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톨리아의 그리스인은 오늘날 마르세유, 마살리아 주변의 갈리아 남부에 제국을 건설했다.
오늘은 그리스 해운 제국의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프랑스 남부 해안으로 이식된 프랑스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건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BC 800년 그리스 도시 국가 포카이아에서 시작된다. 포카이아는 터키의 아시아 지역으로 불리는 곳으로 아나톨리아의 서부 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터키의 북쪽 끝과 남쪽 끝의 중간쯤에 있다. 그 당시 아나톨리아 서부에는 에게 해를 누비며 건너온 그리스인이 거의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다. 동쪽으로 히타이트와 같은 강력한 제국들이 생겨났지만, 아나톨리아 해안 동쪽의 제국들 대부분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부에 주목했고, 그 당시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그리스인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특히 포카이아는 천연자원이 부족했다. 그 땅은 농업적으로 가난했고, 어떠한 주요 산업도 없었기 때문에 도시는 무역과 해적질을 통해 전적으로 바다에서 번영할 수밖에 없었다. 포카이아인은 해적이 되기 위해 필요한 힘, 규율, 교활함을 미덕으로 찬양하면서 해적 문화를 발전시켰다. 거친 도적으로 보기에는 거리가 멀었던 많은 그리스인은 해적을 동경했다. 포카아이인이 도시를 세웠을 때 이러한 해적 문화는 그들과 함께 확산되었다.
포카이아인이 직면했던 한 가지 문제는 BC 7세기에 그들이 적당한 크기의 도시 국가로 발전했을 때 그리스와 페니키아가 지중해 식민지를 개척한 위대한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인데, 이는 지중해 동부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좋은 땅이 이미 선점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8세기에서 7세기에, 헬레스폰토스에 식민지를 설립하고 흑해에 또 다른 식민지와 이집트와 교역하기 위해 다른 이오니아 그리스 도시와 공동으로 이집트에 식민지를 설립했지만, 그들은 기존의 페니키아 및 그리스 도시 국가들과 경쟁해야 했다. 이와 같이 포카이아인이 기존 폴리스와의 분쟁 관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식민지화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은 갈리아의 남쪽 해안이었으며, 이는 포카이아인이 그리스인 중 최초로 장거리 항해에 사용되는 대형 선박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헤로도토스는 "포카이아인은 그리스인 중 가장 먼저 장거리 항해를 했으며 아드리아해와 티레니아해와 이베리아와 타르테소스를 발견한 그들은 둥근 화물선이 아닌 50개의 노가 달린 배로 항해했다"라고 언급했다.
헤로도토스가 언급한 마지막 국가는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타르테소스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서쪽에 위치한 왕국으로 온갖 금속이 풍부했다. 포카이아는 부유한 타르테소스와 지중해의 나머지 지역 사이의 무역을 장악하기를 원했고, 그것을 강력한 존재의 지배하에 있지 않은 마지막 위대한 무역로로 보았다.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여 타르테소스와 나머지 지중해 지역 사이의 무역을 통제하려고 한 국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00년대 이래로, 오늘날 우리가 '레바논'이라고 부르는 페니키아는 지중해 동부 해안에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바로 북쪽에 있는 나라로 북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도시 국가는 카르타고였지만, 타르테소스에 훨씬 더 가까운 식민지를 세운 도시 국가는 많았고, 이베리아인은 이를 그들의 독립에 대한 자연스러운 위협으로 여겼다. 타르테소스의 왕은 무역로를 지배하려는 페니키아인에게 대항하는 자연적인 동맹으로서 다가오는 그리스인에게 눈을 돌렸다. 왕은 페니키아인에게 도전한 그리스인에게 너무 감사해서 포카이아의 도시 성벽에 돈을 지불했다. 분명히 타르테소스는 지중해 반대편에 있는 성벽에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당대의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포카이아는 동맹이자 무역 파트너가 되어 큰 혜택을 받았다.
BC 600년에 포카이아는 오늘날 마르세유의 전신인 갈리아 남부의 지중해 연안에 마살리아를 세웠다. 마살리아는 산지로 둘러싸인 반도로 방어에 용이했다. 천연 항구가 있어서 항해를 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한 곳이었고, 농업적으로 비옥한 지역에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도시를 위한 완벽한 장소였다.
이 시점에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갈리아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무슨 갈리아인? 갈리아의 지중해 연안은 그리스인이 도착한 BC 600년대까지 거주민이 거의 없었다. 갈리아 부족들은 습격을 위협할 만큼 충분히 가까운 내륙에 살았지만, 아마도 요새화 된 장소에 대한 장기간의 포위 공격은 아닐 것이다. 만약 유럽의 지리를 살펴보고 인도 유럽인과 이후 켈트인의 길고 점진적인 확장을 생각해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인도 유럽인은 동유럽의 탁 트인 공간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프랑스 북부와 나중에는 브리튼으로 이주했다. 지중해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사람들은 알프스 주변의 산악 곡선을 따라가야 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에서 발원한 켈트족은 사방으로 나아갔고, 서쪽으로 간 사람들은 프랑스 북부 전역에 걸쳐 풍요로운 땅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그곳에 머물며 남쪽으로 이주한 사람은 적었다. 중부 유럽에서 기원한 그들의 문화가 항해로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켈트족은 지중해 연안에 정착할 이유가 거의 없었다. 항해나 낚시 기술이 없는 켈트족의 정착지는 북쪽보다 덜 두드러졌다.
마살리아의 북쪽 이웃은 리구리아로 알려진 갈리아 부족이었다. 짧은 기간의 평화 후에 리구리아족은 축제 기간 동안 몰래 들어가 도시를 점령하려고 했다. 마살리아인은 제보를 받고 리구리아족을 매복 공격했다. 그 이후로 마살리아는 갈리아와 분쟁 관계를 맺었다. 갈리아인은 끊임없는 위협이었지만 동시에 마살리아의 엄청난 부의 원천이기도 했다. 갈리아인은 포도주, 올리브, 소금에 대해 만족할 줄 모르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 대가로, 그들은 BC 3세기에 매년 수만 명이 팔릴 정도로 그리스인과 노예를 거래했다. 그동안 내내 피레네 산맥에서 귀금속이 채굴되었다. 마살리아는 갈리아와의 무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그리스 본토의 대도시에 맞먹는 본격적인 그리스 폴리스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마살리아인은 아고라, 경기장, 극장, 아크로폴리스, 저수조, 성벽을 지었다. 그들은 쌍둥이 아폴로와 아르테미스를 위한 두 개의 신전을 지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두 신은 도시의 천성을 나타냈다. 아폴로는 그리스의 정체성과 의사의 신으로서 과학적, 문화적 성취의 수호자였고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야생 여신으로서 그들이 새로운 야생의 땅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보여주었다. 도시는 매우 부유해서 심지어 조폐국도 가지고 있었고, 주화는 아마도 남부 지역 전체의 기본 화폐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정치적으로 발전된 사회였고, 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법과 일련의 법으로 설립되었다. 역사학자 A. 트레버 호지가 지적했듯이 마살리아는 티모크라키(Timocracy)였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누군가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티모크라키 사회에서는 부를 기반으로 한 위계질서로 나뉜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어떤 자유민도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유전은 분명히 사회에서 한 사람의 역할에 대한 커다란 결정 요인이었다. 지도부가 매일 바뀌는 15명의 집행위원회에 의해 감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들의 직위를 유지했던 600명의 부유한 시민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 도시는 BC 6세기에 경제, 해양, 문화의 강국으로 발전했는데, 당시 로마에는 다양한 목동들의 오두막이 모여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트레버 호지는 계속해서 그들의 법률 중 일부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중 매우 흥미로운 몇 가지를 공유하겠다. 법 중 하나는 여성이 와인을 마시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기형으로부터 태아를 보호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여성이 통제되어야 하는 성차별적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법은 자살이 합법이지만, 적절한 방법으로 행해진 경우에만 그러했다. 자살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정부에 자살에 호소할 수 있고, 만약 승인된다면 독당근에서 추출한 독이 주어졌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이러니한 역사적 비틀기로, 마임은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극장에서 공연이 금지되었다.
문화적으로 마살리아는 근동의 복잡성을 지닌 예술과 시를 산출한 지중해 서부의 중심지였다. 마살리아인은 그들의 예술로 존경을 받았지만, 여성 의류와 매우 흡사한 바닥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튜닉을 입은 남성으로 인해 이웃 이탈리아 국가들에서는 여성스러움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그리스 도시인 마살리아는 도덕이 흐트러진 곳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마살리아로 가는 것'은 "베가스에서 일어난 일은 베가스에 머문다"(그곳에서 있었던 일(추억)은 그곳에 묻어두라)라고 말하는 오늘날과 같았다.
이제 이야기는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한 고향 도시로 되돌아간다. BC 550년경 포카이아는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을 지배하는 리디아 왕국에게 정복되었다. 그리고 BC 547년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델포이 신탁에 가장 악명 높은 질문을 했다. 그는 신탁에 페르시아를 공격해야 하는지 물었고, 신탁은 "그렇게 하면 위대한 제국이 무너질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크로이소스는 신탁이 페르시아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군대를 모아 키루스 대왕의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과 싸우는 비참한 결정을 내렸다. 그의 군대는 격파되었고 무너진 것은 페르시아가 아닌 그의 제국이었다.
불행하게도 포카이아는 페르시아의 분노를 면하지 못했고 BC 546년에 포위되었다. 상황이 절망적인 것을 보고 시민들은 코르시카 섬으로 피신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에서 알라리아라고 알려진 식민지를 건설했다. 포카이아인에게는 불행하게도, 카르타고는 이를 성장하는 제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잠시 우회해서 카르타고에 이 모든 상황을 가지고 올 필요가 있다. 포카이아는 원래 BC 800년에서 600년 사이에 번성했지만, 카르타고도 부상했다.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주요 무역 파트너로 그리스인을 대체하기 위해 이베리아 동부 해안을 따라, 북아프리카와 사르디니아에 식민지를 세웠다. 시칠리아의 그리스 식민지화는 당시 마그나 그라이키아 또는 대 그리스로 알려졌고, 섬 서쪽에 있는 포에니 식민지에 도전했다. 카르타고는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면서 타르테소스의 목을 졸랐고 부유한 이베리아 왕국 타르테소스는 쇠퇴했으며 카르타고가 북서 아프리카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되면서 왕국은 결국 붕괴했다. 포카이아인이 코르시카에 도시를 세웠을 때, 카르타고는 이것을 지중해 서부에서 증가하는 그들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의 또 다른 위협으로 여겼다.
이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포카이아인이 그곳에 도착한 후 카르타고와 에트루리아 선박을 약탈하면서 그들의 오래된 해적질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격분한 카르타고와 에트루리아인은 포카이아인에게 응징하기 위해 연합하여 포카이아 함대 60 척과 같은 수의 함선 60 척으로 공격했다. 적어도 헤로도토스가 언급한 수치는 그렇지만 현대의 추정치는 다양하다. 뒤이어 일어난 것은 BC 540년경의 알라리아 해전이었다. 그리스인은 전투에서 이겼지만 그들이 카르타고와 에트루리아인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코르시카를 포기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포카이아인이 이겼지만, 그것은 카드메이아의 승리(Kadmeia nike)에 불과했다. 그들은 배 40 척을 잃었고, 남은 20 척은 쓸모없게 되었다. 선박의 램이 뒤틀렸기 때문이다." 붙잡힌 포카이아인은 돌에 맞아 죽었다. 그들이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포카이아인은 이탈리아의 레기움으로 도망쳤다. 그들의 모도시와 주민들의 몰락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마살리아가 카르타고 영토의 북쪽 지중해 서부를 지배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적인 해상 세력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포카이아는 페니키아의 도시 티레가 그랬던 것처럼 더 큰 세력에게 점령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그들의 식민지인 마살리아와 카르타고가 각각 지중해 서부의 지배를 위해 경쟁하였다.
BC 390년 갈리아인이 로마를 약탈했을 때, 마살리아는 로마의 재건을 돕기 위해 도시에 금을 기부했다. 마살리아는 도시가 갈리아인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동쪽에는 그들을 증오하는 에트루리아인이 있었으며, 계속 팽장하는 카르타고인은 그들을 싫어했다. 즉,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들에게는 로마라는 오직 한 가지 선택권만 남아있었다. 역사학자 A. 트레버 호지는 이 선물 때문에 로마가 마살리아인에게 "로마인과 동등한 권리, 세금 면제와 극장 지정석"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로마가 상상 이상으로 팽창함에 따라, 이 우정은 나중에 배당금으로 갚게 되었다. 다음 몇 세기 동안 마살리아는 지상군을 보완하는 데 필요한 해군력을 제공하면서 전쟁에서 로마와 함께 싸웠다.
로마가 약탈당할 때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마살리아는 리구리아족에게 포위되었고, 그들과 싸우기 위해 힘을 소진하기보다는 엄청난 현금 비축금으로 지불하기로 선택했지만, 향후에도 적에게 지기만 했다. 이는 또한 적과 싸우기보다는 그들을 물리기 위한 마살리아의 일반적인 전술이었다. 마살리아는 매우 부유했기 때문에 이것을 감당할 수 있었고, 갈리아인과 계속 교역할 수 있었으며, 비록 군사적 영향력이 부족할지라도 갈리아를 경제적 영향력 아래에 효과적으로 둘 수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유대관계로 인해 리구리아족에게는 그들이 쫓겨날 수 있다는 우려 속에 남쪽 이웃에 대해 결코 너무 공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무역을 통해, 마살리아는 리구리아족 사이에서 공격을 제한할 수 있었다. 전쟁과 습격은 여전히 일어났지만, 그리스와 갈리아 사이에는 애증의 관계가 남아있었고, 이로 인해 마살리아는 이탈리아 북서부에서 갈리아 남부를 가로질러 심지어 이베리아까지 뻗어있는 제국을 만드는데 필요한 공간을 확보했다. 그들은 오늘날의 아를, 아그드, 아비뇽, 칸, 모나코, 니스 등지에 식민지를 세웠다.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큰 미개척 시장이었던 갈리아와의 무역 독점을 통해 얻은 엄청난 부 덕분에 확장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무역은 갈리아 노예를 위한 마살리아의 와인이었다. 이탈리아에서만, BC 2세기까지 매년 15,000명의 갈리아 노예가 로마에 수입되었고, 그중 상당수는 마살리아를 통해 유입되었다.
로마가 성장하는 동안 마살리아는 군사력이 쇠퇴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황금기에 접어들었고, 마살리아의 탐험가들은 그 시대에서 가장 유명했다. BC 325년경 마살리아의 탐험가 피테아스는 브리튼으로 항해하여 기록된 역사상 영국 제도에 도달한 최초의 지중해인이 되었다. 그는 브리튼 훨씬 너머로 항해하여 발트해 연안, 아마도 스칸디나비아, 북극권, 그리고 그 자신에 따르면 툴레라는 이름의 마법의 섬에 도달했다고 주장했지만, 피테아스가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 이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적어도, 역사가들은 아직 어떤 마법의 섬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만 유명한 탐험가가 아니었다. 에우티메네스는 세네갈까지 항해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탐험했다. 이 탐험가들은 그리스인에게 알려진 지중해 밖으로 나가본 것보다 더 멀리 가서 듣는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상한 문화, 동물, 땅에 대한 이야기를 가져왔다.
로마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BC 218-201년 사이의 악명 높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알고 있는데, 한니발은 전쟁 코끼리와 8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쳐들어갔으며, 이 전쟁은 지중해 서부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고 로마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마살리아는 카르타고와 갈리아 침공에 대항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자연스럽게 로마의 편을 들었지만 보고된 바에 따르면 거의 효과가 없었다. 갈리아 남부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진군한 한니발을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비교적 약한 지상군으로 위대한 장군과 그의 전쟁 코끼리에게 맞서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며 한니발이 행진하는 것을 지켜보기로 한 것은 분명히 옳은 선택이었다. 직접적인 전투 대신에, 마살리아는 이베리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소식을 로마에 전달하고 일반적으로 해군을 지원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로마는 이탈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 이베리아, 그리고 갈리아 남부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면서 지중해 서부를 지배했다. 로마의 지배는 마살리아가 쇠퇴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로마가 훔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고, 아무도 그들에게 도전할 만큼 충분히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해적질에 의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마살리아는 로마의 권위 아래에 있던 이베리아의 부를 더 이상 통제하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마살리아는 부유한 도시였지만, 로마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의 많은 도시 중 하나일 뿐이었다. 중요성은 줄었지만 마살리아는 50년 동안 평화롭고 지속적인 번영을 누렸으며, 이는 어느 모로 보나 도시가 계속해서 부유하게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부자였기 때문에 '더 큰 부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BC 154년까지 마살리아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한 것에 격분한 갈리아인에게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도시는 결코 함락되지 않았지만, 식민지는 종종 약탈당했고, 그들은 로마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다. BC 122년 갈리아인의 또 다른 침략 이후, 로마는 그 지역을 합병하고 아쿠아이 섹스티아이, 또는 오늘날 알려진 대로 엑상프로방스에 수비대를 설치했다. 이로써 로마는 이 지역과 마살리아를 완전히 우회하여 이베리아로 가는 매우 중요한 육상 무역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마살리아는 로마의 보호 아래에서 이후 한 세기 동안 계속해서 더 부유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부는 도시의 몰락을 초래했다. BC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평민 또는 일반인의 대의를 옹호하는 민중파와 폼페이우스가 옵티마테스나 부유층을 이끌면서 로마는 내전에 빠졌다. 마살리아는 부유하고 귀족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고, 그때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6개월간의 포위 공격을 명령하여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도시는 BC 49년에 함락되었고 이름이 그리스어 마살리아에서 라틴어 마살리아로 바뀌면서 로마에 흡수되었다. 지역 전체가 오늘날 프랑스어로 '라 프로방스' 또는 영어로 '지방'으로 알려진 '프로빈키아 로마나'라고 불리는 로마 영토로 조직되었다. 중세 시대가 한참 지나서야 이 도시는 마르세유로 다시 유명해졌다.
그래서, 마살리아는 당시 갈리아로 알려진 프랑스에 어떤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와인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리스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양조 지식을 프랑스로 가져오지 않았다면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농담은 차치하고라도, 마살리아는 갈리아를 훨씬 더 국제적으로 만들었다. 마살리아가 갈리아와 무역을 시작하기 전에는 지중해 세계와 대서양 세계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켈트족은 갈리아 해안을 따라 무역을 하며 스페인 북부에서 갈리아를 거쳐 콘월과 웨일스까지 상품을 거래했다. 그러는 동안 지중해에는 광대한 무역망이 존재했다. 마살리아는 갈리아를 개방하여 지중해의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갈리아인에게 글쓰기, 주화, 그들의 관습, 법과 신념을 가져다주었다. 갈리아인은 어떤 특정한 사상이나 관습도 채택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적어도 그것들에 친숙해졌다. 그리스 로마인은 더 이상 이상 낯설고 환상적인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다른 민족이었다. 아마도 나약하고 문란한 사람들, 파티에 갈 가능성이 더 높고 진정한 남자답게 소리를 지르는 전투와 마주칠 가능성이 적은 민족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때때로 다른 경쟁 갈리아 부족과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그들만의 관습을 가진 민족이었다.
이는 다가오는 갈리아 역사에 있어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마살리아가 없었다면 갈리아인은 로마의 통치에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군사적으로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마살리아 덕분에 갈리아인은 이미 지중해 무역망에 연결되어 있었고, 로마의 관습을 이해했으며, 로마의 통치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마살리아는 갈리아를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끌어들이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까지 프랑스 남부 지역은 다른 프랑스 지역과는 매우 다른 운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프랑스의 모든 지역은 고유한 매력을 가지고 있지만, 라 프로방스는 정말로 독특하다. 지역의 일부는 지중해에 있는 자연의 산물이다. 해변과 야자수가 있는 지역에 사는 것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북부의 숲과 자연스럽게 구별된다. 특히 그리스 로마 문화, 음식, 생활방식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지역 유산의 유명한 부분이다.
출처 : The French History Podc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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