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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고대유럽

AD 43-425년 로마 브리타니아

by 금곡동로사 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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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43년

 

로마인은 시즌 후반에 군대를 3개(그중 하나는 브리튼인의 허를 찌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음)로 나누어 도착했다. 그들은 켄트의 리치보로와 웨스트서식스의 치체스터에 상륙했고, 처음에는 싸울 상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브리튼인은 매우 현명하게 언덕과 습지로 이동하여 로마군이 보급품을 다 소모하길 바라며 시야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군은 카투벨라우니의 토고둠누스와 그의 형제 카라타쿠스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했고, 카라타쿠스에 대한 승리는 아마도 켄트에서였을 것이다.

도분니의 구성원들은 (아마도 사절을 통해) 즉시 항복했고, 카투벨라우니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투벨라우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아마도 켄트의 메드웨이 강에서 로마군을 만나 비교적 드문 이틀간의 전투를 벌였다.

로마군이 마침내 카투벨라우니(카라타쿠스가 아닌)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동부가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기까지는 계속해서 이어진 극도로 힘든 전투가 있었다.

 

 

AD 44년

 

그들이 상륙하기 전에 알고 있었듯이, 로마인은 모든 부족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많은 부족들이 카투벨라우니의 압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을 환영했다.

이케니는 클리엔테스(종속) 왕국이 되었고, (지도에서 클리엔테스 왕국은 빨간색 세로선으로 표시됨) 로마인은 오늘날의 서식스 지역에 새로운 클리엔테스 왕국을 세웠다. 레그닌세스는 정복 때까지 아트레바테스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 새로운 국가에는 아마도 벨가이에 속한 영역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그 통치자인 코기두브누스는 아트레바테스의 마지막 독립 왕의 아들로 추정된다.

다른 곳에서는 억센 두로트리게스가 정복되기 전에 로마의 제2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정복 지역은 빨간색 사선으로 표시됨). 나머지 자유 도분니의 정복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로마인이 그들에게 도달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라타쿠스가 웨일스로 철수하기 전에 잠시 이곳에 피신했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북쪽과 서쪽에서 코리타니는 로마인을 환영했고, 맹렬하게 독립적인 브리간테스는 코르노비처럼 로마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AD 47-61년

 

다음 10년 동안 로마인은 남동쪽과 서쪽의 정복지를 공고히 했다. 코르노비는 부족들을 평정하기 위해 웨일스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51년에 제국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웨일스에서 47-52년 사이에 실루레스는 로마인에게 힘든 시기와 큰 손실을 입혔으며, 오르도비케스 역시 약간의 움직임을 보였고 패배하지 않고 아마도 진압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데케앙글리에 대한 급습이 수행되면서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획득했다.

웨일스에서는 대왕(하이킹) 카라타쿠스를 남쪽에서 브리간테스의 품으로 몰아낸 것 외에는 확실한 성과가 없었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부족들을 통합할 수 있는 마지막 지도자였다. 이제부터 그들은 단독으로 싸우게 되었다.

55년경에 로마는 이스카(엑서터)에 군단 요새를 세웠지만, 그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나아갔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적어도 많은 수는 아님). 61년 로마인이 잘못 처리하면서 이케니 반란이 일어나 브리튼인의 나라를 거의 되찾았다. 결국 반란은 실패했고 이케니도 완전히 제국에 편입되었다.

 

 

AD 70-79년

 

78년 로마군은 아마도 웨일스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엑서터에서 철수했다. 둠노니의 영토에서 강력한 로마군의 존재가 재확립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대신, 그들은 영구적인 클리엔테스 왕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케니는 코르노비가 그랬던 것처럼 확고한 제국의 일부였고, 브리간테스는 북쪽에서 다소 골치 아픈 클리엔테스 왕국으로 남아 있었다.

웨일스에서의 격렬한 전투로 양측 모두 높은 사상자 비율을 냈다. 오르도비케스는 74-75년에 로마 기병 부대를 격파한 반면, 부족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단 요새가 서부 전역에 세워졌다. 79년에 새로운 로마 총독이 반란군 오르도비케스를 무너뜨리기로 작정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을 거의 전멸시켰다. 앵글시에 대한 데케앙글리 영토 내에서의 마지막 공격은 마침내 웨일스 정복이 달성되었음을 의미했다.

같은 기간 로마인은 카르티만두아 여왕을 구출해야 했을 때 브리간테스 내에서 동맹을 잃었다. 이제 그들은 79년에 끝난 좋지 않게 기록된 캠페인에서 북쪽을 정복하기 위한 더 힘든 싸움에 직면했다.

 

 

AD 80-88년

 

이제 로마인은 먼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80년에 두 개의 침공군을 스코틀랜드 저지대로 보냈으며 그들은 보타디니 브리튼인의 영토 깊숙한 곳에 있는 인버레스크(에딘버러 근처)에서 집결했다. 군대는 지나간 자리에 영구적인 주둔지를 구축했고, 81년에는 포스-클라이드 전선(후대에 건설된 안토니누스 장벽의 약간 남쪽에 있음)이 담노니 영토 내에 확보되었다.

82년 로마인은 클라이드 강까지 서부 해안을 확보하여 그곳에 부족민(나머지 담노니족, 셀고바이족, 노반타이족)을 수용하고 아마도 아일랜드 약탈 무리가 상륙하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이듬해 픽트인의 심장부 내에서, 처음에는 포스만 북쪽(83년)에 이어 몬스 그라우피우스(84년)에서 로마인은 칼가쿠스가 이끄는 칼레도니아인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로마 함대가 공포를 퍼뜨리기 위해 그들보다 앞서면서, 아마도 바코마기의 영토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고 나서 동쪽 해안을 따라 하이랜드 협곡이 확보되었지만 86-88년까지 많은 요새가 해체되었고, 일부 가능한 감시탑을 제외하고, 로마군의 주력 부대는 타인-솔웨이 전선(지도에 표시된 로마 북방 국경)으로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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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90-200년

 

브리타니아는 로마의 관리 아래 정착했고, 거대한 도시 건설 계획이 착수되었다.

118-120년경에 이 속주는 야만인들의 침략에 따른 심각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현장을 방문한 하드리아누스는 121-122년 방어 재편의 일환으로 타인-솔웨이 전선에 석벽 건설을 승인했다. 127년경 장벽이 완성되자 일부 요새는 서쪽 구역의 북쪽에 유지되었다.

로마인은 140-143년에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여 픽트인의 대략적인 남부 경계인 포스-클라이드 전선을 따라 저지대 스코틀랜드를 재점유하고 보다 기초적인 안토니누스 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북쪽의 부족들은 칼레도니와 마이아타이라는 두 개의 주요 조직으로 통합되었다.

148년, 담노니는 '북쪽의 네 왕국' 중 하나로 독립 왕국을 선포했지만, 나머지 세 왕국은 대부분 로마와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고, 163년까지 군단이 남쪽으로 철수했다. 197년에 제위 경쟁자 알비누스가 패배했고, 이후 재편성 과정에서 단일 속주가 둘로 분할되었다.

 

 

AD 200-300년

 

세베루스 황제는 209-211년에 칼레도니족과 마이아타이족에 대한 원정을 직접 이끌기 위해 속주를 방문했다. 그는 짧은 기간 부족민을 전투에 참여시키거나 항복시키기 위해 초토화 정책을 추구했지만, 그 어느 것도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는 세베루스가 사망한 직후 또는 잠깐 뒤에 스코틀랜드를 완전히 포기했다. 스코틀랜드 저지대 부족들은 이 시기에 영구적인 클리엔테스 왕국으로 확립되었을 것이며,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쪽에 있는 몇몇 로마 요새들은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260년 라인 강에서 황제의 부하였던 포스투무스는 게르마니아, 갈리아, 스페인, 브리튼의 황제를 자처했다. 이후 13년 동안 '갈리아 속주들의 제국'(임페리움 갈리아룸)이라고 불린 제국의 북서부 전체는 독립적이지만 일련의 황제가 있는 완전한 로마 국가로 운영되었다. 제국은 274년 전투에서 패배하여 북부 속주들은 로마의 통치로 돌아갔다.

286-296년 사이에 황제로 즉위한 두 사람이 속주들을 차지하고 로마와 단절시키면서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AD 300-382년

 

305-306년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세베루스의 예를 따라 찾기 힘든 하이랜드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그들에게 전투를 강요하고 새로운 평화의 기간을 보장했다. 브리타니아의 2개 속주는 콘스탄티우스의 재편으로 네 개의 속주로 세분화되었다. 이들은 (늦어도 314년까지) 브리타니아 프리마, 브리타니아 세쿤다, 막시마 카이사리엔시스, 플라비아 카이사리엔시스로 명명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의 죽음은 브리타니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4세기 초의 평화와 번영은 서서히 사라졌다. 콘스탄스 황제는 343년 초에 갑자기 방문하여 비상사태(장벽의 북쪽 부족에 대한 전쟁일 수도 있음)로 인해 해협을 횡단하기에는 이례적인 시기에 그가 브리타니아로 오게 된 것을 암시했다. 그는 또한 현재 일어나고 있는 도시들의 광범위한 재강화를 명령했을 수도 있다.

367년까지 픽트인은 디칼리도나이와 베르투리오네스의 두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가 여러 방면에서 공격을 받은 '야만인의 모의'의 일부였다. 그들은 382년에 다시 침략했는데, 로마의 권위를 쇠퇴하게 한 많은 공격 중 하나였다. 이 공격은 브리타니아의 로마 사령관 마그누스 막시무스에 의해 격퇴되었다.

 

 

AD 382-409년

 

막시무스는 383년에 반란을 일으켜 대군을 이끌고 갈리아를 침공했다. 준비 과정에서, 그는 아일랜드 습격자들로부터 서부 해안을 보호하기 위해 웨일스에 클리엔테스 왕국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지역 요새들 또한 이 시기에 버려졌다. 이때부터 브리튼의 대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브리타니아 내에서 유래했으며, 이를 위해 막시무스는 브리타니아 북부에서 코엘 헨을 그의 후임자로 선택했다고 전해진다.

384-390년경 사이에 픽트인에 대한 전쟁이 다시 발발했고, 비록 상황이 억제되었을지라도, '수년간'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398년 로마인은 색슨족과 아일랜드계 스코티족을 급습하여 북쪽에서 픽트인을 격퇴하기 위한 원정을 이끌었다.

404/5년 브리타니아에서 군대가 철수하여 이탈리아 북부에서 고트족과 다른 야만족의 군대를 물리친 로마군의 일부를 구성했다. 이는 스코티족의 브리타니아 남부 해안 습격과 같은 해에 이루어졌다. 브리타니아 속주들은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고 야만족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데 있어서 로마의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406년부터 남아 있던 군대는 일련의 그들이 지지하는 자들을 왕위에 올렸다. 추가적인 습격들은 브리튼인이 모든 로마 관리들을 추방하고, 다시는 갱신되지 않는 관계를 끊도록 설득했다.

 

 

AD 409-425년

 

로마와의 단절 이후 중앙 행정부가 명백히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가 왔다. 로마화 된 행정 구조를 하나로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권력을 가진 개인은 없었을 것이며, 강력한 지역 인물들이 (서쪽에서) 부족의 왕이나 로마식 마기스테르의 형태로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 통제는 지역 중심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보르티게른이 서부에서 권력을 잡은 것은 이러한 추세를 확인시켜주는 듯하고, 그 반대도 시작되었다. 그가 비록 일부 지역에서 속주보다는 사실상 작은 왕국을 통치했겠지만, 나라에 외견상 통일된 모습을 어느 정도 가져다주었다.

이때쯤 케인트(켄트)가 독립했을 것이고, 둠노니아는 옛 두로트리게스 영토의 소유권을 주장했고, 보르티게른의 파겐세스(포이스)는 웨일스를 통치하게 된 왕국 옆에 있었다. 북쪽은 또한 베르니키아가 생성된 첫 번째 분할로 분열되어 있었다. 포이데라티의 반란, 만연한 전염병, 내전,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국가의 응집력이 무너지면서 나머지 로마 속주들도 기껏해야 40년 안에 사라지게 된다.

 

 

 

출처 : The History F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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