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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침공

by 금곡동로사 2022.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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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이야기는 100년 전 앨프레드 대왕이 잉글랜드가 침략받는 것을 보았듯이, 잉글랜드의 왕 애설레드가 바이킹 침략자들에게 자신의 왕국이 공격받는 것을 발견했을 때인 900년대 후반에 시작된다.

바이킹에게 대패한 후, 애설레드는 "데인겔트"라고 불리는 공물로 바이킹에게 보상하려고 했다. 이는 더 많은 바이킹의 공격을 부추겼을 뿐이다. 애설레드는 바이킹에게 조공을 계속 제공하기 위해 잉글랜드인들의 세금을 올려야 했다.

애설레드는 동맹이 필요했고, 그래서 그는 노르망디의 엠마와 결혼했다. 노르망디는 프랑스 북부의 공국이었고, 강력한 노르망디 공작은 자신의 여동생과 잉글랜드 왕의 결혼을 제안했다. 노르만인은 프랑스에 정착한 옛 바이킹이다. 결혼 후, 노르망디 공작은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공격하기 위해 노르망디에서 출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결혼은 잉글랜드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애설레드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잉글랜드에 살고 있는 모든 데인(덴마크)인을 죽이도록 명령했다. 많은 데인인이 죽임을 당했고, 심지어 그 가족들이 잉글랜드에서 오랫동안 평화롭게 살았던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서 군힐데라는 데인 여성이 살해되었을 때, 스베인 튜구스케그는 복수심에 불타 공격했다. 스베인은 데인의 왕이었고, 그는 여동생(군힐데)의 죽음에 대해 앙갚음하려 했다. 비록 잉글랜드인이 조국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스베인이 승리했고, 그는 1013년 성탄절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애설레드는 가족과 함께 잉글랜드를 떠나 엠마의 가족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스베인은 잉글랜드 통치 5주 만에 사망했다. 애설레드는 돌아왔지만 잉글랜드인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받아들인다면 더 현명하게 통치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 당시 잉글랜드에서, 왕은 폭군으로서 통치할 수 없었고 백성에게 회신해야 했다.

애설레드가 죽고 스베인 튜구스케그의 아들인 크누트가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크누트와 애설레드의 아들인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크누트가 승리하고 1016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이제 미망인이 된 엠마는 크누트와 결혼했지만 안전을 위해 자녀들을 노르망디로 돌려보냈다. 그녀의 아들들은 전 왕 애설레드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새로운 남편 크누트에게 위협이 되었다. 엠마는 두 번째로 잉글랜드의 왕비가 되었다.

크누트는 이제 덴마크, 노르웨이, 잉글랜드를 포함하는 왕국을 소유했다. 왕국이 매우 넓었기 때문에 크누트는 왕국의 여러 지역으로 여정을 떠나야 했기에 그가 없는 동안 그를 대신해 지역을 살펴볼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크누트는 고드윈을 잉글랜드 남부에 있는 넓은 지역인 웨식스의 행정관(Eorl, 유럽의 Count와 동격)으로 임명했고 이는 고드윈을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어느 모로 보나 크누트는 좋은 왕이었고 잉글랜드인들은 그가 잉글랜드인이 아니었지만 그를 좋아했다.

크누트가 죽자, 그의 아들들과 애설레드의 아들들 사이에 잉글랜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엠마는 애설레드와의 결혼에서 얻은 자식이 아닌 크누트에게서 낳은 아들들이 왕위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곤란한 입장에 놓였다. 결국 애설레드에게서 낳은 그녀의 장남인 에드워드가 1042년에 왕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다시 한번 잉글랜드인 왕을 갖게 되었다. 강력한 웨식스의 통치자인 고드윈이 에드워드를 왕으로 옹립한 것이 중요했다. 고드윈은 왕이 자신의 딸 이디스와 결혼하도록 주선했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인이었지만, 데인 왕들이 통치하는 동안 노르망디에서 삶의 많은 부분을 보냈다. 그가 가족과 함께 노르망디로 도망갔을 때 그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나중에 참회왕 에드워드로 알려진 에드워드는 노르만 문화에 더 익숙했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온 많은 친구들을 초대하여 잉글랜드에 있는 자신의 궁정과 교회의 중요한 자리를 채웠다. 이는 잉글랜드인들을 화나게 했고, 그들은 이 노르만인들을 환영하지 않았으며 잉글랜드에 있는 그들의 존재에 분개했다.

이 시기 사건들의 주요 출처인 앵글로색슨 연대기 / 에드워드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다

 

노르만인들은 이 시기에 잉글랜드인을 멸시했다. 에드워드 왕과 함께 노르만인들은 그들이 선택한 대로 잉글랜드인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껴졌을 수 있다. 노르만인 우스타스 백작이 노르만인 친구들과 함께 잉글랜드의 도버로 여행할 때의 한 일화가 있다. 우스타스는 잉글랜드인에게 음식과 마실 것을 요구했다. 전투가 벌어졌고, 약 20명의 잉글랜드인과 20명의 노르만인이 죽었다. 마침 에드워드의 매부였던 우스타스는 왕에게 달려가 그들이 받은 대우에 대해 불평했다. 에드워드는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백작이었으므로 고드윈에게 책임이 있는 잉글랜드인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왕은 상대측 이야기를 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고드윈은 이를 거절했고, 왕과 고드윈 사이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1051년 고드윈은 나라를 떠나야만 했고, 그의 영지는 다른 사람들에게 양도되었다. 왕은 심지어 고드윈의 딸과 이혼하는 것을 고려하고 그녀를 수녀원으로 보냈다.

 

노르망디 공작이자 에드워드의 일가인 윌리엄이 잉글랜드로 여행을 간 것도 1051년이었다. 이 방문에서 에드워드는 어린 윌리엄에게 잉글랜드의 왕위를 약속했지만, 남아있는 것은 윌리엄의 말밖에 없다. 또한 잉글랜드인들은 새로운 왕을 선출하는 위탄(위테나예모트)이라는 평의회가 있기 때문에, 왕국을 아무에게나 주는 왕의 자리가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에드워드가 노르만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의 논쟁을 듣다

 

에드워드는 이듬해 고드윈과 그의 가족이 지원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놀랐다. 그는 잉글랜드인들이 고드윈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잉글랜드 국민은 나라를 약화시킬지도 모르는 내전에 지쳐 왕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국왕과 그의 경쟁자 사이에 분쟁은 없었다. 고드윈의 영지는 복구되었다. 1053년 고드윈이 죽자 그의 영지는 그의 두 아들 해럴드와 토스티그에게 분할되었다.

에드워드의 통치 말기에 그의 처남인 해럴드가 나라를 다스렸다. 에드워드는 약해지고 쇠약해져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해럴드는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가르는 수역인 영국 해협을 항해하고 있었다. 아무도 이 항해의 이유를 모른다. 바다에 폭풍이 몰아쳤고 해럴드는 노르망디에서 난파되었다. 그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손님으로 대우받았다. 노르망디에서 지내는 동안 해럴드는 에드워드가 사망한 후 윌리엄이 잉글랜드의 왕관을 차지하도록 지원하고 돕겠다고 성인들의 유골에 맹세했다. 그러고 나서, 해럴드는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해럴드가 기꺼이 이 맹세를 했거나 윌리엄 공작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잉글랜드인들은 항상 다음 왕에게 투표했기 때문에, 왕을 선택하는 것은 해럴드의 자리가 아니었다.

1066년 1월 5일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했다. 에드워드는 임종 당시 그의 처남인 해럴드가 다음 왕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에드워드가 윌리엄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인가? 오늘날까지 아무도 모르며, 그것은 역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이다.

에드워드가 죽은 지 하루 만에 해럴드는 위탄에 의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윌리엄이 노르망디에서 이것을 알았을 때, 그는 분노했다. 윌리엄은 왕좌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던 해럴드에게서 강제로 왕관을 빼앗겠다고 맹세했다.

해럴드가 왕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그의 동생 토스티그에게 잉글랜드를 떠나도록 요청한 것이었다. 토스티그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권력을 남용했고 사람들을 학대했다. 토스티그는 노르웨이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노르웨이의 왕 하랄드 하르드라디에게 영접을 받았다. 이 둘은 잉글랜드를 침공할 음모를 꾸몄다. 하르드라디는 잉글랜드의 바이킹 왕 중 한 명의 친족이었고, 그는 왕관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토스티그의 도움으로, 아마도 그는 잉글랜드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1066년은 세 왕의 해, 두 번의 전투, 그리고 혜성의 해로 알려져 있다. 세 사람이 왕좌를 놓고 다투었고, 두 번의 위대한 전투가 있었고, 그 해 해럴드 왕에게는 좋지 않은 징조로 여겨졌던 핼리 혜성이 하늘에 보였다. 그 당시 사람들은 미신을 믿었다. 한편, 윌리엄이 침공군을 이끌고 상륙했을 때, 그는 배에서 미끄러져 젖은 진흙과 모래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이는 윌리엄에게 나쁜 징조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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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는 노르만인의 관점에서 본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침공의 주요 원천이다. 이 장면은 해럴드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극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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