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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중동/오스만제국

오스만 제국 역사 지도 - 3편 국가의 재건

by 금곡동로사 2022.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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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1421년 메흐메트 1세

술탄 바예지드 1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오스만 통치권을 두고 형제들과 싸웠다. 룸 지방에서 시작하여 1413년 오스만을 재통합하고 1421년에 사망할 때까지 아나톨리아와 루멜리아(유럽 영토)를 통치했다. "복원자"로 불리는 그는 아나톨리아에서 중앙 권위를 재건했고, 1415년 왈라키아를 정복하여 유럽에서 오스만 세력을 확대했다. 1416년 갈리폴리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에 술탄의 함대가 격파당했다.

 

 

 

 

 

1512년까지 오스만의 확장. 앙카라 패전 이후 아나톨리아의 많은 지역(가로 줄무늬 지역)이 오스만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전의 튀르크 공국으로 돌아갔다. 메흐메트의 통치가 시작된 후 포로로 잡혀갔던 그의 형제 무스타파가 나타나 영토 분할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여 전투가 벌어졌지만 무스타파의 군대는 쉽게 패했다. 비잔틴 도시 테살로니키로 도주했으나 술탄과 협정을 맺은 마누일 2세는 그를 렘노스 섬으로 추방했다. 조카 오르한이 메흐메트에게 저항하며 마누일 2세를 연루시킨 음모를 꾸몄는데, 술탄에게 곧 발각되어 비잔틴 관습에 따라 오르한은 눈이 멀게 되었다.

 

1420년경 오스만의 영토. 지도에 나타난 것과 달리 실제 지배력은 불안정했다. 앙카라 패전과 내전의 영향으로 인구가 유동적이었고 정신적인 충격이 있었다. 술탄국 내에서 유명한 무슬림 수피 셰이크 베드레딘의 주도 하에 사회적, 종교적 운동이 일어났다. 유럽 지역에서 시작된 운동은 아나톨리아 서부에서 더욱 확장되었고 베드레딘은 1416년 반란을 일으켜 메흐메트의 대재상 바예지드 파샤에게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는 1420년까지 투쟁을 이끌었다.

 

7세기-18세기 베네치아 공화국. 지중해 동부에서 세력을 넓히던 베네치아는 오스만과 때때로 충돌했다. 앙카라 이후와 내전의 영향으로 불가리아, 세르비아, 왈라키아, 비잔틴 봉신국들은 반독립적이었다. 알바니아 부족들은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했고 보스니아는 몰다비아와 마찬가지로 독립을 유지했으며 헝가리는 영토를 확장하려 했고 베네치아는 발칸반도 해안 지역을 소유했다. 메흐메트는 이를 대처하는 데 전쟁보다는 외교에 의존했다. 그는 이웃한 영토들을 급습하여 알바니아의 많은 부분을 오스만의 지배 아래로 돌려놓고 보스니아 왕국에 봉신국 지위를 강요했지만 실제 전쟁은 수행하지 않았다. 술탄은 단 한 차례 베네치아와 결정적인 분쟁을 벌였다.

 

1416년 갈리폴리 해전을 묘사한 그림. 1415년 말 오스만이 에게 해에서 베네치아의 영토와 선박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갈등이다. 피에트로 로레단이 이끄는 10 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베네치아 선단은 술탄에게 향하는 사절단을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고 오스만이 협상을 거부할 경우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베네치아 선단이 갈리폴리에 접근하자 오스만군이 교전을 벌여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튿날 양측 함대가 기동하여 싸웠지만 로레단은 오스만에 외교 임무를 알렸다. 소식이 전해지면 오스만 측이 사절단을 맞아들일 것으로 생각한 로레단은 다음날 선단을 이끌고 도시로 접근했다.

 

겔리볼루(갈리폴리)와 주변 해역. 베네치아 선단이 도시에 접근하자 32 척의 갤리선 및 갤리엇으로 구성된 오스만 함대가 전진하여 곧 해전에 휘말렸다. 베네치아 함대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어 오스만 제독을 죽이고 상당 수의 함선을 나포했으며 많은 수의 포로 중 자발적으로 복무하던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다. 베네치아 함대는 보급 및 휴식을 위해 보즈자다(테네도스) 섬으로 물러갔다. 압승을 거둔 베네치아는 향후 수십 년 동안 에게 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분쟁 해결은 1419년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미뤄졌다.

 

지우르지우 요새 공략을 묘사한 그림. 14세기 중반부터 서유럽에서 대포가 사용되었으며 성벽을 부수기보다는 불을 지르기 위한 용도로 추정된다. 1300년대 말에는 성벽을 파괴하기 위한 더 큰 대포가 등장했다. 메흐메트의 형제 무사의 정책으로 혜택을 받은 하층민들은 술탄에게 불만을 가졌고 셰이크 베드레딘이 도브루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메흐메트가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왈라키아의 미르체아가 도브루자를 점령했지만 1419년 술탄이 이 지역을 탈환하면서 다뉴브 강의 지우르지우 요새를 점령하고 왈라키아를 다시 속국으로 몰아넣었다. 국가 구조를 재정비하는데 시간을 보낸 메흐메트는 1421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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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1444년, 1446-1451년 무라트 2세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가 묘사한 초상. 무라트의 치세는 중요한 경제 발전의 시기였다. 무역이 증가하고 오스만의 도시들이 상당히 확장되었다. 1432년 여행가 브르트랑동 드 라 브로키에르는 오스만의 연간 수입이 250만 두카트로 증가했고 무라트 2세가 모든 가용 자원을 사용한다면 쉽게 유럽을 침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비잔틴 황제 마누일 2세 팔라이올로고스를 묘사한 일러스트. 무라트 2세가 즉위하자 마누일 2세는 바예지드 1세의 아들 무스타파 체레비를 석방하고 그를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다. 황제는 무스타파가 성공할 경우 많은 중요 도시들을 양도함으로써 그의 해방에 보답해야 한다는 조항을 확보했다. 무스타파가 오스만 술탄국의 유럽 영토에 상륙하자 많은 병력이 그에게 합류했고, 무라트가 보낸 노련한 장군 베야지드 파샤를 격파하여 죽였다. 이후 무스타파는 에디르네에서 스스로 술탄을 선포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갔지만, 무라트가 그를 압도했다. 휘하 병력이 대거 무라트에게 넘어갔으며 무스타파는 갈리폴리로 피신했다. 술탄은 아도르노라는 제노아 지휘관의 많은 조력으로 그곳을 포위하고 급습했다. 무스타파를 처형한 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여 자신에게 대적한 팔라이올로고스를 응징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중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묘사한 세밀화. 1421년 아제브(또는 아자프)라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한 무라트는 1422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면서 처음으로 자체 대포를 습득했는데, 짧지만 넓은 형태의 "팔콘"이었다. 양측은 기술적으로 균등했으며 오스만군도 "날아오는 돌을 막기 위해" 방어벽을 세워야 했다. 1425년경 편찬된 비잔틴의 짧은 연대기에 따르면, 6월 10일 수요일 오후 4시경 도시가 공격받았고 미할로을루 휘하의 선봉대가 도시 외곽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지 서술했다. 20일 본대와 공성 병기가 도착했지만 13세 된 술탄의 동생 퀴취크 무스타파의 반란으로 인해 포위를 풀어야 했다.

 

앙카라 이후 독립한 튀르크 공국들(가로 줄무늬). 비잔틴 황제의 돈을 받은 퀴취크 무스타파가 아나톨리아 공국들과 연합하여 8월 말 또는 9월 초에 부르사를 포위하자 무라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포기하고 무스타파를 붙잡아 처형했다. 포위는 풀렸지만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에 몇 개의 떨어져 있는 영토로 줄어들어 심각한 경제난과 병력 난을 겪었다. 반란 진압 후 아이든, 게르미얀, 멘테셰, 테케 공국은 합병되어 오스만의 일부가 되었다.

 

1387년부터 오스만의 지배를 받던 테살로니키는 앙카라 이후 1403년부터 비잔틴에 다시 귀속되었다. 비잔틴이 무라트를 견제하자 그는 테살로니키를 공격했고 1423년 미하일 2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베네치아에 넘겨주었다. 베네치아는 술탄에게 자신들의 소유권을 인정하도록 설득을 시도했지만 자신의 권리로 여긴 무라트는 그들을 간섭 세력으로 간주했다. 교착 상태에서 오스만이 테살로니키를 봉쇄하였고 도시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때때로 불길이 치솟았다. 동시에 분쟁은 발칸반도와 에게 해 제도에서 서로의 영토에 대한 일련의 급습으로 이어졌다. 베네치아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의 통행을 차단하면서 압력을 가하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잔틴 테살로니키를 묘사한 일러스트. 봉쇄로 기아가 일어나자 주민들이 빠르게 감소했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탈출했다. 포위로 인해 가해진 제약, 적절한 보급과 방어가 되지 않은 점, 베네치아인의 관습적 권리 침해, 그 관리들의 만연한 착취는 도시 내에 항복하려는 세력을 형성시켰고, 도시의 주교 시메온은 그의 양 떼들이 저항하도록 힘을 불어넣었다. 1426년 베네치아가 평화를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지역 주민 대다수는 점령된 이후 일어나는 약탈을 피하기 위해 항복을 선호하게 되었다. 다른 지역 세력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걷거나, 베네치아에 적대적이거나 오스만 제국에 패했다.

 

테르마이코스 만을 배경으로 한 테살로니키의 동쪽 성벽. 베네치아는 오스만에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했지만 공화국을 지배하던 보수 상인 귀족들은 술탄에게 조건을 요구하거나 테살로니키를 보호할 군대를 모으는 데 관심이 없었다. 1430년 초 무라트는 도시에 군대를 집중시켰고 3월 29일 이곳을 점령했다. 포위전의 궁핍과 이어진 약탈로 도시 인구는 아마도 4만 명에서 2천 명으로 줄어들었고, 이후 세월 동안 대규모 재정착이 필요했다. 1432년에 베네치아는 이를 인정하고 술탄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수십 년간 베네치아와 오스만의 대립이 이어지게 된다.

 

1430년 유럽의 정세. 오스만이 당시 헝가리의 봉신국이 된 왈라키아를 탈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발칸반도에서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오스만군이 왈라키아에 진입하자 세르비아군이 불가리아 지역을 공격했고 교황의 재촉을 받은 아나톨리아의 카라만 토후국도 튀르크를 뒤에서 쳤다. 무라트는 주력을 소피아 방어를 위해 보냈고 예비 병력은 아나톨리아로 소집했다. 왈라키아에 남겨둔 부대는 헝가리군에 분쇄되었고 그들은 세르비아군과 오스만군이 전투를 벌인 불가리아로 남하했다. 세르비아군이 패하자 후방을 치려던 헝가리군은 왈라키아로 다시 돌아갔다. 무라트는 국경을 강화하고 왈라키아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1428년 그는 군대를 아나톨리아로 보내 카라만을 물리쳤다.

 

1440년경 오스만의 영토. 1432년 무라트 2세는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1437년 지기스문트 왕이 사망한 후 1438년에 보라치를 점령했고, 1439년 즈보르니크와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하면서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1439년 말, 스메데레보가 항복하여 무라트는 세르비아를 오스만 지방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1440년 무라트는 헝가리의 주요 국경 요새인 베오그라드를 포위했지만 점령에 실패한 후, 카라만 토후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아나톨리아로 가야 했다. 한편, 지기스문트의 후계자 알브레히트 2세가 1439년 10월에 사망한 지 4개월 후 그의 유복자 라디슬라우스가 태어났다. 많은 논란 속에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3세가 헝가리 왕 울라슬로 1세로 즉위했다. 후녀디 야노시가 동부 지방을 진정시키며 왕에게 조력하자 트란실바니아의 나도르 지위와 왕국의 남부 국경을 보호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1442년 헝가리에서 지위를 확보한 브와디스와프는 베오그라드와 맞바꾸는 오스만의 화평 제안을 거부했다.

 

1444년경 유럽 남동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오랜 기간 오스만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주장해 왔고, 헝가리와 비잔틴의 내전이 모두 끝나자 협상과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추진력은 1441-2년 사이에 후녀디가 제공했다. 그는 1441년 이샤크 파샤의 급습을 물리쳤고 1442년 3월 22일 트란실바니아에서 메지드 베이의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으며 9월에는 루멜리아 총독 시하베딘 파샤의 보복 공격을 격퇴했다. 1441년 세르비아의 마지막 주요 도시 노보 브르도가 오스만에 함락되자 브란코비치 또한 세르비아 해방을 바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르나 십자군의 경로들. 1443년 종려 주일에 부다의 의회에서 무라트 2세에 대한 전쟁이 선포되었고 젊은 군주는 후녀디와 함께 대부분 마자르인으로 구성된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뉴브 강을 건너 니슈와 소피아를 점령했다. 십자군은 10월 중순에 공격을 시작했다. 세금을 내기 위해 수확물을 모아야 하는 영지 보유 기병(트말르)이 주력인 오스만 군대가 신속하게 동원될 수 없을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후녀디의 1441-2년 겨울 원정 경험은 헝가리군에 이점을 더했고 또한 갑옷이 더 좋아서 종종 오스만의 무기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무라트는 루멜리아에서 소집한 군대의 충성심을 믿지 못했고 헝가리 전술에 대항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오늘날 즐라티차에서 본 스레드나고라 산맥. 1443년 11월 초, 니슈에서 패한 오스만의 카심 파샤와 투라한 베이는 초토화 전술로 십자군을 무너뜨리기 위해 소피아로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을을 불태웠다. 그들은 무라트에게 도시를 불태우고 병력 차의 불리함을 줄이기 위해 산 너머로 물러날 것을 조언했다. 곧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고 12월 12일 즐라티차 고개에서 벌어진 전투는 눈 속에서였다. 십자군은 무라트에게 패한 뒤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추격하는 오스만군을 쿠노비차에서 급습하여 물리쳤다. 여기서 술탄의 사위이자 대재상 찬달르 할릴 파샤의 형제 마흐무드 베이가 포로로 잡혔다. 십자군이 프로쿠플레에 이르렀을 때 브란코비치는 겨울 동안 요새 도시에 머물고 이듬해 봄에 원정을 계속할 것을 제안했지만 그들은 이를 거부하고 후퇴했다. 1444년 1월 말에 브와디스와프의 군대는 베오그라드에 도착했고, 2월에 부다에 도착하여 환영을 받았다. 쿠노비차의 급습은 기독교의 승리라는 인상을 주었고 왕과 교회는 이를 선전하기 위해 널리 퍼뜨리도록 했다. 한편, 무라트는 군대의 신뢰성에 분통을 터뜨리고 낙담했으며 마흐무드 베이가 사로잡히고 패한 것에 대해 투라한을 비난하고 그를 투옥했다.

 

바르나 십자군의 두 번째 경로. 무라트는 마흐무드의 송환과 자신의 아내이자 주라지 브란코비치의 딸인 마라의 압박으로 화평을 원한 것으로 보인다. 1444년 3월 6일 마라는 부친에게 사절을 보내어 평화 협상을 시작하게 했다. 4월 24일 브와디스와프는 무라트에게 서신을 보내 그의 대사 스토이카 기스다니치가 협상을 위한 전권을 가지고 에디르네로 향하고 있다고 알렸다. 같은 날 헝가리 왕은 부다에서 회의를 열고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 앞에서 여름에 오스만에 대한 새로운 원정을 이끌겠다고 맹세했다. 이로써 라디슬라우스의 왕위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자들과 휴전에 합의하여 또 다른 내전의 위험을 제거했다. 6월과 8월 사이에 협상이 처음에는 에디르네에서, 이후에는 세게드에서 진행되었지만 십자군은 화평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체사리니가 십자군 지속을 주장하면서 더욱 그랬다. 결국 조약을 비준할 해결책을 찾았고 8월 15일 세게드 조약이 발효되었다.

 

바르나 전투의 결과. 짧은 기간 조약의 요구 사항이 충족된 후 헝가리와 동맹국의 십자군이 재개되었다. 브와디스와프는 대부분의 헝가리 정규군과 폴란드,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서유럽 중기병 부대, 동유럽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모았다. 연합군은 16,000명이었고 니코폴리스에서 왈라키아군 4천 명과 합류했다. 조약이 체결된 후 곧 물러난 무라트가 오스만군을 이끌기 위해 다시 등장했다. 1444년 11월 10일 흑해 요새 바르나 부근에서 양측 군대가 충돌했다. 오스만군은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십자군은 왕을 포함하여 15,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1444년 오스만 술탄국. 조약 이후 무라트는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왕위를 양도했지만 예니체리의 반란으로 인해 그는 다시 왕위를 반환해야 했다. 1448년 제2차 코소보 전투에서 기독교 연합군을 격파하고 발칸 전선을 확보하자 무라트는 동쪽으로 향하여 카라만 토후국과 초룸 아마샤를 무찔렀다. 1450년 알바니아로 진격해 스컨데르베우가 이끄는 저항군을 진압하기 위해 크루여 성을 포위했지만 실패했다. 1450-51년 겨울 무라트는 병에 걸려 에디르네에서 사망했다. 일부는 알바니아 게릴라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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