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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군사

고대 로마를 변화시킨 여섯 내전

by 금곡동로사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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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는 역사 동안 많은 정복 캠페인을 벌였지만, 가장 영향을 미친 전쟁은 아마도 로마 자신과 싸운 전쟁이었을 것이다.

고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로마 제국은 전성기에 유럽 대륙의 대부분, 브리튼, 서아시아 대부분, 아프리카 북부 및 지중해의 섬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많은 외부 전투 외에도, 수많은 내전이 고대 로마 제국에 일어났다. 여기 가장 크고, 가장 파괴적인 여섯 내전이 있다.

 


1. 마리우스-술라의 내전

마리우스가 망명한 모습을 그린 그림


로마의 첫 내전은 정치가이자 장군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사이의 무자비한 권력 투쟁에서 비롯되었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마리우스는 술라의 군사적 업적 중 하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마침내 BC 88년에 마리우스가 술라를 제치고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분쟁에서 로마 군단의 지휘권을 획득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영광의 기회를 잃은 것에 화가 난 술라는 군대를 소집해 로마로 진군했다. 어떤 장군도 무장한 채로 도시에 들어온 적이 없었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움직임이었지만 술라는 곧 마리우스의 지지자들을 쓸어버리고 경쟁자를 아프리카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로마에 대한 그의 지배력을 강화한 후, 술라는 군단을 모아 미트리다테스 왕을 쫓아갔다. 그가 떠나자마자 도시는 다시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평민 '포풀라레스'파와 술라의 상류층 '옵티마테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고, 마리우스는 은신처에서 벗어나 도시를 탈환하고 폭력으로 다스렸다.

술라는 4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로마로 진군해야 했다. 마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마리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패주 시킨 후, 술라는 자신을 독재관(딕타토르)으로 세우고 수천 명의 반대파 정치인들과 귀족들을 처형했다. 술라는 BC 79년에 물러나 자발적인 은퇴를 했지만, 그의 짧은 권력 장악은 로마 공화국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공화국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데는 수십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2. 카이사르의 내전

카이사르의 죽음


BC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림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위대한 장군은 갈리아에서의 놀라운 군사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의 오랜 동맹은 쓰라린 경쟁으로 변했다. 훨씬 더 시급한 것은 폼페이우스와 동맹을 맺은 로마 원로원 파벌들이었는데, 그들은 그가 군대를 해산하고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할 것을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맹세하고, 그는 부하들을 규합하여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가 내전에 불을 붙였다.

이후 몇 달 동안 카이사르의 지지자들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북아프리카를 넘나들며 폼페이우스 군대와 교전했다. BC 48년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이때 카이사르는 병력이 훨씬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군대를 압도했다. 폼페이우스는 패배의 여파로 이집트로 도피했지만, 젊은 왕에게 배신당하고 처형되었다. 폼페이우스가 죽자, 카이사르의 승리는 거의 확실해졌다.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마지막 동맹군을 물리친 후, 그는 로마로 돌아와 BC 44년 초에 종신 독재관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3월 15일, 악명 높은 3월의 이데스에 로마 원로원의 도당에게 살해되었다.

 


3.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전쟁

악티움 해전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찌른 공모자들은 자신들이 로마 공화국을 구하고 있다고 믿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무심코 한 행동은 로마 공화국의 완전한 붕괴를 가져왔다. 이 살인은 불안정과 내전의 시기를 촉발했고, 결국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르의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로마 지배권의 주요 경쟁자로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한때 제2차 삼두 정치의 일원으로서 동맹을 맺었지만, BC 32년경에 그들은 서로의 야망과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스캔들 관계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다.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을 설득하여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면서 로마의 승자독식 무대가 마련되었다.

몇 달간의 공작 끝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마침내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맞닥뜨렸다. 안토니우스는 조금 더 많은 함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뛰어난 장군인 아그리파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투가 그에게 불리해지자, 안토니우스는 함대의 일부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쳤다. 두 연인은 1년 후 자살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죽어가는 로마 공화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로마의 첫 번째 황제로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로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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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 황제의 해

네 황제의 해를 지나 정상에 오른 베스파시아누스의 흉상


아우구스투스의 번영하는 통치는 거의 한 세기 동안 지속된 율리오-클라우디아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AD 68년 악명 높은 네로 황제의 자살로 로마는 불과 18개월 동안 네 명의 다른 사람이 제위에 오르는 소란스러운 내전의 시기에 돌입했다. 첫 번째 도전자는 네로가 죽기 직전에 원로원이 황제로 선포한 노령의 스페인 총독 갈바였다. 그러나 그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인해 매우 인기가 없었고, 곧 친위대에게 살해당했으며 전 동맹자인 오토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토에게는 불행하게도, 그의 등극은 다른 통치 지망자들의 부상과 일치했다. 권력을 잡은 지 3개월 만에, 그는 부하들에게 황제로 칭송받던 군사령관 비텔리우스에게 패배하고 쫓겨났다. 비텔리우스는 잔혹하고 식탐이 많은 통치자였으며, 하루에 4번까지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재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유대의 군대는 그들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선포하고, 69년 가을에 그들은 베드리아쿰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비텔리우스의 방어군을 분쇄했다. 비텔리우스는 반나체로 도시를 걸은 뒤에 살해당했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새로운 카이사르로 선포되었다. 잔혹한 방식으로 권력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능한 지도자로 증명되었고 로마에서 비교적 안정된 시기를 주재하였다.

 


5. 3세기의 위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은 위기를 종식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235년, 젊은 로마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라인 강을 따라 원정하는 동안 그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쿠데타는 최악의 시기에 일어났다. 로마는 이미 증가하는 야만 부족들의 습격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제국이 거의 무릎을 꿇을 뻔한 내전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35년 동안, 로마의 제위는 수십 명의 찬탈자들과 장군들이 정신없이 돌아가며 차지했는데, 그들 중 거의 모두가 결국 경쟁자와의 전투에서 죽거나 자신의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설상가상으로, 내전은 끔찍한 전염병 발생과 겹쳤고 고트족, 페르시아인 및 기타 외부 세력의 위협이 증가하였다.

혼란이 가중되면서 제국은 잠시 세 개의 국가로 분열되었다. 이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로마의 적들을 국경 너머로 몰아내고 잃어버린 영토를 재정복 했지만, 그가 죽은 후 상황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 위기는 3세기 후반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련의 획기적인 개혁안을 통과시켜, 네 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테트라르키아(두 명의 상위 "아우구스티"와 한 쌍의 하급 "카이사르")가 로마를 동방과 서방 제국으로 분할하여 통치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6. 사두정치의 내전

밀비우스 다리 전투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는 로마를 단기간에 더 쉽게 통치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여러 명의 황제를 두는 것도 내전의 한 원인이었다. 첫 번째 주요 논란은 306년에 전 통치자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찬탈자 막센티우스가 로마의 황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근위대와 공모했을 때 일어났다. 서방 정제 세베루스가 즉시 로마로 진군하여 그와 맞섰지만, 막센티우스가 퇴위한 아버지를 불러내어 자신의 편에 서게 하자, 세베루스는 부하들에게 버림받고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몇 년 동안, 로마의 지도부는 음모, 모의, 제위 찬탈자들이 얽히고설킨 채로 전락했다. 한때는 무려 6명이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주장하기도 했다. 31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알프스 산맥을 통해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죽였을 때, 이 획책은 마침내 전면전으로 번졌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 황제와 동맹을 맺었지만, 나중에 그에게 등을 돌리고 또 다른 내전을 일으켰다. 324년 마침내 먼지가 걷혔을 때, 사두정치는 소멸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황제였지만 안정은 단지 일시적이었다. 그가 죽은 후 불과 몇십 년 후, 로마는 다시 한번 동부와 서부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출처 :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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