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군사

제국의 리메스

by 금곡동로사 2021. 12. 22.
728x90

 

제국의 국경은 천연적 또는 인공적인 방어시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는 로마 세계를 야만인이나 외국인으로부터 구분하는 영토의 산수 장벽으로,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 강 (라인, 다뉴브, 유프라테스 등)
· 산지 (다키아의 카르파티아 산맥 또는 마우레타니아의 아틀라스 산맥 등)
· 사막 (이집트, 아라비아 및 시리아)

두 번째는 하드리아누스 방벽, 안토니누스 방벽, 리메스 포로리센시스, 리메스 게르마니아-라이티아의 경우와 같이 아게르(제방), 나무 울타리 또는 돌담과 해자로 구성되었다. 이 요새는 주변의 위험에 따라 다양한 거리에 감시탑과 방어탑이 있었다.

 

 

 

주요 리메스

첫 번째는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의 몰락을 선언한 유럽 북부 전선으로, 차례로 다음과 같이 형성되었다.

 

- 리메스 브리타니쿠스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이 있는 제국의 최북단.

-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라인 강을 따라 있으며, 거의 20년 동안 게르마니아 마그나가 엘베 강까지 침투했었다.

- 리메스 다누비우스
제국 전체의 방어 체계 중 가장 중요하며 라이티아에서 강어귀의 하부 모이시아까지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에 걸쳐있는 모든 속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리메스 판노니아


차례로 다음과 같이 나뉜다.
· 라이티아는 BC 15년 아우구스투스가 빈델리키아와 라이티아에서 원정을 벌인 후 만들어졌으며, 도미티아누스로부터 시작된 서쪽의 아그리 데쿠마테스를 획득하면서 더욱 발전했다.
· 노리쿰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BC 15-AD 50년)에서 시작되었다.
· 판노니아는 BC 13-9년 티베리우스의 원정에서 시작되었다.
· 모이시아는 BC 30-29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장군이 이끄는 원정을 시작으로 만들어졌다.
트라야누스에게 위임된 정복과 함께 개발된 로마 다키아의 방어 체계도 이 리메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리메스 노리쿰 / 리메스 모이시아

 

- 다뉴브 북쪽 리메스
다키아 속주, 사르마티아 및 폰투스 에우시네(흑해) 북부 해안을 포함한다.
판노니아는 오늘날의 헝가리 서부,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비엔나, 크로아티아 북부, 슬로베니아 일부에 이르는 로마의 속주였다.

 

리메스 판노니아의 병사들

 

홀란트

2003년 1월 1일 네덜란드에서 약 2000년 전 라인 강둑에서 로마 병사들이 건설한 망루의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 망루는 강을 지키는 일련의 감시 초소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 제국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경계를 표시했다.

탑들은 강을 따라 상륙하는 것을 감시하고 적대적인 게르만 부족들이 공격을 위협할 경우 경보를 울리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믿어진다.

탑들은 500 m에서 1500 m의 간격을 두고 지어졌으며, 각 경비병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고, 강둑을 따라 가장 가까운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위험이나 만일의 사태에 대해 알릴 수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탑의 연대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통치 시기인 AD 50년경으로 추정한다. 탑은 사방 3 m로 정사각형이어야 하고, 높이는 5 m였다. 가장 가까운 군사 기지에서 서너 명의 병사들이 탑으로 파견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탑을 통제하는 병사들은 아마도 로마 군단병과 제국의 다른 국경 지역에서 모집된 보조 부대가 혼성되었을 것이다.

"BC 53년경 로마인은 카이사르 시대에 이 지역에 처음 도착했다. 로마의 점령은 과중하지 않았지만 질서를 가져오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조립 및 해체되는 매우 기능적인 목조 요새를 사용했다."

강은 로마인에게 "바타비"로 알려진 현지 게르만 부족들과 로마인이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감시 지점은 지나가는 배에 대한 통행료 지불을 보장하는 역할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돈은 항상 로마인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리메스 하부 게르마니아

 

260년 아그리 데쿠마테스의 포기

한편으로 새로운 기독교는 국경 방어에 대한 비전을 바꾸었다. 조국과 명예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훌륭한 군인 신화는 무너지고, 로마인은 거의 더 이상 싸우지 않았고 제국의 방어는 로마인과 같은 열정을 가지지 못한 용병들에게 맡겨졌다. 이는 조국의 국방력을 떨어뜨렸고, 동료 시민들로부터 명예를 얻기 위해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는 열정과 그 용기 있는 행동으로 얻은 명예를 쟁취하는 긍지를 약화시켰다.

3세기에 계속된 야만인들의 침입, 특히 알레만니족은 로마 제국을 약화시켰다.

상부와 하부 게르마니아 총독인 포스투무스가 이끄는 서부 제국(갈리아 제국)의 분리는 로마 제국을 더욱 약화시켰다.

이 모든 사태는 갈리에누스 황제로 하여금 아그리 데쿠마테스의 영토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259-260년 사이에 서쪽의 라인 강, 즉 리메스 상부 게르마니아와 남쪽의 다뉴브 강, 즉 리메스 라이티아의 거대한 강 리메스를 다시 불러들여야 했다.

 

리메스 게르마니아의 병사들

 

리메스 게르마니아-라이티아

리메스 게르마니아-라이티아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사이의 상부 게르마니아와 라이티아 속주의 국경에 로마인이 세운 국경 요새에 관한 것이다.

 

AD 90년 리메스 게르마니아-라이티아


리메스는 상부 게르마니아와 라이티아 속주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로마인이 세운 일련의 국경 방어시설, 요새 및 보조 기지(카스텔라), 탑 또는 경비 초소(탑 또는 주둔지), 장벽 또는 울타리 및 담으로 라인 강과 다뉴브 강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며 소위 아그리 데쿠마테스 영토로 불린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라인 강을 따라 있으며, 거의 20년 동안 게르마니아 마그나가 엘베 강까지 침투했었다.

- 리메스 다누비우스
제국 전체의 방어 체계 중 가장 중요하며 라이티아에서 강어귀의 하부 모이시아까지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에 걸쳐있는 모든 속주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리메스 게르마니아-라이티아

 

- 다뉴브 북쪽 리메스
다키아 속주, 사르마티아 및 폰투스 에우시네(흑해) 북부 해안을 포함한다.


구조 :

방어시설은 지름 30 cm의 오크 통나무 울타리로 만들어졌으며 1 m와 3 m 높이로 땅에 박혔다. 강과 접하지 않은 모든 경로에는 요새와 망루를 갖추고 있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울타리와 감시 초소 사이에 폭 6-7 m의 내부 첨탑이 있는 제방과 2 m 깊이의 도랑을 추가했다. 그리고 일부 시설은 돌담으로 대체되었다.

라이티아에서 리메스는 울타리 대신 1.2 m 두께와 3-4 m 높이의 돌담이었다.

 

세르비아에 있는 리메스


로마의 리메스에 대한 묘사는 트라야누스와 안토니누스 기둥에 묘사되어 있는데, 초기 장면들은 초소, 보루, 요새, 울타리 방호벽, 나무 더미와 불이 붙으면 신호 역할을 하는 짚단으로 보호되는 다뉴브 강의 오른쪽 기슭을 나타내고 있다.

 

728x90


2005년 7월 15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 위치한 하드리아누스 방벽(1987년 등록)과 함께 게르마니아-라이티아 리메스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2008년에는 안토니누스 방벽이 이들에 추가되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리메스 브리타니쿠스

제국 국경의 최북단이다. 실제로, 용감하고 피에 굶주린 적대자이자 스코틀랜드인의 조상인 픽트인의 침입을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리메스는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안토니누스 방벽으로, 둘 다 브리튼 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방벽

 

로마인이 발트해까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브리튼에서 로마 제국의 최북단 국경이었으며, 단연코 제국의 가장 요새화 된 제국의 경계였다. 방벽을 통과하는 고도로 보호된 출입문은 물품의 조세를 위한 세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방벽은 폭 2.5 m, 높이가 4-5 m에 이르렀다. 이 방어시설은 80개의 보루가 있었는데, 그중 2개는 성문 옆에 있었고, 로마 마일마다 하나씩 위치했으며 감시 및 신호를 위한 탑이 보루 2개마다 있었다.

방벽은 외부로부터 내부까지 다음을 포함했다.
난간 및 깊은 해자로 보호되는 경사진 성벽은 뾰족한 장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돌담, 군대가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는 도로,
방벽 그 자체, 즉 중간에 또 다른 해자가 있는 두 개의 큰 제방이었다.
상시 주둔하는 수비대.


성벽에는 보병과 기병을 포함하여 총 9,000명의 군단병과 보조 부대가 지키고 있었다. 제국의 쇠퇴와 함께 AD 400년에 주둔지는 버려졌고 방벽은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돌은 약탈되어 20세기까지 현지 건물들에 재사용되었다. 오늘날 특히 중앙 구간은 남아 있지만 대부분 지나갈 수 있다. 이곳은 잉글랜드 북부의 주요 관광명소이며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리메스 브리타니쿠스의 병사들

 

안토니누스 방벽

안토니누스 방벽은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북쪽에 위치해 규모와 효율성이 더 낮았다.

 

 

방벽은 4 m 높이의 흙 제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북쪽에는 큰 해자가 있고 남쪽에는 군사용 통로가 있으며 2 마일마다 보루가 있었다. 불과 20년 만에 버려졌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재건되었다.

안토니누스 방벽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치세인 142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144년에 완공되었다. 이 장벽은 클라이드 만의 웨스트 던바턴셔에서 포스 만의 보니스까지 약 63 km(39 마일)에 걸쳐 있다.

요새는 160 km 더 남쪽에 위치한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로마인은 성벽 북쪽에 임시 진영과 요새를 지었지만, 저항하고 자주 요새를 파괴한 픽트족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진압하지는 못했다.

로마인은 안토니누스 방벽의 북쪽 땅을 칼레도니아라고 불렀지만, 스코틀랜드의 현대 게일어 이름인 "알바(Alba)"도 눈 덮인 산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비앙카(alba)에 해당하는 라틴어 부명제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학자 로버트 그레이브스와 같은 다른 사람들은 여신 알바, 즉 하얀 여신으로, 마그나 그라이키아에서 레우카, 즉 비앙카라고 불렸던 동일한 여신을 기리기 위해 명명되었다고 여긴다.

 

 

방벽은 건설된 지 20년 만인 164년 로마 군단이 남쪽의 하드리아누스 방벽으로 철수하면서 버려졌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국경을 확보하기 위해 섬의 북쪽에 도착했고 방벽의 일부를 복구했다. 비록 재점령 기간이 몇 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안토니누스 방벽은 세베루스 방벽으로도 불린다.

안토니누스 방벽은 하드리아누스 방벽보다 규모와 효율성이 낮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예외적인 축조였으며, 춥고 적대적인 국경 지대에서 불과 2년 만에 완공되었다. 방벽의 구조는 북쪽에 큰 해자가 있고, 남쪽에는 군사 통로가 있는 4 m 높이의 흙 제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벽을 따라 러프 캐슬 포트 근처에는 아직도 늑대가 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안토니누스 방벽의 대부분은 파괴되었지만, 그중 일부는 여전히 베어스덴에서 볼 수 있다.

 

 

 

리메스 오리엔탈리스

로마 동부를 방어하기 위한 요새 체계는 다음과 같이 연결되었다.
- 트라페주스 (AD 64년부터 로마 치하에서 폰토스 속주의 중요한 흑해 해군 기지였다) 와 함께
- 아일라나 (이스라엘 최남단에 있는) 에서 연결되는 도로를 건설했다.
- 페트라는 나바테아의 반유목민들, 아랍인, 팔미라인, 아르메니아 왕국과 마주한 나바테아의 도시이며, 무엇보다도 파르티아 제국과, 그다음에는 사산 왕조와 맞섰다.

 

리메스 페르시아

동부 리메스는 다음 4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 리메스 카파도키아와 폰투스 에우시네
17년 티베리우스 황제가 카파도키아 속주를 합병하면서 만들었다. 아르메니아와 함께 (종종 수세기 동안 로마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의 중심에 있었음)

- 아르메니아 리메스
이를 위해 로마인과 페르시아인은 수세기 동안 자주 싸웠다.

- 리메스 메소포타미아
114-117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부터 시작하여 불연속적으로 만들어졌다.

 

리메스 아라비쿠스

 

- 리메스 아라비쿠스
시리아, 아라비아 및 유대/팔레스타인을 방어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과 홍해의 약 1,000 km를 연결한 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속주 (2세기에 만들어진) 사막에 위치한 로마 제국의 국경.

시리아 북부에서 팔레스타인 남부까지 최대 약 1,500 km에 걸쳐 아랍 반도에 도달할 때까지 뻗어 있었다.

전체 길이를 따라 수많은 요새와 망루가 있었다.
트라야누스는 111년과 114년 사이, 리메스 아라비쿠스 근처에 군대와 정부 관리들을 효율적으로 수송할 수 있는 430 km 길이의 비아 트라야나 노바를 건설했다. 가도는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리메스 아프리카의 병사들

 

리메스 아프리카이

세 번째로 남쪽 국경을 지키기 위해 방어한 가장 긴 전선이다.

리메스 아프리카이

리메스는 두 개의 전선으로 나뉘었다.

- 마우레타니아 속주, 누미디아와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를 포함한 서부 전선.
- 키레나이카와 이집트 속주로 형성된 동부 전선

북아프리카 전선을 따라 적어도 6개의 리메스 구역이 있었다.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한 남부 전선이었다.
이곳은 가장 긴 "전선"이었지만, 첫 3세기 동안 배치된 45,000명의 군대로 가장 간단하게 방어할 수 있었다. 리메스는 모로코의 라바트에서 이집트 홍해의 수에즈까지 뻗어 있었고 일직선으로 4,000 km 길이였다.

국경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음과 같은 수많은 하위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포사툼 레기아 :  BC 146년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합병할 때 간단한 해자로 축조되었다.
-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  42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의 마우레타니아 속주로 합병하면서 만들었다.
-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  42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의 마우레타니아 속주로 합병하면서 만들었다.
- 누미디아 :  BC 105년 유구르타 전쟁이 끝나고 누미디아 동부의 영토가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로 합병되면서 만들어졌다.
- 아우레스 :  동명의 산악 지대 남쪽에 있으며, 앞서 언급한 누미디아와 그 이후의 트리폴리타누스 사이에 위치해 있다.
- 트리폴리타누스 :  동명의 지역을 두 시리아인이 남부로 확장했다.
- 키레나이카 :  BC 74년 공화국 시대에 이 지역이 합병되면서 만들어졌다.
- 이집트 리메스 :  BC 30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이집트 속주로 합병하면서 만들었다.

 

AD 212년 제국의 국경을 따라 배치된 로마 군단

 

 

출처 : RomanoImpero

728x90

'로마 이야기 > 로마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 군단병 (BC 509-AD 170년)  (0) 2022.02.01
로마의 국경 방위  (0) 2022.01.08
로마 공화국 군대 (BC 500-28년)  (0) 2021.09.29
로마와 갈리아의 만남  (0) 2021.09.28
로마에서 유래한 300  (0) 2021.09.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