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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문명

로마 다음가는 제국의 5대 도시

by 금곡동로사 2022.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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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튼에서 아프리카, 스페인에서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도시들은 로마 세계를 구현했다. 다음은 로마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고대 로마의 도시 5곳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옛 속담이 있다. 실제로, 수세기 동안 로마는 로마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로마는 수도이자 원로원의 소재지였으며, 나중에는 황제가 있었다. 도시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컸으며, AD 1세기 동안 약 100만 명의 주민이 살았다. 그러나 로마는 그 모든 중요성과 웅장함에도 불구하고 고대 지중해 대도시 중 마지막에 불과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기 수세기 전에, 그 위대한 도시들은 문화, 무역, 정치의 중심지였다. 로마가 정복한 후에도, 그곳들은 이전의 영광, 전통, 그리고 자부심을 유지했다. 제국에서 (로마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들로 남았다. 이는 고대 로마의 5대 도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대 로마의 5대 도시

 

1. 알렉산드리아 - 정복자의 도시

로마 제국 시대의 알렉산드리아, 장클로드 골방

 

동방 헬레니즘의 고대 도시들은 그들의 창시자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는 진정한 별을 자랑할 수 있었다. 전설적인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32년에 이집트의 대도시를 세웠다. 지중해 연안의 나일 삼각주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의 새로운 제국 수도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상상했던 도시를 보지 못했다. 설립 직후, 그는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했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그의 장군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알렉산드리아로 가져왔고, 이곳을 새로 건국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수도로 선택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하에서 알렉산드리아는 번영했다. 도시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티레(알렉산드로스가 이전에 파괴했던 도시)를 대체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 시작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서관은 알렉산드리아를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 바꾸어 학자,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를 끌어들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호화로운 영묘는 방문객들에게 도시의 유명한 설립자를 생각나게 했고, 주민들에게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거대한 둑길과 항만 방파제인 헵타스타디온은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장엄한 등대가 위치한 파로스 섬과 도시를 연결했다. BC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5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는 세계적인 대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바닷속, 오시리스 항아리를 들고 있는 사제의 조각상과 스핑크스의 윤곽


알렉산드리아의 지성 및 문화 강국으로서의 지위는 BC 44년 로마가 점령한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본거지이자 유대인 학문의 주요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BC 132년 셉투아긴트(70인역, 성서의 그리스어 번역)가 탄생한 곳이다. 4세기에 고대 도시는 기독교 신학의 중심지이자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로 새로운 중요성을 얻었다. 이 시기에 대도서관의 세라피움(이미 이전 세월 동안 손상됨)이 도시 내 종교 분쟁 동안 기독교 폭도들에게 파괴되었다. 로마 통치의 마지막 세기는 다양한 기독교 파벌들 사이의 내부 투쟁과 내륙 지역의 토착민 소외로 인한 점진적인 쇠퇴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불안정은 619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641년과 646년 무슬림 군대에 의한 도시 정복을 촉진했고, 이로써 로마의 통치는 끝이 났다. 전쟁으로 파괴되지 않은 것은 자연에게 빼앗겼다. 365년 거대한 쓰나미가 도시를 강타하여 궁전 지구를 물에 잠기게 한 반면, 지진으로 인해 점차 파괴된 거대한 등대가 14세기에 사라졌다.

 


2. 안티오키아 - 동방의 보석

안티오키아, 장클로드 골방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 광대한 제국은 그의 장군들 간의 전쟁으로 인해 분열되었다. 디아도코이 중 가장 성공적인 사람은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빅토르)였다. BC 301년에 안티오키아를 세운 사람은 셀레우코스였다. 지중해 근처 비옥한 유역의 오론테스 강에 위치한 새로 설립된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는 곧 고대 세계의 주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안티오키아의 부는 실크로드 서쪽 종착지의 유리한 위치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상인, 예술가, 장인을 끌어들였다. 도시와 항구 사이의 중간에 지어진 휴양 도시 다프네는 셀레우코스 시대와 로마 시대에 부유한 권력층 사람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가 되었다. 다프네 공원에는 순례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인 아폴로 대신전이 있었다.

BC 64년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안티오키아를 합병한 이후, 옛 셀레우코스 제국의 수도는 세 번째 주요 로마 도시이자 로마 동부의 행정 중심지로서 그 중요성을 유지했다. 제국 시대에 안티오키아는 목욕탕, 원형경기장, 그리고 8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장엄한 히포드롬과 같은 공공건물들로 더욱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종종 안티오키아를 방문했고, 더 외딴곳인 알렉산드리아보다 이 도시를 선호했다. 동부 국경 부근의 안티오키아는 중요성이 더욱 증가되었지만, 도시와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역사상 안티오키아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 여러 차례 정복되고 약탈당했다.

 

안티오키아 아폴라우시스 욕장에서 발견된 로마 모자이크, 1930년대 발굴 당시 찍은 사진


도시는 또한 자연재해에 노출되었다. BC 187년에 기록된 첫 지진 이후 안티오키아에서는 적어도 5차례에 걸쳐 큰 지진이 일어났다. 피해는 감당할 수 있었고, 고대 말의 안티오키아는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장엄한 교회들은 제국 전역에서 순례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쇠퇴는 6세기 동안 대화재, 지진, 페르시아의 침공, 전염병 같은 일련의 재난들이 도시의 인구를 크게 감소시켰을 때 시작되었다. 도시는 7세기 중반 아랍인에게 점령당했고, 중세 초기에 비잔틴 제국과 아랍 칼리파국의 경쟁의 장이 되었다. 안티오키아는 1098년 비잔틴 제국과 십자군 군대의 연합 노력으로 기독교의 통제 하에 돌아왔다. 그러나 12세기 말 황제 마누일 콤니노스의 짧은 통치를 제외하고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권 밖에 남아 있었다. 오늘날 이곳은 정교한 로마 모자이크 바닥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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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카르타고 - 아프리카의 여왕

3세기경 절정기의 로마 카르타고, 장클로드 골방


알려진 몇몇 도시들은 파괴되었지만, 불사조처럼 잿더미에서 솟아올랐다. 튀니지 해안의 곶에 세워진 카르타고가 그런 곳 중 하나였다. BC 814년 전설적인 여왕 디도에 의해 세워졌으며, 페니키아 식민지에서 고대 지중해의 가장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 발전했다. 도시는 주로 무역을 통해 부를 얻었고, 화려한 자주색 염료를 수출했다.

BC 4세기와 3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새로운 도시"(페니키아어로 카르트 하다쉬트)는 지중해 서부의 주요 도시였다. 비르사 성채 주변에 위치한 도시의 4개 주거 구역에는 대형 극장과 수많은 신전들, 그리고 카르타고의 시장이자 공공 생활의 중심지인 광대한 아고라가 있었다. 바다를 통해 도착한 방문객들은 거대한 쌍둥이 항구, 무역항, 그리고 카르타고 해군력의 본거지인 원형 군항에 놀라곤 했다. 해군은 도시 국가 권력의 중추이자 팽창의 주요 수단이었으며, 카르타고가 북아프리카 대부분, 스페인, 시칠리아, 사르데냐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게 했다. 이 팽창주의 정책은 카르타고를 또 다른 부상하는 지역 강국 로마와 충돌하게 했다. 이어진 세 번의 포에니 전쟁은 BC 146년 카르타고의 패배와 파괴로 끝이 났다.

 

145-162년경 카르타고의 안토니누스 욕장 유적


그러나 도시는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 도시로서 재건되었다. 더 이상 수도가 아닌 카르타고는 웅장함을 유지했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고대 로마 도시가 되었다. 옛 성채는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에 바쳐진 큰 신전으로 꾸며졌다. 로마인은 목욕탕, 극장, 원형경기장, 그리고 커다란 히포드롬을 포함한 수많은 공공건물을 지었다. 카르타고의 이미 풍요로운 농업 생산은 더 증대되었고, 카르타고의 내륙은 제국의 빵 바구니가 되었다. 4세기에 카르타고는 로마 아프리카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 439년 반달족의 정복은 도시의 화려함을 훼손하지 않았고, 533년 비잔틴 제국이 점령한 이후에도 카르타고는 주요 농업 지역으로서 번영을 계속했다. 도시는 698년 무슬림 군대에 의해 두 번째 파괴를 겪었고, 이후로는 회복하지 못했다.

 


4. 에페소스 : 아나톨리아의 문화 수도

에페소스, 장클로드 골방


전설에 따르면, 에페소스는 신화 속의 아마존이 세웠으며 그 여왕 중 한 명인 에페시아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그러나 BC 7세기 킴메르인의 공격 중에 그리스 정착지가 파괴되었다는 도시의 존재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남아 있다. 도시는 빠르게 회복되었고, 리디아 왕들의 통치 하에, 에페소스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크로이소스 왕의 치세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도시는 계속 번성하여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도시는 옛 항구의 퇴적과 유해한 습지의 출현으로 인해 2 킬로미터 내륙의 현재 위치로 재정착해야 했다.

BC 129년, 로마인은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으로부터 에페소스를 물려받았다. BC 88년에 일어난 짧은 반란을 제외하면, 도시는 이어지는 세월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된다. 로마 제국의 일부로서, 에페소스는 부와 영향력을 유지하며 지역 수도가 되었다. 장엄한 켈수스 도서관(그 유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볼 수 있음)은 에페소스를 학문과 철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2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은 로마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 극장은 AD 57년에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유명한 항의 장소였다. 초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곧 초기 기독교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고, 제국 내에서 가장 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

 

AD 110년경 에페소스의 켈수스 도서관 파사드


262년에 고트족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포함하여 에페소스를 파괴했다. 도시를 재건하려는 제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에페소스는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인구가 점차 줄어 도시 지역이 축소되었다.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마지막 기념비적인 건물인 성 요한 대성당을 지었다. 중세 초기에는 에페소스 항구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1090년 셀주크가 에페소스를 점령했을 때, 그곳은 단지 작은 정착지에 불과했다. 14세기 잠깐의 화려함 이후, 이마저도 버려졌고, 한때 위대했던 도시의 진정한 위치는 1869년까지 숨겨져 있었다.

 


5. 콘스탄티노폴리스 : 마지막 고대 로마 도시

10세기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방파제와 히포드롬, 대궁전 및 멀리의 아야 소피아, 앙투안 엘베르


목록에 있는 고대 로마 도시 중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중요하다. 또한 로마가 건설한 유일한 도시이며, 로마를 능가한 도시이기도 하다. 고대 비잔티온의 장소 위에 세워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330년에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세워졌다. 설립자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지중해와 흑해 사이의 중요한 통로인 보스포루스 해협 연안의 반도를 그의 새로운 도시를 위한 최적의 장소로 선택했다.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곧 번영하는 대도시로 거듭났다.

천연 항만인 골든 혼 덕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중요한 선박 항로와 육로 무역을 통제하는 지중해의 상업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또한 웅장한 건축물로도 알려져 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도시를 로마와 경쟁할 뿐만 아니라 능가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건물을 마구 짓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은 5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히포드롬, 넓은 정원과 안뜰이 있는 대궁전, 커다란 포룸을 연결하는 완전히 열주로 둘러싸인 메인 거리인 메세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수도교는 고대 도시의 증가하는 인구를 위해 물을 공급했고, 거대한 지하 수조에 저장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많은 새 건물을 짓는 것 외에도, 제국의 전역에서 기념물과 조각상을 번영하는 수도로 옮겼다. 그의 후계자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건축 걸작들로 도시를 풍요롭게 했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에 세워진 아야 소피아 대성당이었다.

 

4-5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


천 년 이상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도시의 부, 사치, 그리고 이국적인 무역 시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곳은 강력한 비잔틴 제국의 중심지였고, 제국의 모든 신민에게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그곳의 교회들은 방문자들을 너무나 놀라게 했고, 루스 사절들은 아야 소피아의 화려함을 보고 사람들을 정교회(당시에는 정통파, 대분열 이후 정교회)로 개종시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부는 "도시의 여왕"을 세계에서 가장 탐나는 도시 중 하나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점령하려고 했지만, 거대한 육상 성벽에 의해 저지당했고, 기념비적인 성벽은 역사상 단 한 번 무너졌다. 덧붙여서,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군대에 함락된 것은 중세 로마 제국의 종말과 마지막 고대 로마 도시의 몰락을 의미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새로운 통치자들 아래에서 수도의 지위를 유지했고, 콘스탄티니예, 그리고 후에 이스탄불로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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