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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중세 도시 생활

by 금곡동로사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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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도시의 부분 단면도 그림은 대장간, 빵집, 여관 및 상점으로 둘러싸인 시장을 보여준다. 배경에 대성당과 영주의 성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며 살았지만, 특히 AD 1000년 이후에는 도시들이 점점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 그렇지만, 1500년까지 도시 인구는 여전히 전체 인구의 10%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는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장인들이 살고 일하는 곳이었다. 부유한 상인의 집과 같은 일부 고급 건물은 값비싼 돌로 지어졌다. 가난한 집들은 초벽(워틀과 도브)이라고 불리는 나뭇가지와 회반죽을 바른 벽이 있는 값싼 목재로 만들어졌다.

 


건물
중앙의 석조 교회는 도시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이었다. 교회는 도시와 그 영주가 얼마나 번창하는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지어졌다. 도시 건물의 1층에 상점과 작업장이 있고 위층에는 주거 공간이 있었다. 여관은 사람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곳이면서 여행자들의 말을 위한 마구간과 먹이뿐만 아니라 식사와 숙박도 제공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학교는 잉글랜드 캔터베리의 킹스 스쿨로, 597년 성직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대성당 학교로 설립되었다. 1088년 이탈리아 볼로냐에 최초의 근대식 대학이 설립된 후 서유럽으로 퍼져나갔고, 1500년에는 57개의 대학이 있었다.

 

중세 도시에서, 많은 집이 초벽으로 된 벽체와 목재 골조로 지어졌다. 부유한 집은 저층이 석조로 되어 있다. 교회와 성은 돌로 지어졌다.

 

대부분의 도시민은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일부 상인은 매우 부유해졌다. 그들은 도시 중심부에 있는 큰 저택에서 살았고, 하인과 예능인을 고용했다. 상인들은 가난한 가족이 살 수 있도록 저택 꼭대기에 있는 작은 방을 빌려주기도 했다.

 


장인

단면도 그림에서 부유한 상인의 집 내부와 재단사의 가게 및 작업장 등을 보여주고 있다

다양한 장인들이 중세 도시에서 살면서 일했다. 여기에는 베이커(제빵사), 부처(푸줏간 주인), 대장장이, 카펜터(목수), 플레쳐(화살 만드는 사람), 보이어(활 만드는 사람), 다이어(염색업자), 포터(도공), 그리고 다른 많은 이들이 포함되었다. 장인의 작업장, 가게, 창고, 그리고 집은 모두 같은 건물에 있었다. 장인들은 일을 도와주는 견습생을 고용했다. 그들은 장인과 그 가족과 함께 숙식을 했다. 수년간의 훈련을 거친 후, 견습생들 또한 실력을 입증하면 장인이 되어 자신의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대장간

대장장이가 새 편자를 대고 있다

중세의 모든 도시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대장장이들은 도구, 무기, 갑옷, 편자 및 그 밖의 금속 제품들을 만들기 위해 쇠를 망치로 두드리거나 구부리거나 자르는 일을 했다. 벽돌로 만든 화덕에는 숯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풀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의 폭발로 뜨겁게 타오르는 상태를 유지했다. 금속은 빨갛게 빛날 때까지 가열하여 부드러워지면 모루 위에서 두들기거나 구부려 모양을 만들었다. 말에 편자를 대기 위해 오래된 것은 제거하고, 고르지 않은 발굽을 줄로 다듬은 후에 새 편자를 제자리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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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유리 세공 작업장 밖의 길드 간판

중세 시대에는 모든 장인이 길드의 일원이었다. 이 고위 장인 그룹은 구성원들의 노동 시간과 작업 조건을 통제했다. 그들은 또한 기준에 맞게 제품의 품질과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상인들도 길드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장인 길드와는 별개였다. 그들은 가격, 품질, 도량, 일반적인 사업 관행에 관한 규칙을 만들어 지역 무역을 통제했다.

 


장날

장날은 중세 도시에서 한 주 중 가장 바쁜 날이었다. 지역 농부들은 말이 끄는 이륜 수레를 이용하여 고기와 채소를 팔기 위해 도시로 왔고, 상인들은 고운 옷감과 기타 상품들을 팔기 위해 더 먼 곳에서 왔다. 거래 상품 중 중세 초기에 가장 비싸고 탐나는 염료는 바다 달팽이로 만든 보라색이었다. 하지만 인기가 떨어지면서 11세기에 케르메스 벌레로 만든 진홍색으로 대체되었다. 행상인들은 온갖 종류의 상품을 팔았다. 땜장이"Tinker"들은 냄비와 팬을 수리하곤 했다.

저글링하는 예능인이 마을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장날 아침에 시장은 소음과 냄새로 활기가 넘쳤다. 그러나 돼지들이 성가신 존재였다.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값이 싸고 좋은 식량 공급원이기 때문에 돼지들을 키웠지만, 종종 먹이를 찾도록 거리로 내보냈다. 중세 도시의 거리는 더럽고 냄새가 났다. 덮개가 없는 배수로가 거리의 측면이나 중앙을 따라 흘렀고, 사람들은 종종 창문 밖으로 오물을 버렸다. 특히 장날에는 거리도 활기찬 장소였다. 저글링하는 사람들, 어릿광대, 심지어 춤추는 곰까지 군중을 즐겁게 했다.

 

 

처벌

칼을 씌운 남자의 판화

사소한 절도에 대한 처벌로 칼을 씌우거나 그루터기에 묶어 공개적인 수치심을 주었다. 범인은 나무 널빤지에 매여 학대를 당했다. 이들은 썩은 과일을 자주 맞았다. 그루터기에 매인 경우, 범죄자는 발이 묶인 채로 앉아 있었다. 칼을 씌운 경우, 목과 손목이 매인 채로 서 있었다.

 


흑사병

역병 희생자들을 싣고 도시 밖으로 내보냈다

1347-1349년 사이에 선 페스트라고 불리는 끔찍한 질병이 아시아를 휩쓸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는 흑사병으로 알려졌다. 중세 도시에서는 질병이 흔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여 살면서 흙이나 오물을 씻어낼 흐르는 물이 없었다. 가장 흔한 증상은 사타구니와 목, 겨드랑이에 부종이 생기면서 고름이 배어 나오고 피가 났다. 검은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있던 세균이 이 병을 옮겼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람들이 감염된 마을과 도시에서 도망쳐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서 병을 퍼뜨렸다. 치료법은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죽은 시체는 밤에 수레로 거두었다. 모든 마을과 도시의 인구가 급격하게 줄었다.

 

1348-50년에 유대인들은 흑사병의 희생양이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 거주 지역의 고립된 상태와 더 나은 위생으로 인해 사망률이 더 낮았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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