리우스와 헤라클리우스를 감금하고 그들의 코를 베었으며 그 후 그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659-681년 티베리우스
비잔틴 제국의 공동 황제인 티베리우스 역시 콘스탄스 2세와 파우스타의 아들로 659년 아버지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즉위했다. 681년 콘스탄티누스의 계략에 의해 헤라클리우스와 함께 코를 베이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668년 초,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초대 칼리파 무아위야 1세는 그의 아들 야지드가 이끄는 군대를 비잔틴으로 보냈다. 칼케돈에 도착한 야지드는 비잔틴의 중요한 도시 아모리온을 점령했다. 도시가 탈환되는 동안 669년에 아랍은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를 공격했다. 670년에는 키지쿠스를 점령하고 제국의 심장부에 공세를 취할 기지를 세웠다. 672년 아랍 함대는 스미르나와 다른 해안 도시를 점령하여 해상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대함대를 보냈다. 이틈을 타 슬라브족은 테살로니키를 포위했다.
674년 아랍인이 그토록 기다려온 콘스탄티노플 공격이 시작되었다. 도시가 포위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제국은 대비를 확실하게 했다. 또한 그들은 불을 뿜는 장치를 구비한 많은 함선을 준비했다. 그리스의 불이라 불리는 비잔틴이 소유한 주요 이점 중 하나였다.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시도가 실패하고 9월이 되자 아랍 함대는 겨울을 나기 위해 키지쿠스로 돌아갔다. 그 후 5년 동안, 매년 봄이 되면 아랍 함대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위해 나타났지만 같은 결과를 얻었다. 결국, 아랍은 678년에 포위망을 풀고 철수했으며 아나톨리아의 리키아에서는 비잔틴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예상치 못한 전황으로 무아위야는 비잔틴과 휴전을 모색해야 했고 협정에 따라 아랍은 에게 해의 점령한 섬에서 철수하고 매년 노예 50명, 말 50마리, 30만 노미스마타를 지불해야 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 680년 아스파루흐 칸이 이끄는 불가르족이 다뉴브 강을 건너와 발칸반도의 지역과 슬라브족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육지와 해상으로 연합하여 도브루자에 있는 요새화 된 불가르족의 진영을 포위했다. 건강이 나빠진 황제가 군을 떠나면서 당황한 비잔틴군은 패배하여 681년 모이시아에 불가르 왕국을 인정하고 더 이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다. 결국 그는 트라키아에 테마를 창설했다.
685년 비잔틴 제국. 670년대 계속되는 아랍과의 분쟁으로 인해 콘스탄티누스는 랑고바르드와 조약을 맺었다. 681년 형제들의 통치 자격을 박탈하기 위해 코를 베었고 자신의 어린 아들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황위에 앉혔다. 콘스탄티누스는 685년 9월에 이질로 사망했다.
685-695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
리노트메토스("구멍난 코")라는 별명을 가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재위 685-695년, 705-711년)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처럼,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로마 제국을 이전의 영광으로 되돌리려는 열망을 가진 야심차고 열정적인 통치자였지만, 그는 그의 의지에 대한 어떠한 반대에도 잔인하게 대응했고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4세와 같은 기교가 부족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엄청난 반발을 일으켜 695년 민중 봉기로 퇴위했고, 불가르와 슬라브 군대의 도움으로 705년 황위에 복귀했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첫 번째 통치보다 훨씬 더 독재적이었고, 711년 그를 죽이기 전에 등을 돌린 군대에게 버림받았던 궁극적인 전복도 보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즉위 후, 아르메니아에서 공세를 취하여 우마이야 칼리파국이 매년 지불하는 금액을 늘리고 키프로스 일부를 다시 장악할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 중립이 된 키프로스의 세수는 비잔틴과 아랍에 분할되었다. 688-689년 유스티니아누스는 동쪽의 평화를 이용해 발칸반도에서 불가르족을 물리치고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 테살로니키에 입성했다. 산하에 들어온 슬라브족은 아나톨리아에 정착하여 3만의 병력을 제공했다. 새로운 병력으로 황제는 693년 아르메니아에서 전투에 승리했지만 아랍인의 돈을 받은 슬라브군은 유스티니아누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이탈했다. 한편, 심바티우스라는 파트리키가 아르메니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아랍인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694-695년에 그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마를 만들면서 토지 문제로 귀족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세금 정책으로 민중에게 인기가 없었다. 황제의 호화로운 취향과 종교 정책에 대한 불만, 귀족과의 갈등, 불쾌한 정착 정책은 결국 반란을 촉발시켰고 695년 레온티오스가 황제를 선언하고 유스티니아누스를 폐위시키면서 복위를 막기 위해 코를 잘랐다. 이제 이러한 훼손은 비잔틴에서 흔한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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