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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중세로마

비잔틴 제국 역사 지도 - 7편 마케도니아 왕조 (867-976년)

by 금곡동로사 202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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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886년 바실레이오스 1세 마케돈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렸던 바실레이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 테마의 소박한 소작농으로 태어나 제국 궁정에서 출세했다. 그는 미하일 3세의 친척인 테오필리체스를 섬겼고 부유한 다니엘리스에게서 재산을 받았다.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결혼하여 미하일 3세의 신임을 얻었고 866년에 공동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다음 해에 미하일의 암살을 명령했다.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국정 운영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창시자였다. 그가 사망한 후 아들(아마도 미하일 3세의 친아들) 레온 6세가 계승했다.

 

 

 

 

 

867년-879년 9월 3일 콘스탄티노스

콘스탄티노스의 혈통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바실레이오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또는 두 번째 부인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의 아들로 추정되지만, 이론으로 그가 미하일 3세와 에우도키아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콘스탄티노스는 868년경 부친에 의해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는 870/871년에 신성 로마 황제 루도비쿠스 2세의 딸인 이탈리아의 에르멘가르트와 약혼했지만, 그녀와 결혼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어떤 사료들은 긍정을 하는 반면, 다른 사료들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황제로서 그는 부친과 함께 시리아를 포함하여 여러 번의 캠페인에 참여했고, 그 전쟁에서 승리를 함께 했다. 바실레이오스는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고, 이에 따라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군사 캠페인에 동행했다. 반면에, 그의 동생 레온 6세는 단지 황제의 혈통을 확보하고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는 879년 9월 3일 부친보다 먼저 열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레온이 주요 후계자가 되었고, 또 다른 형제 알렉산드로스가 공동 황제가 되었다.

 

867년 비잔틴 제국. 바실레이오스는 그의 법률 편찬으로 인해 종종 제2의 유스티니아누스로 불린다. 황제가 시작한 편찬 작업은 레온 6세가 완성시켰다. 바실리카 법전은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때까지 비잔틴의 법으로 남아있었다.

 

테프리케를 근거지로 한 바오로파(파란색)의 습격. 그들은 아랍과 동맹을 맺고 에페소스를 약탈하면서 니카이아까지 급습했다. 바실레이오스는 군대를 보내 872년 그들을 진압하였고 지도자 크리소케이르('황금손'이라는 뜻)가 죽으면서 다시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아랍(파란색)의 지중해 지역 침공. 바실레이오스는 아랍에 맞서기 위해 신성 로마 황제 루도비쿠스 2세와 동맹을 맺고 아드리아 해의 침공을 막기 위해 139 척의 함대를 보냈다. 비잔틴의 지원으로 루도비쿠스는 871년 아랍으로부터 바리를 점령하였고, 876년 바리는 비잔틴의 영토가 되었다.

 

878년 유럽의 정세. 시칠리아 토후국은 878년 시라쿠사를 점령했다. 교회를 짓기 위해 바실레이오스 황제가 대리석 운반에 함대를 배치하면서 시칠리아의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는 명백한 황제의 실책이었다.

 

880년 유럽의 정세. 880년에 비잔틴 장군 니케포로스 포카스는 타란토와 칼라브리아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고 제국은 지중해, 특히 아드리아 해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879년에 맏아들 콘스탄티노스가 죽자 황제는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책을 좋아하는 레온을 싫어하여 때때로 아들을 때렸다. 사냥 중, 사슴뿔에 허리띠가 걸려 일어난 사고로 인해 바실레이오스는 886년 8월 29일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886-912년 레온 6세 소포스

레온 6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두 번째 통치자(그의 혈통은 불분명하지만)로 독서를 많이 하여 현자 또는 철학자라는 별명으로 이어졌다. 그의 치세 동안, 전임자인 바실레이오스 1세가 시작한 문자 르네상스는 계속되었지만, 제국은 발칸반도에서 불가리아와 시칠리아와 에게 해에서 아랍을 상대로 여러 차례 군사적 패배를 겪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 집정관의 별도 관직과 같은 몇몇 고대 로마 제도의 공식적인 중단도 목격되었다.

 

 

 

888년 유럽. 레온 6세는 894년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했다. 마자르족에게 뇌물을 주어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공격한 레온은 895년 간접적으로 성과를 거두었다. 896년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패한 황제는 상업적인 양보와 매년 공물을 지불하게 되었다.

 

890년 유럽. 레온 황제는 부친이 시작한 바실리카 법전을 완성했다. 그리스어로 만들어진 법전은 코르푸스 유리스 키빌리스에 보존된 모든 법을 번역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후 세워지는 법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쿠리아이, 원로원, 집정관과 같은 오래된 기관들은 형식적으로 유지되었지만 실질적인 기능은 없어지게 되었다.

 

900년 지중해 세계. 900년 비잔틴 제국은 타르수스 토후국을 상대로 승리하여 에미르를 포로로 붙잡았지만 902년 시칠리아의 마지막 전초기지였던 타오르미나(메시나)를 시칠리아 토후국에게 빼앗겼다. 같은해, 레온은 동쪽 국경의 아랍 지역을 약탈하고 메소포타미아 테마를 창설하였으며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약탈하고 압력을 가했다. 904년에는 배신자 트리폴리스의 레오가 아랍 해적과 함께 테살로니키를 약탈했다. 같은 시기, 동쪽 국경에 아랍으로부터 차지한 영토에 새로운 리칸도스와 레온토코메의 국경지대(클레이수라이)가 창설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907년 노브고로드의 올레크가 이끄는 키이우 루스의 공격을 받았다. 레온은 돈을 지불했지만 911년에 다시 공격을 받았고 결국 무역 조약이 체결되면서 올레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문에 자신의 방패를 달았다. 912년 5월 11일, 레온 6세가 사망하여 879년부터 공동 황제였던 동생 알렉산드로스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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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년 5월 11일-913년 6월 6일 알렉산드로스

알렉산드로스는 바실레이오스 1세와 에우도키아 잉게리나의 셋째 아들이며 그는 미하일 3세가 죽은 지 몇 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혈통에 대한 논쟁은 없다. 912년 레온 6세가 사망하자 레온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노스 7세와 함께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아프토크라토르'라는 용어를 사용한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히메리오스 제독, 에우티미오스 총대주교, 조에 카르보놉시나 황후를 포함한 레온의 고문과 임명권자 대부분을 해임했다. 짧은 재위였지만 온갖 악평과 재난이 잇따랐다. 계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를 거세시키려 한 소문과 게으르고, 음흉하고, 술에 취하고, 악랄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동부에서는 아바스 칼리파국의 공격을 받았고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와 전쟁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913년 6월 6일 치카니온(오늘날 폴로의 기원) 경기를 한 후 탈진으로 사망했다.

 

 

913-959년 콘스탄티노스 7세

콘스탄티노스 7세 포르피로게니토스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네 번째 황제이며 레온 6세와 그의 네 번째 부인 조에 카르보놉시나의 아들이자 전임 황제 알렉산드로스의 조카이다. 913년부터 919년까지 그는 어머니의 섭정 하에 있었고, 920년부터 945년까지는 장인 로마노스 라카페노스, 그리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황위를 공유하며 통치 대부분이 공동 섭정으로 이루어졌다. 콘스탄티노스 7세는 그의 치세 동안 편찬된 중요한 농경학 논문인 '게오포니카'와 네 권의 책 '데 아드미니스트란도 임페리오'(프로스 톤 이디온 이온 로마논), '데 세레모니스'(페리 티스 바실레이우 탁세오스), '데 테마티부스'(페리 테마톤 아나톨리스 카이 디세오스), '비타 바실리'(비오스 바실레이우)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포르피로게니토스라는 별칭은 반암으로 장식된 황궁의 보라색 방을 암시하며, 일반적으로 이곳에서 황제의 합법적인 자녀들이 태어났다. 콘스탄티노스도 이 방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어머니 조에는 당시 레온과 결혼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별칭은 그의 생전에 황위를 차지했던 다른 모든 사람들과는 달리, 합법적인 아들로서의 지위를 강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황제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은 "보라색"으로 태어나지 않은 손위 아들들보다 동로마 계승 서열에서 우선권을 가졌다.

 

 

919-944년 로마노스 1세 라카페노스

로마노스 1세는 비잔틴 제국의 해군 사령관에서 황제가 되어 919년 12월에서 944년 12월까지 통치했다. 아들들에 의해 쫓겨난 그는 프로테 섬에서 수도사로 유배 생활을 하다가 948년 6월 15일 사망했다.

 

 

 

 

 

 

 

921-931년 크리스토포로스 라카페노스

로마노스(왼쪽)와 함께 있는 솔리두스 금화. 크리스토포로스 라카페노스는 로마노스 1세 황제의 장남으로, 921년부터 931년 사망할 때까지 동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였다. 크리스토포로스는 로마노스가 바실레오파토르로 부임한 후인 919년 봄 메가스 헤타이레이아르케스(궁궐 경비대 사령관)의 지위에 올랐다. 로마노스는 마케도니아 가계보다 그의 가족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기 위해 921년 5월 21일 크리스토포로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했다. 928년 크리스토포로스의 장인 니케타스는 사위가 찬탈하도록 부추기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니케타스는 추방되었다. 크리스토포로스는 931년 8월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스테파노스 라카페노스와 콘스탄티노스 라카페노스가 뒤를 이었다. 944년 12월 그의 형제들은 부친을 타도하고 추방했지만, 그들 역시 콘스탄티노스 7세를 축출하려다 추방되었다.

 

 

924-945년 스테파노스 라카페노스

스테파노스 라카페노스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1세의 차남이다. 944년 12월 동생 콘스탄티노스와 함께 로마노스 1세를 폐위시켰으나, 몇 주 후 합법적인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축출되었다. 스테파노스는 레스보스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963년 부활절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924-945년 콘스탄티노스 라카페노스

콘스탄티노스 라카페노스는 로마노스 1세의 삼남이다. 944년 12월 형 스테파노스와 함께 로마노스 1세를 폐위시켰으나 몇 주 후 콘스탄티노스 7세에게 축출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사모트라키 섬으로 유배되었고, 946년에서 948년 사이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살해되었다.

 

 

 

 

 

917년 레온 포카스가 이끄는 비잔틴군이 로마노스 라카페노스의 증원군과 합류하기 위해 메셈브리아로 가던 중 안키알로스에서 멀지 않은 아켈로스 강 근처에서 휴식을 취했다. 소식을 들은 시메온은 서둘러 진격하여 무질서하게 쉬고 있던 비잔틴군을 인근 언덕에서 공격했다. 917년 8월 20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틴군은 완전히 패배하여 많은 지휘관이 죽고 포카스는 메셈브리아로 탈출했다. 수십 년 후, 비잔틴의 역사가 디아코노스 레온은 아켈로스 강에서 여전히 뼈 더미를 볼 수 있다고 기록했다.

 

927년 시메온의 불가리아 제국. 다뉴브 강을 건너기 위해 수송이 필요했지만 이를 거부한 라카페노스 제독과 다투면서 북쪽에서 계획된 페네체그인의 공격도 무산되었다. 마자르족은 프랑크와 동맹을 맺었고, 세르비아인은 계획이 불가리아에 알려지면서 공격을 꺼려 그들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비잔틴군을 추격하기 위해 파견된 불가리아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접근하면서 수도로 돌아온 레온 포카스의 군대와 마주쳤고 그들은 다시 격파되었다. 원정 실패로 조에 황후는 실각하고 919년 황제의 장인 로마노스가 그녀를 대체했다. 공동 황제가 된 로마노스 1세와 그의 장남 크리스토포로스가 실권을 잡으면서 콘스탄티노스 7세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924년 로마노스는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를 공동 황제로 추대했다. 927년에는 평화 협정의 일환으로 크리스토포로스의 딸 마리아(이리니로 개명)가 불가리아의 황제 페투르 1세와 결혼하였다. 931년 8월, 크리스토포로스가 사망하자 로마노스는 눈물을 흘렸고 그 후로는 종교적인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943년 로마노스 1세가 손자 로마노스 2세를 계승권자로 추대하려 하자 두 아들은 반대했다. 게다가 손자를 장군 요안네스 쿠르쿠아스의 딸 유프로시네와 결혼시키길 원하자 마케도니아 가계의 입지가 강해질 것을 우려한 스테파노스와 콘스탄티노스는 944년 가을에 쿠르쿠아스를 파면하도록 설득했다. 대신 로마노스 2세는 이탈리아의 왕 아를의 위그의 사생아 베르타와 결혼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7세가 수석 황제가 되도록 하는 로마노스의 유언장 내용을 알게 된 두 아들은 공모하여 944년 12월 16일 또는 20일에 늙은 황제를 붙잡아 프로테 섬으로 유배했다.

 

945년 1월 27일 처남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콘스탄티노스 7세는 4월 6일 자신의 아들 로마노스 2세를 공동 황제로 추대했다. 정치에 참여한 적이 없었던 황제는 주로 학문에 힘쓰며 관료들과 장군들, 정력적인 아내 헬레나에게 권위를 넘겼다. 947년 토지 개혁을 통해 제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향상되었다. 949년 크레타의 아랍 해적을 정벌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지만 섬을 탈환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955년 함단 토후국의 영역. 949년 비잔틴군은 게르마니케아를 정복하고 952년에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다. 953년 함단의 아미르 사이프 알 다울라가 게르마니케아를 탈환했다. 958년 시리아 북부의 하다스(아다타)를 니케포로스 포카스가 정복하였고 1년 뒤에는 요안네스 치미스키스가 사모사타를 회복하였다. 957년에는 아랍 함대를 격파했다. 959년 11월 9일 콘스탄티노스 7세가 사망하면서 아들 로마노스 또는 며느리 테오파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959년 11월 9일-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 2세

로마노스 2세는 21세의 나이에 아버지 콘스탄티노스 7세의 뒤를 이어 4년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에우도키아로 개명한 베르타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949년 요절하면서 후계자를 낳지 못했다. 로마노스는 956년 여관 주인 아나스타소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녀는 테오파노로 개명했다. 959년 부친이 사망하자 아내를 위해 모친 헬레나를 궁정에서 내보내고 다섯 누이를 격리했다. 즐기는 것을 좋아한 군주는 레온과 니케포로스 포카스 형제와 같은 유능한 장군들에게 맡겼다. 로마노스 2세는 병에 걸려 963년 3월 15일에 사망했다.

 

 

 

 

963-969년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의 눈부신 군사 업적은 10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의 부흥에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에는 논란이 있었다. 서쪽에서는 불가리아와의 갈등을 부추겼고 시칠리아가 무슬림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보았고, 오토 1세의 침입으로 이탈리아에서 큰 성과도 얻지 못했다. 한편, 동쪽에서 그는 킬리키아 정복을 완료했고, 크레타와 키프로스 섬까지 탈환하여, 메소포타미아 상부와 레반트까지 이어지는 비잔틴 침략의 길을 열었다. 그의 행정 정책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러한 전쟁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국민과 교회 모두에 세금을 인상하는 한편, 인기 없는 신학적 입장을 유지하고 그의 가장 강력한 동맹들을 소외시켰다. 여기에는 그의 조카 요한 치미스키스가 포함되었는데, 그는 잠든 니케포로스를 죽이고 황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969-976년 요안네스 1세 치미스키스

직관적이고 성공적인 장군이었던 요안네스 1세 치미스키스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을 강화하고 국경을 넓혔다.

 

 

 

 

 

 

 

 

바실레이오스 2세 이전 황제들의 영토 확장. 960년 대규모 함대와 함께 떠난 니케포로스 포카스는 9개월간의 칸닥스 공성전 이후 961년 섬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했다. 962년 니케포로스는 킬리키아와 알레포를 해방하고 아미르의 궁전을 약탈했다. 한편, 레온 포카스와 마리아노스 아르기로스는 마자르족의 발칸 침공을 막아냈다. 963년 황제가 요절하자 테오파노 황후는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결혼하여 아들들의 권리를 보호하였고 장남 바실레이오스 2세는 나중에 황제가 되었다.

 

973년까지 회복한 영토. 황제가 된 니케포로스 2세는 치세 동안 불가리아와 관계가 악화되었다. 962년 파티마 칼리파국이 공격하자 시칠리아에 남은 마지막 요새 로메타는 지원을 요청했다. 파트리키오스 니케타스와 마누엘 포카스가 이끄는 40,000명의 병력을 실은 함대를 파견했지만 격파되어 로메타가 함락되었다. 967년 이집트 침공 준비를 하던 파티마와 이탈리아에서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와 긴장이 고조되던 비잔틴은 상호 간의 적대를 중단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서로 로마의 계승자를 주장하던 신성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968년 이탈리아에서 충돌했지만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어느 쪽도 확실한 우위를 보이지 못했다.

 

비잔틴 제국과 아랍의 국경 지대 요새들. 964년 봄, 니케포로스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킬리키아의 아나자르보스와 아다나를 점령했다. 키프로스를 점령한 후 965년 여름, 모프수에스티아를 점령하고 8월 16일 타르수스를 함락시켰다.

 

967년 또는 968년에 아르메니아 타론 지역을 합병했다. 968년 10월에는 13일간 안티오케이아를 포위하고 남쪽으로 가 대부분의 요새와 도시를 약탈했다. 시리아의 라타키아와 그 일대를 굴복시켰다. 니케포로스는 금욕적인 삶을 살아 테오파노와 애정이 없는 관계였다고 한다. 그녀는 몰래 치미스키스와 바람을 피웠다. 함께 황제를 전복할 음모를 꾸민 그들은 969년 12월 11일 밤, 테오파노는 침실 문을 잠그지 않았고 치미스키스와 수행원들이 잠입하여 니케포로스를 살해했다. 황제가 살해된 후 조카 바르다스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치미스키스가 황제에 올라 반란을 즉시 진압했다.

 

969년 12월, 숙부 니케포로스를 죽이고 황제에 오른 치미스키스는 콘스탄티노스 7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971년과 972년 키이우 루스의 침공을 막아낸 황제는 여러 차례 그들을 격파하여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와 협상을 통해 물러가게 했다. 치미스키스는 바오로파 사람들을 트라키아로 이주시켜 그곳에 정착하게 했다.

 

치미스키스는 975년 레반트 원정을 하여 다마스쿠스, 나사렛, 카이사레아, 시돈, 베이루트, 비블로스, 트리폴리를 점령했지만 예루살렘은 차지하지 못했다. 976년 원정을 하던 중 황제는 사망하였고 그 뒤를 바실레이오스 2세가 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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