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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오스만제국

휘렘 술탄 - 황후가 된 술탄의 후궁

by 금곡동로사 2022.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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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렘 술탄은 그녀의 고향에서 사로잡혀 오스만 제국의 노예 시장에 팔렸다. 그녀는 술탄의 아내가 되도록 운명 지어졌다.


휘렘 술탄의 이야기는 오스만 제국의 풍부한 역사의 독특한 측면이다. 록셀라나로도 알려진 휘렘은 동시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여전히 현대 청중에게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살았다. 휘렘 술탄은 젠더 정치의 선구자였고, 그녀의 이야기는 신비롭고 초라한 시작으로 인해 더욱 흥미롭다. 그녀의 지위를 이방인 하렘 노예에서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 쉴레이만 1세의 선택된 황후로 끌어올린 휘렘 술탄은 어떠한 개인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는가?

 


휘렘 술탄 : 루스에서 온 하녀

쉴레이만 대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내 록셀라나의 옆얼굴을 묘사한 흉상 초상화, 1540년대 마테오 파가니

 

휘렘 술탄의 초기 생애 대부분은 추측이거나 그야말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은 아나스타샤 또는 알렉산드라 리소프스키 또는 리소프스카였을 수 있으며, 그녀는 정교회 기독교 사제의 딸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1502년에서 1506년 사이에 태어났다고 받아들여진다.

더 확실한 것은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것이다. 휘렘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일부이자 당시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던 루테니아 지역의 노예 습격에서 크림 타타르족에게 붙잡힌 것으로 믿어진다.

타타르족은 이 지역을 정기적으로 습격하여 사람들을 붙잡아 노예 시장에서 팔기 위해 크림 반도의 카파(페오도시야)로 끌고 갔다. 휘렘 술탄은 이러한 사람 중 하나였다. 오스만 제국은 카파의 노예 시장을 소유했다. 여기에서 휘렘은 오스만 제국의 심장부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또 다른 노예 시장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그 여정은 바닷길로 약 열흘이 걸렸다.

 

쉴레이만 대제, 16세기 무명의 화가


이 단계에서 휘렘은 10대 소녀였을 것이고, 이는 그녀를 구원하는 은총이 되었을 것이다. 젊고 매력적인 여성 노예들은 노예 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졌다. 따라서 그들은 매력과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꽤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가 술탄의 아들이자 그의 어린 시절 친구인 쉴레이만을 위한 선물로 휘렘을 산 것은 이 노예 시장에서였다. 루스 노예들은 그들의 창백한 피부와 고운 이목구비로 높이 평가되었고, 파샤는 쉴레이만이 여자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휘렘은 종종 우크라이나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서 흔한 특징인 빨강 머리로 묘사되며, 오스만 제국의 진원지에서 이국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기독교인인 것은 휘렘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또 다른 요소였다. 술탄은 두 개의 강력한 무슬림 가문이 혼인을 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왕조 투쟁을 피하기 위해 기독교 여성들에게서 아들을 낳는 것이 관례였다. 노예로서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휘렘의 행운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운보다는 그녀의 타고난 지능, 적응 능력, 그리고 정치적 수완과 더 관련이 있었다.

 


술탄 집안의 후궁

쉴레이만 대제의 휘장(투그라), 16세기

 

젊은 루테니아인 노예는 황실에 들어오자마자 두 개의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이 이름 중 하나는 "루테니아 출신의 하녀"를 의미하는 "록셀라나"였으며, 일부 베네치아 대사가 지어주었다. 그녀의 다른 이름은 역사가 그녀를 가장 잘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튀르크어로 "기쁜" 또는 "웃는 자"를 의미하는 "휘렘"으로 불렸다. 이 이름은 그녀의 천성과 왜 쉴레이만 대제가 그녀와 함께 있음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궁전에 들어오는 많은 여성 노예들은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된다. 휘렘에 대한 한 이야기는 그녀의 첫 번째 역할이 세탁부였음을 보여준다. 다소 낭만적인 형태의 사건에서는, 궁전에서 휘렘이 노역하는 곳을 지나가던 쉴레이만이 옛 루스 민요를 부르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하렘, 1849년 존 루이스

 

그는 그녀와 대화를 하기 위해 멈췄고, 그녀의 해맑은 성격과 대화 능력에 놀랐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화를 통해 그녀의 성격에 대해 말해준다.

다른 이야기에서 쉴레이만의 어머니 하프사 술탄은 아들이 즐거운 밤을 보내게 하기 위해 휘렘을 선택했다고 한다. 술탄의 하렘에는 수백 명의 여성이 있었고, 이 여성들이 술탄을 직접 만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휘렘은 목욕하고, 제모하고, 향유를 바르고,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좋은 옷을 입었을 것이다.

 


새로운 총애

튀르크 하렘의 한 장면, 1654년 프란츠 헤르만, 한스 게밍어, 발렌틴 뮐러

 

그들의 첫 만남이 끝났지만, 휘렘은 쉴레이만과 하룻밤을 보내도록 운명 지어졌다. 베네치아 대사들은 그녀가 매력적이지만 아름답지도, 날씬하거나 우아하지도 않다고 묘사했다. 그녀의 고운 루스인 용모, 특이한 붉은 머리, 섬세함, 그리고 즐거운 태도의 결합은 쉴레이만이 휘렘을 몇 번이고 그와 함께 있도록 불렀기 때문에 분명 매력적인 조합이었을 것이다.

쉴레이만은 이미 그의 배우자이기도 한 총애하는 여성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히데브란 술탄이었고, 쉴레이만은 그녀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이제 휘렘이 술탄의 새로운 총애자로 궁정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어느 날 마히데브란은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휘렘의 얼굴에 상처를 내며 공격했다. 그날 밤 쉴레이만이 휘렘을 불렀을 때, 그녀는 자신의 용모 때문에 그의 부름을 거부했다. 호기심이 생긴 쉴레이만은 그녀를 재차 불렀고 그녀의 얼굴에서 마히데브란이 남긴 자국을 보았다. 술탄이 총애하는 후궁으로서 휘렘의 지위는 이 사건 이후 더욱 공고해졌다. 이 사건들은 휘렘이 얼마나 영리했는지에 대해 매우 잘 말해 주고 있으며, 그녀가 본능적으로 정치 게임을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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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어머니, 통치자

쉴레이만 대제의 딸 미흐리마흐 술탄 1522-1578년

 

쉴레이만 대제는 1520년에 술탄이 되었고, 이는 휘렘이 그의 후궁이 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였다. 그녀는 이듬해 아들 메흐메트를 낳았다. 1534년 쉴레이만의 어머니 하프사 술탄이 사망하자 그녀가 주재하던 하렘에 빈자리가 생겼다. 또한 하프사의 죽음은 쉴레이만이 이제 진정으로 독립했으며, 따라서 역사의 흐름을 바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533년에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쉴레이만은 휘렘과 결혼하기 위해 그녀를 후궁에서 해방했다. 이슬람 율법은 술탄이 노예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기에 그는 휘렘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그녀를 해방시켜야 했다.

한 제노바 대사는 날짜가 기입되지 않은 편지에 이 중대한 사건을 기록했다. "이번 주 이 도시에서 술탄 역사상 유례없는 매우 특별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대군주 쉴레이만이 록셀라나라는 루스 출신의 여종을 그의 황후로 삼았습니다."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

 

휘렘이 그녀의 남편에게 또 다른 아들을 낳았을 때 제국은 다시 한번 흔들리게 된다. 이전에는 후궁이 술탄에게 아들 한 명만 낳는 것이 관례였고 후궁은 아들의 양육과 교육에 전념했다. 그러나 휘렘과 쉴레이만 사이에는 다섯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술탄은 최대 네 명의 아내를 취할 수 있고 그가 원하는 만큼 많은 후궁을 둘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쉴레이만은 휘렘에게 충실했고 다른 어떤 여성과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이 첫 번째 정치적 직책에 오르자(관습상, 후궁은 정치와 종교 문제에 대해 그녀의 아들에게 조언할 수 있도록 교육받았다) 술탄의 첫 번째 배우자 마히데브란은 아들을 따라 하렘을 떠났고, 이로 인해 휘렘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하렘의 우두머리로 남게 되었다. 결국, 휘렘은 전례 없는 또 다른 움직임으로, 그녀가 하렘을 떠나 톱카프 궁전에서 그와 함께 있는 것을 허락하도록 남편을 설득했고, 그곳에서 그녀는 그의 옆에 스위트룸(여러 방이 연결된)을 받았다.

 


사랑 및 오스만 제국의 영향

콘스탄티노플, 1901년 잉글랜드 교회사 삽화, 아서 레인 목사

 

휘렘 술탄은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사랑의 시를 나누었고, 의심할 여지없이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군사 캠페인을 위해 떠나 있을 때, 그는 그녀에게 국내 정세에 대해 계속 알리는 일을 맡겼다. 심지어 휘렘이 당시 대재상이었고 이제는 그녀의 경쟁자였던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를 그의 억제할 수 없는 야심 때문에 죽게 한 것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추측도 있다.

1515-20년경 티치아노의 공방에서 그린 여인의 초상(휘렘 술탄으로 받아들여짐)

 

휘렘은 궁정의 음모와 모의로부터 자신과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기지(機智)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교활하기보다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젊은 루테니아 노예들이 하렘에 들어왔을 때 짜증을 내며, 남편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도록 다른 귀족들과 결혼하게 할 정도로 그녀의 것을 보호했다.

하지만 휘렘에게는 자신의 것을 돌보는 것 이상의 일이 있었다. 휘렘과 쉴레이만 사이의 높은 신뢰 수준 덕분에, 그녀는 도시의 공공 음료 및 목욕 시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급식소 설립과 같은 자선 사업, 그리고 순례자를 위한 모스크 및 숙소 건설과 같은 종교 사업을 주재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휘렘은 예술 후원자이기도 했다.

 


휘렘 술탄과 쉴레이만 대제의 진정한 사랑 이야기

이스탄불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쉴레이만 대제와 휘렘 술탄 사이의 현존하는 여러 러브레터는 이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나눈 진정한 사랑을 보여준다. 이런 편지 중 하나에서 휘렘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당신 곁에서만 평온을 찾습니다. 내가 당신 옆에 있을 때의 행복과 기쁨은 말과 잉크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도 그에 못지않은 열정이 담겨 있었다.

드러났듯이, 휘렘은 그녀가 죽은 후에도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다시 한번 바꾸게 된다. 술탄 바로 옆에 있고 싶은 그녀의 소원은 삶에서뿐만 아니라 죽음에서도 이루어졌다. 그녀는 1558년에 사망하여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의 영묘에 안장되었고 8년 후 술탄도 가까운 영묘에 묻혔다. 그다음 세기는 "여성 술탄국"으로 알려지게 되며, 이 시기에는 황실의 아내와 어머니가 그녀들의 황실 남성에 대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는 모두 이름 없는 루스 노예의 유산으로 인한 것이었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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