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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와 카롤루스(카롤링거) 제국

by 금곡동로사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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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차에 탄 메로빙거의 왕

 

메로빙거조 프랑크 왕국은 강력한 왕조로 시작했지만,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들은 너무 약해서 장발 왕들의 별명이 게으름뱅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왕들(rois fainéants)로 바뀌었다. 이 왕들은 너무 게으르고 나약해서 프랑크 제국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업무는 실제로 전투에서 프랑크 군대를 이끄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일을 수행했던 관료인 궁재의 어깨에 놓였다. 샤를 마르텔(해머)/카롤루스 마르텔루스는 이러한 궁재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732년, 그는 투르에서 무어인들의 침략군에 맞서 프랑크군을 놀라운 승리로 이끌었고, 그들을 스페인으로 돌려보냈다. 프랑스에서 기독교는 구원을 받았고 마르텔은 전설이 되었다.

샤를 마르텔은 해머라는 칭호를 즐겼지만, 그는 결코 왕의 칭호를 받지 않았다. 그는 궁재의 지위에 만족했다. 마르텔의 작위는 그의 아들 페펭/피피누스에게 넘어갔다. 이전의 그의 아버지와 달리, 페펭은 모든 일을 하는 사람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궁재였다. 페펭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던 교황에게 호소했다. 교황은 매우 강력한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교황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당시 교황 자카리아는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공격으로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동맹이 필요했기에 교황 자카리아는 페펭이 통치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페펭은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킬데리쿠스 3세를 시골에서 데려와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도원으로 보냈다. 페펭은 그의 아버지 샤를 마르텔의 이름을 딴 카롤링거 왕조의 초대 왕이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 킬데리쿠스 3세


단신왕 페펭의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는 롬바르드족과 싸우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그들 영토의 많은 부분을 빼앗는 데 성공했고, 자신의 프랑크 제국에 이 땅을 추가하는 대신에, 그 영토를 교황에게 주었다. 이 선물은 페펭의 기증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교황은 교황령으로 알려진 이탈리아에 자신의 작은 제국을 가지게 되었다.

페펭은 그 이전의 메로빙거 왕들보다 훨씬 더 나은 통치자였다. 페펭은 768년 54세의 나이로 전사했고, 그의 왕국은 두 아들 샤를/카롤루스와 카를로만/카를로마누스에게 남겨졌다. 두 형제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카를로만은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왕국을 샤를에게 맡기고 수도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샤를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앞으로 46년 동안 게르만족과 거의 끊임없이 싸우게 된다. 카롤링거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종교적 지도자인 주교들의 오랜 계보에서 왔기 때문에 샤를은 교회에 충성했다. 그는 필요할 때 로마에서 교황을 변호했고 작센족에 대한 유명한 캠페인을 벌였다. 샤를은 이교도 작센족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하루에 4,000명 이상이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작센족의 신성한 떡갈나무를 베어 교회를 짓기 위한 재목으로 만들었다.

로마로 돌아가면, 몇몇 사람은 교황 레오 3세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로마의 거리에서 그를 공격했다. 레오는 살아남아 샤를의 진영으로 향했다. 샤를은 자신의 프랑크 군대와 함께 레오를 로마로 데려와 교황으로 복권시켰다. 1년 후인 800년 성탄절에 샤를은 로마에 있었다. 그는 교황과 함께 교회에 참석했고, 교황 레오 3세는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샤를을 로마의 황제로 선포했다. 서방에 황제가 있은 지 300년이 넘었다. 샤를은 이제 매우 강력해져, 샤를마뉴(카롤루스 마그누스)라는 칭호를 받았다.

 

샤를마뉴의 수도였던 아헨(Aachen)과 그의 프랑크 제국


샤를마뉴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제국을 52개의 카운티(County)로 나누고 각 카운티를 운영할 행정관(Count)을 임명했다. 어떠한 위험도 무릅쓰지 않고, 샤를마뉴는 미시 도미니키(단수형 미시우스 도미니쿠스, 왕국 순찰사)라고 불리는 특수 요원들을 두어 그들이 정직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샤를마뉴는 교육을 지원했다. 그는 요크의 앨퀸이라는 잉글랜드의 위대한 학자를 그의 수도 아헨으로 데려왔다. 그는 그의 모든 신민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랐다. 그는 심지어 언젠가 스스로 배우기를 바랐다.

샤를마뉴에게는 대가족이 있었다. 그는 4명의 아내와 18명의 자녀를 두었다. 비록 그는 자주 전장에 나가 있었지만, 샤를마뉴는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딸들이 자신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까 봐 결혼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딸 로트루드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젊은 황제 사이의 약혼을 파기했다.

샤를마뉴는 수영과 승마와 같은 신체 활동을 즐겼다. 그는 6피트 4인치(195 cm)로 당대의 거인이었다. 그는 음악을 사랑하고 글 쓰는 법을 배우기를 간절히 바랐고, 심지어 한밤중에 그 능력이 그에게 닥칠 경우를 대비해 펜을 옆에 두고 베개 아래에 종이를 깔고 잠자리에 들었다. 샤를마뉴는 고대 로마 시대 이래로 볼 수 없었던 문명을 어느 정도 서유럽으로 가져왔다. 샤를마뉴는 814년에 사망했고, 오늘날의 프랑스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남겼다.

카롤링거 제국은 샤를마뉴가 죽은 후 약화되었다. 제국은 샤를마뉴의 손자들이 통치하는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삼국의 중부는 약하여 동·서 왕국에 흡수되었다. 이 두 왕국은 현대 국가인 프랑스와 독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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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관을 받는 샤를마뉴와 샤를 마르텔의 석관, 교황을 도운 샤를마뉴의 성유물(내부에 유골이 있음) 및 그의 수도였던 아헨에 있는 대리석 왕좌와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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