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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오스만제국

오스만 제국 역사 지도 - 1편 건국 술탄들

by 금곡동로사 2022.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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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3년경의 지중해 동부. 진녹색은 1300년대 오스만의 영토를, 녹색 점선은 1326년까지 정복한 지역을 나타낸다. 연두색은 튀르크인의 땅이며 비잔틴 제국은 1204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이후 라틴제국 및 여러 계승국으로 분열되었다가 1261년 막 회복한 상태였다.

 

 

1299년경-1323/4년 오스만 1세

1563년에 묘사된 오스만의 세밀화. 오스만 가지는 오스만 공국(또는 토후국)의 창시자이지만 역사적 사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의 통치기에 기록된 문헌은 없으며 그의 생애는 15세기까지 기록되지 않았다. 13세기 후반에 등장한 많은 베이리이(공국) 중 하나였고 소아시아 북부 비티니아 지역에 위치하여 허약한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에 좋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스만의 치세에 정복한 영역. 13세기말까지 오스만이 정복한 지역은 빌레지크, 예니셰히르, 이네귈, 야르히사르의 비잔틴 성이다. 한편, 셀주크의 권위가 무너지자 쿨라카히사르와 에스키셰히르의 요새를 점령하고 예니셰히르를 수도로 삼았다. 1302년에는 니카이아 부근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고 경계 지역 가까이에 군대를 배치했다. 그의 마지막 원정은 부르사 공성전이며 도시를 점령하기 전인 1324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1323/4-1362년 오르한

16세기에 그려진 오르한 가지의 세밀화. 쇠위트에서 오스만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스만 베이리이의 2대 군주이다. 그의 치세 초기는 아나톨리아 북서부 대부분을 정복하는데 에너지를 집중했다. 푸르사(부르사)를 공략하던 중 부친이 사망하자 즉위하였고 도시를 차지한 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1341-47년 요안니스 5세 팔라이올로고스 황제의 즉위를 둘러싸고 일어난 비잔틴 내전에서 그는 큰 이득을 얻게 된다.

 

 

 

 

 

오르한 치하에서 확장한 영토. 1329년 6월 10-11일에 오르한이 이끄는 오스만군 8천 명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이끄는 비잔틴군 4천 명이 니코메디아 부근에서 충돌한 펠레카논 전투에서 오스만군이 승리했다. 이제 비잔틴은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1331년에는 니카이아가, 1337년에는 니코메디아가 정복되었다. 1345-6년에는 카라시 베이리이를 합병하면서 마르마라해와 접한 아나톨리아 지역을 차지했다.

 

갈리폴리 반도의 침페 성 위치.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를 지지한 오르한은 그의 딸 테오도라와 혼인했다. 요안니스 6세가 공동 황제(1347-1354년)에 오르자 오르한은 1352년에 갈리폴리 공략을 허락받았고 1354년에는 침페 성을 얻었다. 오르한은 갈리폴리와 그 주변을 점유하여 트라키아 군사작전의 발판으로 삼았고 1356년 요안니스 5세는 오스만이 차지한 영토를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은 경쟁 튀르크 공국들에 비해 상당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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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2-1389년 무라트 1세

무라트 1세 "휘다벤다가시"(제왕)는 오르한 가지와 닐뤼페르 하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형 쉴레이만 파샤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다. 1363년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에디르네로 개명했으며, 발칸반도의 많은 부분을 오스만의 지배하에 두면서 남동유럽의 영토를 더욱 넓혔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군주들뿐만 아니라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5세에게도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오스만 술탄국을 아나톨리아(소아시아)와 루멜리아(발칸반도) 두 속주로 나누었다.

 

 

 

무라트 1세가 넓힌 영토와 그 속국들. 무라트의 첫 주요 공세는 1362년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정복한 것이다. 도시를 정복한 뒤 에디르네로 개명하고 1363년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사실, 오르한이 트라키아를 차지할 때만 해도 기독교 유럽인들은 이를 불쾌해했지만, 무라트가 에디르네를 장악하자 그들은 오스만 술탄국이 유럽을 정복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육로는 차단되었고 제국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해상 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사브와 십자군 당시의 발칸반도. 아비뇽 교황청의 요청을 받은 사브와 백작 아마데우스는 1365년에 동쪽으로 떠났다. 교황은 헝가리의 러요시 1세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왕국은 1366년 봄 튀르크에 대한 연합 공격을 준비했다. 1366년 봄, 비잔틴의 요안니스 5세는 군사 지원을 위해 헝가리 궁정으로 가서 자신과 아들들을 대표해서 카톨릭으로 바꿀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는 돌아가는 길에 갇히거나 불가리아 군대에 포위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 소식은 십자군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아마데우스는 함대를 이끌고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향했고 8월 22일 겔리볼루(갈리폴리)를 공격하여 26일 도시와 성채 모두 장악했다.

 

사브와 십자군의 불가리아 원정. 십자군 함대는 9월 4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아마데우스는 요안니스 5세에게 대사를 보냈고 황제는 비딘(이전 지도 참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후 헬레나 칸타쿠제네가 불가리아 원정을 위한 자금을 지원했고, 10월 4일 함대는 불가리아로 향했다. 10월 20일 네세버르(메셈브리아)와 요새가 함락되어 도시는 약탈당했고 사람들은 학살되었다. 이후 포모리에와 부르가스 만을 장악했고 25일 도브루자 전제 공국의 바르나에 도달하여 잠시 지체하는 동안 에모나를 점령했다. 불가리아와의 협상이 11월 중순까지 계속되었고 11월 18일 바르나 포위를 풀고 네세버르로 철수했으며 요안니스는 귀국할 수 있게 되었다. 1367년 1월 초 백작은 그의 궁정을 소조폴리스로 옮겼고 1월 28일 마침내 황제가 그곳에 도착했다.

 

세르비아의 부카신 므른야브쳬비치 왕과 우글예샤 전제 공국의 영토. 오스만의 확장에 대항하기 위해 우글예샤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려 했지만 비잔틴과 불가리아의 지원은 없었고, 세르비아 영주들은 서로 다투느라 바빠서 부카신 외에는 지원 세력이 없었다. 우글예샤는 오스만군 대다수가 아나톨리아로 진군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카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1371년 9월 에디르네로 진격했다. 5만-7만 명의 세르비아군이 마라차 강 부근의 오르메니오에 이르렀을 때 무라트는 소아시아에 있었다. 라라 샤힌 파샤가 이끄는 800-4000명 규모의 오스만 수비군이 야습을 하여 부카신 왕과 우글예샤 군주를 포함한 세르비아군 수천 명을 죽였으며, 수천 명이 마라차 강에서 익사했다. 

 

마라차 강의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일부가 오스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네마니치 왕조가 끝나기 전에 이미 세르비아는 많은 공국으로 나뉘었고 1371년 왕조가 종식되자 분열과 내분은 더 가속화되었다.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시슈만은 속국 지위를 받아들이고 누이를 에디르네의 하렘으로 보냈으며, 비잔틴의 요안니스 5세는 봉신 지위를 받아들였다. 이후에도 불가리아는 지속적으로 침탈당했고 마케도니아의 세르비아 군주들은 무라트 휘하로 들어갔다.

 

두브라니차 강 위로 언덕 주위에 페트루스 요새가 있었다. 1380년 여름 또는 1381년 12월 오늘날의 세르비아 파라친 부근의 두브라니차 강에서 라자르 군주(아래 지도 참조)의 세르비아군과 오스만군이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오스만군을 막아내면서 튀르크는 1386년까지 세르비아로 진격하지 못했다.

 

1373-1395년 발칸 중부의 세력도. 1385년 무라트는 불가리아의 소피아를 점령하여 니슈를 향한 길을 열었다. 9월 18일에는 알바니아 루슈녀 부근의 사브라 평야에서 오스만군과 세르비아군이 충돌하여 오스만이 승리했으며,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영주 대부분은 봉신이 되었다. 1386년 니슈를 차지한 무라트는 아마도 라자르 군주에게 봉신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했을 것이다. 1387년 아나톨리아 문제로 무라트가 발칸반도를 떠나자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다시 대항했다. 라자르는 보스니아 왕국의 트브르트코 1세와 동맹을 맺고 니슈 서쪽의 플로츠니크에서 오스만군을 물리쳤다. 기독교 군주들의 승리에 힘입어 시슈만은 불가리아의 독립을 다시 주장했다. 

 

1388년 아나톨리아에서 돌아온 무라트는 불가리아에 대한 전격 작전을 펼쳤다. 그런 다음 라자르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요구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보스니아 왕국의 트브르트코 1세와 북마케도니아 및 코소보의 통치자이자 사위인 부크 브란코비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8월 26일경 대공 블라트코 부코비치 코사차가 이끄는 보스니아 왕국군 7천 명과 라라 샤힌 파샤가 이끄는 1만 8천 명의 오스만군이 두브로브니크 북동쪽의 빌레차 마을 부근에서 충돌하여 오스만군이 패배했다.

 

1389년 6월 15일 성 비투스의 날에 무라트 1세가 직접 지휘하는 오스만 군대와 세르비아 군주 라자르가 이끄는 세르비아 군대가 격돌했다. 오스만군은 27,000-40,000명 규모로 정교회군 12,000-30,000명보다 더 많았으며 전투는 양측이 모두 거의 괴멸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라자르와 무라트 모두 전사했으며, 오스만군은 엄청난 사상자로 인해 세르비아군을 전멸시키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병력이 너무 적게 남았고, 튀르크는 동방에 더 많은 병력이 있었다. 전투 이후 복속되지 않았던 세르비아 공국들이 오스만 술탄국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서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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