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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오스만제국

쉴레이만 대제

by 금곡동로사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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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쉴레이만 대제는 26세의 나이에 제위를 물려받았다. 술탄 쉴레이만은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한 셀림 1세의 외아들이다. 1520년에 제위에 오른 쉴레이만은 1566년까지 46년 동안 오스만 제국을 통치했다.

젊은 술탄은 곧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16세기 그의 업적 덕분에, 그는 서방 세계에서 "장엄한 쉴레이만"으로 알려졌다. 동방에서 쉴레이만은 그의 법전 때문에 "입법가"라고 불렸다.

술탄 쉴레이만의 결혼과 제위 계승에 관한 그의 결정은 역사 전반에 걸쳐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글에서 쉴레이만 대제에 관한 사실과 그의 업적을 찾을 수 있다.

 


쉴레이만 대제는 젊은 술탄으로 제위에 올랐을 때 위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증조부인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목표를 실현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목표의 기초는 로마 제국과 견줄 수 있는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베네치아와 싸웠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발칸반도로 진군했고, 해군을 이끌고 이탈리아 남부의 오트란토를 정복했다. 메흐메트 2세(정복자)는 그의 궁극적인 목표인 로마에 매우 근접했다.

반면에 쉴레이만의 아버지 셀림 1세는 다른 길을 걸었다. 동쪽으로 진군한 셀림은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와 같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들을 정복했다.

셀림 1세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페르시아인과 맘루크인과 싸웠다. 이 군사 원정 동안, 그는 또한 이슬람 역사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했다. 그 이후 오스만 술탄들은 이슬람의 명예 칭호인 칼리파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반면에 술탄 쉴레이만 대제는 유럽의 정치와 문화 발전을 면밀히 따랐다. 르네상스, 개혁, 지리적 발견은 쉴레이만의 관심사였고 그는 서구 정치에서 지배적인 세력 중 하나가 되기를 원했다.

 


1. 쉴레이만 대제의 업적


술탄 쉴레이만은 처음에 그의 증조부 메흐메트 2세가 실패한 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조직했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곧 그는 동부 지중해의 구호 기사단으로부터 로도스를 빼앗았다.

오스만 제국의 정예 보병인 예니체리는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술탄 쉴레이만의 군대는 빈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쉴레이만 대제의 업적은 그가 의도한 대로 유럽 정치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었다.

술탄 쉴레이만과 서유럽의 완충국가였던 헝가리가 함락되자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은 이웃하게 되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지속될 경쟁 관계를 촉발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1세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지중해에서 패권을 놓고 싸웠다. 이 시기에 오스만 제국의 제독 하이레딘 바르바로사, 드라구트, 피리 레이스는 아프리카의 넓은 땅을 오스만 제국에 합병했다.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는 술탄 쉴레이만의 초기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두 사람은 쉴레이만이 아직 황자였을 때 톱카프 궁전에서 만났다. 그들은 궁궐 안에 위치한 엔데룬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다.

이브라힘 파샤는 술탄 쉴레이만 치세 때 국가 최고위 관료인 대재상으로 승진했다. 그는 그리스 파르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파르갈리 이브라힘"이라고 불렸다. 이브라힘은 서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술탄에게 영향을 미쳤다.

술탄 쉴레이만의 첫 10년 동안의 업적은 큰 추진력을 불러일으켰다. 오스만 제국의 진격은 빈 성문에서 멈출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빈 외곽에 돌아오기까지 150년이 걸리게 된다.

 


2. 술탄 쉴레이만의 동시대인


16세기는 매우 유명한 통치자들의 시대였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 러시아의 끔찍한 이반 4세,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는 술탄 쉴레이만의 동시대인이었다.

술탄 쉴레이만과 프랑수아 1세의 프랑스 오스만 동맹은 유럽 정치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이 동맹은 양국의 이익에 부합했다.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패권에 맞서기를 원했고, 오스만 술탄 쉴레이만 1세는 유럽에서 그의 존재감을 합법화하려고 했다.

 


3. 술탄 쉴레이만의 아내 휘렘 술탄


오스만의 역사를 통틀어 술탄이 공식적으로 결혼한 것은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술탄 쉴레이만은 휘렘과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낳았고, 이 결혼 후에도 일부일처제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휘렘(일명 록셀라나)은 과거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고 현재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루테니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고향이 약탈되는 중에 포로로 잡혀 결국 이스탄불의 궁전에서 끝을 맞이했다.

쉴레이만과 휘렘의 관계는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사랑 이야기 중 하나이다. 삶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낸 쉴레이만은 정기적으로 휘렘에게 편지를 썼다.

술탄 쉴레이만은 많은 오스만 술탄들처럼 수공예 교육을 받았다. 쉴레이만은 숙련된 금세공인이었고 휘렘 술탄을 위해 만든 반지 대부분을 디자인했다. 쉴레이만은 또한 "무히비"라는 필명으로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탄에 대한 휘렘 술탄의 영향으로 하렘 방은 옛 궁전에서 톱카프 궁전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제국의 국정에서 여성의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이는 일부 사료에서 여성 술탄국이라 부르는 시기를 시작했다.

휘렘 술탄이 국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높아지면서 쉴레이만은 재상이자 친한 친구인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쉴레이만이 황태자 무스타파를 처형하는 데 휘렘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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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엄한 세기의 TV 시리즈


술탄 쉴레이만의 치세는 2011년에서 2014년 사이 터키에서 방영된 TV 시리즈 '위대한(또는 찬란한) 세기'의 주제였다. 이 시리즈는 중동, 러시아, 동유럽 국가에서도 방송되어 이 역사 시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터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배우 할리트 에르겐치가 위대한 세기 TV 시리즈에서 술탄 쉴레이만 역을 맡았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쉴레이만의 첫사랑 마히데브란과 그의 다음 아내 휘렘 술탄이었다.

술탄 쉴레이만의 동지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 그의 장남 무스타파, 그의 딸 미흐리마흐 술탄, 그리고 그의 사위 뤼스템 파샤가 이 시리즈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이다.

대본의 대부분은 쉴레이만 대세의 치세에 있었던 사건들과 일치한다.

 


5. 쉴레이만 대제의 유산


술탄 쉴레이만과 그의 측근들은 이스탄불에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이 시기는 제국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커다란 모스크, 목욕탕, 그리고 영묘가 건설될 수 있었다.

미마르 시난이라는 건축 천재가 16세기에 궁전 건축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오스만 건축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그리하여 술탄 쉴레이만, 그의 아내 휘렘 술탄, 그리고 그의 딸 미흐리마흐 술탄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지었다.

이 시기의 건축적 발전은 쉴레이만이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미마르 시난은 쉴레이만의 아들 셀림 2세와 그의 손자 무라트 3세의 통치 기간에도 궁전 건축가였다. 시난은 전성기에 에디르네(이전의 아드리아노플)에 셀리미예 모스크를 지었다.

이 시기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은 이스탄불에 있는 쉴레이만 대제의 모스크인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이긴 하지만, 그 목록은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쉴레이만 대제의 유산은 역사 반도(이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알려진 이스탄불의 핵심 지구) 전역에 퍼져 있다.

 


6. 술탄 쉴레이만의 무덤


술탄 쉴레이만의 말년은 아들들 간의 제위 다툼으로 인해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반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술탄은 고령과 통풍에 시달리면서도 또 다른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술탄 쉴레이만은 약 한 달 동안 지속된 시게트바르 공성전에서 사망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군에 공개하지 않았다. 군대가 수도로 돌아오는 동안, 셀림 2세는 이스탄불에서 제위에 올랐다.

많은 대재상이 술탄 쉴레이만의 오랜 치세 동안 복무했다. 그중 이브라힘 파샤와 뤼스템 파샤는 수년간 자리를 유지했다. 쉴레이만 말년에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뛰어난 관료였다.

쉴레이만의 후계자 셀림 2세와 그의 손자 무라트 3세는 위대한 술탄의 그림자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지혜 덕분에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에 시작된 기세는 계속되었다.

술탄 쉴레이만의 무덤은 구 이스탄불 중심부에 있는 쉴레마니예 모스크에 있다. 같은 무덤에는 쉴레이만 대제의 사랑하는 딸 미흐리마흐 술탄도 있다. 그의 아내 휘렘 술탄은 정원의 두 번째 무덤에 묻혔다.

쉴레마니예 모스크의 무덤들은 고전 오스만 건축에 대한 많은 실마리를 제공한다. 무덤 내에는 16세기의 유명한 장식 중 하나인 이즈니크 타일의 아름다운 예들이 있다.

술탄 쉴레이만의 이스탄불 공헌에 큰 몫을 한 미마르 시난도 그의 주인과 매우 가까운 곳에 묻혔다. 쉴레마니예 모스크 근처에 있는 미마르 시난의 무덤에 방문하는 것도 가능하다.

 

 

 

출처 : IstanbulC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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