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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중세 유럽

by 금곡동로사 2024.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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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의 마상 창 시합. 마상 창 시합은 기사들이 연습한 자신의 기술을 뽐낼 수 있는 기회인 토너먼트, 즉 마상 시합에서 열렸다. 마상 창 시합은 300보 떨어진 거리에 있는 말에 올라탄 두 명의 기사가 틸트라고 불리는 장벽의 양쪽에서, 리스트라고 불리는 좁은 레인을 따라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그 목적은 둔탁한 나무로 된 랜스(긴 창)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말에서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유럽에서는 AD 500년경부터 1500년경까지의 기간을 미들 에이지스, 또는 메디블 피리어드라고 한다. 중세는 로마 제국이 붕괴된 뒤 시작되어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끝났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의 초기 부분은 바이킹 습격과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을 포함한 침략의 시기였다. 후기 세기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소위 백년전쟁(1337-1453)을 포함하여 유럽 왕국들 간의 빈번한 전쟁이 있었다.


봉건제"Feudalism"

봉건제의 도표. 왕(1)은 전쟁에서 도움을 준 대가로 귀족(2)에게 땅을 주었다. 귀족들은 그들을 대신하여 싸운 기사들(3)에게 땅을 주었다. 귀족과 기사는 임대료를 받는 대가로 농민(4)이 그들의 땅을 경작하도록 허락했다.

 

중세 시대에 유럽은 그들끼리 자주 전쟁을 벌이는 여러 왕국으로 나뉘었다. 대부분의 나라는 왕이 통치했지만, 강력한 영주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했다. 왕은 전쟁에서 자신을 위해 싸우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영주들에게 넓은 땅을 소유하고 성을 쌓는 것을 허락했다. 영주는 도움 없이 자신의 모든 땅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요할 때 자신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하는 대가로 기사들에게 땅의 일부를 주었다. 또한 영주의 통제하에 있는 땅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즉 농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재배한 작물의 일부를 바치는 대가로 영주의 보호를 받았다. 이 제도는 봉건제도라고 알려져 있다.

봉건제는 700년대까지 서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게르만 부족 집단인 프랑크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프랑크 전사들은 일종의 보호와 보상에 대한 대가로 통치자나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봉건제는 800년대-1200년대 사이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12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제도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봉건 체제에 구속되기보다는 토지 임대료를 지불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돈을 더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주 역시 병사들에게 땅을 보상하기보다는 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장원(莊園)"Manor"

풍차, 교회, 영주 저택이 들어선 장원에 있는 소작농의 농장

귀족의 땅은 장원으로 나뉘어 농민들이 경작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농작물의 일부를 영주에게 바쳤다. 장원은 세 개의 큰 밭으로 구성되었는데, 각각 밀과 보리를 심었고, 나머지 하나는 토양이 지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비워둔 경작지였다. 이 밭들은 스트립(좁고 기다란 조각)으로 나뉘었다. 농민들은 자신의 스트립에서 일했고, 지역 영주가 사는 저택 주변에 형성된 마을에서 살았다. 그들의 영주의 밭에서 일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식량을 재배할 수 있는 작은 땅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농노였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장원에 머물러야만 했다. 소수는 자유민이었고 한 장원에서 다른 장원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다. 농부들은 좁고 질병이 만연한 환경에서 살았으며, 거친 빵, 죽 그리고 채소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식사를 했다. 그들은 생선이나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는데, 이것들은 영주의 식탁에 올려진 진미였다.

 


풍차
일부 장원에는 곡식을 갈아서 가루로 만드는 풍차가 있었다. 풍차는 영주의 소유물이었다. 그의 땅에 있는 모든 농민은 이곳에서 곡식을 빻아 밀가루로 만들어야 했다. 영주는 그들에게 멀처"multure"라고 불리는 사용료를 부과했다. 방앗간이 작동하지 않을 때, 방앗간 일꾼은 농부들에게 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풍차 날개를 대각선 십자 모양으로 놓았다.

 


기독교 교회

수도승 서기관이 필사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채색은 1160년경 잉글랜드 캔터베리에서 제작된 에드윈 시편"Eadwine Psalter"(시편 및 기타 종교 자료를 포함하는)에서 발췌한 것이다.

 

기독교 교회는 유럽의 중세 시대에 매우 강력해졌다. 기독교는 모든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많은 남성과 여성이 수도사나 수녀가 되어 자신의 삶을 교회에 헌신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은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살았고 또한 들판에서 일하거나 가난한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또한 많은 시간을 기도와 학습으로 보내며, 아마도 글을 베끼고 채색"illumination"이라고 불리는 그림과 글로 장식했을 것이다. 그 결과, 수도원과 수녀원은 유럽 전역에서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도사와 수녀로 구성된 여러 수도회(단체)가 있었다. 가장 초기의 것은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투스가 설립한 베네딕토 수도회로 500년대에 시작되었다. 성 베네딕투스는 수도원 생활에 대한 일련의 지침인 "규칙"의 저자였다.

 

 

대수도원과 대성당

대성당은 돌로 지어졌다

중세 시대에는 유럽 전역에 수천 개의 수도원, 대수도원, 교회 및 대성당이 건설되었다. 가장 큰 건축물은 완성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프랑스의 클뤼니와 같은 일부 대수도원은 자체 성벽 안에 있는 작고 독립된 도시 같았다. 웅장한 대성당도 많이 지어졌다. 대성당"Cathedral"이라는 단어는 "의자"를 의미하는 라틴어 카테드라"Cathedra"에서 유래되었다. 대성당은 주교좌가 있는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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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스데이 북

윌리엄 1세(그림에서 빨간 옷을 입고, 정복자 윌리엄으로 알려진)가 자신의 새로운 왕국인 잉글랜드에서 귀족과 성직자들을 만나고 있다.

 

1086년 초, 잉글랜드의 윌리엄 1세는 나라 전역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66년의 승리 이후, 그는 자신의 새로운 왕국에 대한 정보를 원했다. 잉글랜드 전체(런던, 윈체스터 및 잉글랜드 북부 일부 지역 제외)에 대한 장소별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인구, 재산, 그리고 누가 무엇을 소유했는지 목록을 작성했다. 그것은 나중에 둠스데이 북이라고 불렸다. 12세기 이후부터 유럽의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세밀한 작업은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을 필요로 했고, 유럽에서 최초의 대학이 설립된 것은 중세 시대였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1088년).

 


인구 증가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새로운 마을과 도시가 성장했다

1315년경 대기근과 함께 시작된 전염병과 기근의 시대 이전, 중세 유럽은 점점 더 부유해졌다. 식량 생산이 증가했다. 상인들은 더 먼 곳에서 상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북유럽의 양모, 철, 모피가 남쪽의 비단, 향신료, 설탕과 거래되었다. 이 무역을 처리하기 위해 항구가 설립되었다.

유럽 전역에서 경작지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토지가 배수되고 숲이 베어졌다. 어떤 곳에서는 마을이 확장됨에 따라 이러한 과정이 일어났다. 다른 곳에서는 침략자들에 대한 방어를 위해 성을 건설하거나 외딴곳에 수도원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정착지의 출발점이 되었다.

식량 생산이 증가하면서 인구도 늘어났다. 1000년의 유럽 인구는 약 4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1300년에는 그 수가 약 8천만 명까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1300년대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다시 감소했다.

 

 

한자 동맹

중세 한자 동맹도시 폴란드 그단스크의 해안가. 오른쪽의 큰 건물은 배에서 물품을 하역하는 데 쓰였던 15세기의 항구 크레인(폴란드어로 주라프"zuraw")이다.

 

도시는 1000-1300년 사이에, 특히 훌륭한 무역로에 있는 곳의 성장에서 중요한 중심지였다. 독일에서는 여러 도시가 함께 연합하여 한자 동맹으로 알려져 있는 무역 동맹을 형성했다. 동맹은 북유럽의 모피, 생선, 목재 무역을 장악했다. 더 남쪽의 지중해에 위치한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와의 무역 중심지가 되었다. 비단, 향신료, 그리고 설탕 등 다수의 이국적인 상품을 북유럽에서 판매하기 위해 알프스 고개 너머로 운송했다. 반대 방향에서는 양모, 철, 모피가 남쪽으로 운송되었다.

 


중세의 사람들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귀족들이 모든 부와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있었다. 농민과 하인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중세의 사람들(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상인, 궁정의 여인, 매사냥꾼, 수도사, 농민

위 그림의 왼쪽에는 고급 옷을 입은 상인과 귀부인이 있다. 가운데에는 매사냥꾼이 있다. 매사냥꾼은 궁정에서 일하거나 영주를 위해 일했을 것이다. 매사냥은 중세 유럽에서 매우 인기가 높았고 "왕들의 스포츠"로 알려져 있었다. 매, 수리매, 독수리는 모두 사냥 훈련을 받았다. 매사냥꾼은 새가 앉았을 때 손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있었다. 다음 인물은 수도원 안에 살지 않는 수사였던 수도사"monk"이다. 대신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기독교를 설파했다. 오른쪽에는 단순하고 염색되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농가 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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