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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오스만제국

오스만 제국 역사 지도 - 2편 좌절과 내홍

by 금곡동로사 2022.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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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9-1402년 바예지드 1세

크리스토파노 델알티시모가 묘사한 바예지드의 초상화. 1360년경 태어난 바예지드는 1389년부터 1402년까지 오스만 술탄으로 있으면서 영토를 확장한 속도로 인해 이을드름(번개)이라는 별칭을 가졌고, 술탄이 룸(Sultan-i Rûm) 칭호를 채택했다. 룸은 로마 제국의 옛 이슬람식 이름이다. 1396년 니코폴리스(오늘날 불가리아 니코폴)에서 십자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며 1403년 3월에 사망하자 오스만에서 내전(인테르 레그눔)이 발발했다.

 

 

1389년의 오스만 술탄국. 아버지 무라트 1세가 죽은 뒤 술탄이 된 바예지드는 공격에 분노하여 모든 세르비아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별칭답게 그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남부를 급습하여 승리를 거두고 대부분의 영주들이 봉신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남쪽에서 튀르크군이 나타나자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는 반(反) 오스만 연합을 위해 발칸 동맹들을 찾았다.

 

바예지드 즉위 당시 영토(진녹색선)와 1396년까지 확장된 영토(다홍색선). 불가리아의 시슈만이 헝가리, 왈라키아, 비딘 세력과 비밀 회동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예지드는 터르노보를 포위하여 함락시켰고, 시슈만은 니코폴리스로 도망쳤다. 결국 도망친 도시가 점령되면서 시슈만은 참수되었고, 그의 영지는 술탄국에 합병되었다. 바예지드의 화를 피한 비딘은 속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불가리아를 거칠지만 효과적으로 처리한 바예지드는 1380년대에 봉신이 된 테살리아와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관심을 돌렸다.

 

1396년까지 오스만의 확장. 모레아의 끊임없는 다툼은 바예지드의 개입을 필요로 했다. 그는 1394년 세레스에서 발칸의 모든 봉신을 소집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으며 그 봉신 중에는 비잔틴 황제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와 세르비아 군주 라자레비치(라자르의 아들)가 있었다. 발칸의 소유권이 술탄에게 있음을 확인했지만 세레스 협정은 깨졌고 화가 난 오스만 통치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봉쇄하고 테살리아를 병합했으며 1395년 모레아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벌였지만 왈라키아에서 일어난 사건 덕분에 그들은 화를 면했다.

 

미르체아의 왈라키아 공국 영지. 바예지드가 그리스에 묶여 있는 동안 미르체아는 다뉴브 강을 넘어 오스만 영토를 침입했다. 이를 응징하기 위해 세르비아 봉신 군대를 포함한 술탄의 군대가 1395년 왈라키아를 공격했지만 로비네에서 튀르크군이 패배했다. 승리한 미르체아는 오스만의 추가 개입을 피하기 위해 봉신 지위를 받아들였고, 술탄은 도브루자를 합병하고 통치 계승권을 가진 블라드 1세를 지지한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미르체아가 완전한 통치권을 되찾기까지 2년간 내전이 벌어졌다.

 

오늘날 유럽 지도에 표시된 다뉴브 강. 1396년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는 마침내 오스만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들의 목적은 발칸반도에서 오스만을 몰아내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경유하여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거쳐 팔레스타인과 성지를 해방한 뒤 바다를 통해 유럽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주로 헝가리 기사와 프랑스 기사로 구성되었지만 왈라키아군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마르마라 해에서 튀르크를 봉쇄할 베네치아 함대와 다뉴브 강을 항해하여 왈라키아에서 십자군과 만날 베네치아 함대가 마련되었다. 명목상 지기스문트가 이끌었지만, 지휘관들의 결속력이 약했다.

 

십자군이 철문 협곡을 건너는 데 8일이 소요되었다. 부더(부다페스트의 서안)에서 합류하기로 한 십자군은 전위가 도착한 지 한 달 이상이 지난 7월에 후위가 도착했다. 식량을 실은 70척의 베네치아 선박이 다뉴브 강으로 보내졌고, 오스만 함대와 베네치아 함대의 교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오스만 군대는 대부분 유럽 대륙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에 바예지드가 나타날 것이라고 확신시켜주었고, 장거리 진격을 하기보다 튀르크군이 오도록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조언했지만 프랑스와 동맹군은 이를 거부했다. 

 

다뉴브 십자군의 경로. 십자군은 미르체아의 왈라키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진군했다. 무슬림 영토에 진입한 십자군은 약탈과 학대가 증가했다. 독일을 통과하면서 주기적으로 약탈과 강간을 일삼은 것으로 기록되었고, 이교도 영지에 진입한 프랑스군은 그들의 부도덕과 신성모독, 술 취함과 창부들과 며칠씩 누워있는 등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았다. 무혈입성한 비딘을 지나 오랴호보에서 주민들이 성문을 열고 헝가리 왕에게 항복했지만 프랑스군은 이를 무시하고 마을을 약탈하고 학살했다. 그들은 9월 12일 니코폴리스 요새에 도달했다.

 

십자군이 나타났지만 니코폴리스의 오스만군은 바예지드가 원군을 이끌고 올 것으로 확신했고 장기간의 공성전을 버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성병기의 부족, 성벽에 도달하기까지 가파른 경사, 강력한 요새는 성을 난공불락으로 만들었다. 십자군은 봉쇄를 위해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강의 선박들과 함께 포위전에 들어갔다. 2주가 흐르면서 방심한 십자군은 초병조차 세우지 않았고 이때 바예지드는 십카(십첸스키) 고개를 지나는 강행군 중이었다. 정찰을 통해 이를 알게 된 십자군은 작전 회의를 열었고 자신만만한 프랑스군은 돌격을 준비했다. 지기스문트가 불과 6시간 거리에 바예지드가 있다는 소식을 알렸을 때 저녁 식사를 하며 술에 취해 있던 십자군은 혼란에 빠진 상태로 급하게 전투를 준비했고, 경비병의 부족을 이유로 포로를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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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군이 돌격하여 튀르크 전열의 징집병을 격파하고 보병대로 진격했지만 궁수들의 화살과 날카로운 말뚝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말의 배에 말뚝이 박히자 기사들은 내렸고, 말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말뚝을 끌어올리는 행동을 취했다. 그들에게 대열을 정비하기 위해 잠시 멈춰서 휴식을 취하고 헝가리군의 지원을 기다리도록 권고했지만 혈기 넘치는 기사들은 적의 격파와 추격을 고집했다. 기록에 따르면, 절반의 프랑스군이 말뚝에 의해 말에서 내렸다고 한다. 걸어서 언덕에 도달한 그들은 시파히(튀르크 기사) 부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은 프랑스 기사들은 비탈을 따라 도망쳤다. 결국 부르고뉴의 장이 포로가 되자 나머지 프랑스군도 항복했다.

 

니코폴리스에서 포로들을 처형한 것은 십자군의 오랴호보 학살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십자군의 참사 이후, 제노아에 대한 세력 다툼에서 프랑스에 밀려난 밀라노의 군주 지안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오를레앙 공작에게 출가한 자신의 딸 발렌티나 역시 이자보 왕비의 음모로 파리에서 추방된 데 앙심을 품고 십자군 정보를 오스만 측에 넘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바예지드는 스라치미르가 십자군이 비딘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그의 영토를 침공하여 포로로 잡고 영토를 병합했다. 비딘이 함락되면서 불가리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오스만의 직접 정복으로 완전히 사라진 최초의 주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니코폴리스의 뒤를 이어 바예지드는 헝가리, 왈라키아, 보스니아를 공격했다. 그는 알바니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남은 알바니아 북부 영주들을 속국으로 몰아넣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새로운 반쪽짜리 포위전이 시작되었지만, 1397년 마누일 2세가 술탄에게 미래의 모든 비잔틴 황제들을 승인하도록 합의하자 포위는 해제되었다. 이후 바예지드는 경쟁 튀르크 지역의 지속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소환되었고, 발칸반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바예지드는 라자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를 포함한 발칸의 속국 군대로 구성된 군대를 데리고 갔다. 그는 곧 중앙아시아의 통치자 티무르의 아나톨리아 침공에 직면하게 된다. 1400년경, 티무르는 중동에 입성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몇몇 마을을 약탈하며 오스만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1400년 8월, 티무르와 그의 무리는 시바스 마을을 불태우고 본토로 진격했다. 오스만군이 유럽 원정을 하고 있던 1402년 여름, 티무르가 군대를 이동시키자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봉쇄를 풀고 앙카라로 진군했다.

 

앙카라 전투 초기 배치도. 오스만군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피곤과 갈증을 느꼈지만, 쉬거나 회복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장군들이 산지로 물러나 여름 동안 수세를 취하면서 적을 끌어들이라는 조언을 했지만 바예지드는 공세를 위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한편, 티무르군은 몰래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했고 튀르크군의 후방에 위치해 있었다. 티무르군은 버려진 천막과 수원을 이용하여 오스만군이 차지했던 곳과 같은 장소에 진을 쳤다. 많은 기병과 32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포함하여 총 14만 명에 이르는 티무르군은 티무르가 중군을, 아들 미란과 루흐는 각각 우익과 좌익을, 손자들이 선봉을 맡았다. 8만 5천-12만 명의 오스만군은 바예지드가 예니체리와 중군을, 아들 쉴레이만이 최정예 병력으로 우익을, 스테판 라자레비치는 좌익을, 아들 메흐메트는 후위를 맡았다.

 

오스만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고 티무르군의 기마 궁수들이 화살을 퍼부었다. 수천 명이 죽고 많은 군사가 티무르군에 항복했다. 스테판의 기사들은 티무르군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대열을 세 차례나 뚫었다. 그가 바예지드에게 전장을 벗어나라고 조언할 때마다 술탄은 이를 거절했다. 세르비아군은 바예지드의 아들 중 하나와 보고를 적으로부터 지켜낸 뒤 콘스탄티노폴리스 방향으로 가도록 만들었다. 티무르는 "사자처럼 싸우는" 세르비아군에 감탄했다. 티무르군은 전장에 흐르는 주북 하천을 막아 튀르크군의 물이 떨어지게 했다. 주북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마지막 전투가 차탈 언덕에서 벌어졌다. 목마르고 지친 오스만군은 패했고 바예지드는 수백 명의 기병과 함께 인근 산으로 달아났지만, 곧 포위되어 사로잡혔다.

 

1878년 스타니스와프 츨레보브스키의 작품,  티무르에게 사로잡힌 바예지드 술탄을 묘사했다. 1402년 7월 20일 전투에서 패한 바예지드는 티무르의 포로가 되었지만 그는 정중한 대우를 했다고 하며, 1403년 바예지드가 죽었을 때는 슬퍼했다고 한다. 바예지드의 아들 무스타파 체레비는 함께 붙잡혀 1405년까지 사마르칸트에 감금되었다.

 

 

1402-1413년 오스만 내전

16세기 말에 묘사된 무사와 쉴레이만이 마주 보고 있는 초상. 바예지드의 아들들 중 쉴레이만 체레비, 이사 체레비, 메흐메트 체레비, 무사 체레비 등 4명은 전쟁터에서 탈출하여 오스만 왕위를 두고 내전을 일으켰다. 메흐메트의 승리, 메흐메트 1세 대관식,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사망 이후 바예지드의 다른 아들 무스타파 체레비가 은신처에서 나와 그의 형제 메흐메트와 그의 조카 무라트 2세에게 두 번의 반란을 일으켰다.

 

1402년 앙카라 전투 이전의 오스만 영토. 패전 이후 아나톨리아의 많은 지역이 이탈하고 내전 동안 발칸반도의 속국들은 짧은 기간 반독립을 이루었다. 쉴레이만은 에디르네에 수도를 두고 스스로 통치자를 선언했지만 형제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어 테살로니키를 되찾고 1403년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했다. 하지만 그의 거만한 성격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410년 쉴레이만은 비잔틴 황제 마누일 2세, 세르비아 군주 라자레비치, 왈라키아의 미르체아, 마지막 불가리아 통치자들의 두 아들의 지원을 받은 그의 형제 무사에게 패하고 죽었다. 무사는 이제 티무르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나톨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동생 메흐메트와 대치했다.

 

무사는 발칸 기독교 봉신들의 독립이 증가하는 것을 우려하여 그들을 공격했다. 게다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낮은 계층을 선호함으로써 그의 영토 내에 있는 무슬림 관료와 상인 계급을 소외시켰다. 기독교 봉신들은 공포에 질려 메흐메트에게 돌아섰고, 오스만의 주요 군사, 종교, 상업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412년 메흐메트는 발칸반도를 침공하여 소피아와 니슈를 점령하고 라자레비치와 연합했다. 이듬해 메흐메트는 소피아 외곽에서 무사를 격파했고, 그가 죽으면서 메흐메트 1세는 통합된 오스만 술탄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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