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디아도코이 시대는 그리스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페이지 중 하나였다. 일련의 야심 찬 장군들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일부를 확보하려고 시도했고, 이는 헬레니즘 세계를 형성한 왕국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음모, 배신, 그리고 유혈의 시기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 긴장이 고조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323년 6월 11일 아마도 장티푸스로 바빌론에서 사망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알렉산드로스는 장군들로부터 그가 죽은 후에 누구에게 그의 제국이 갈 것인지 질문을 받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최후의 힘을 다해 "가장 강한 자에게"라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을 남겼다. 이 거대한 제국은 아드리아 해에서 인더스 강까지, 그리고 리비아에서 오늘날의 타지키스탄에 이르는 영토를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알렉산드로스는 최근에 이 땅을 정복했고 제국의 대부분은 확고하게 확보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의 주된 문제는 그것이 갑작스럽고 이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마케도니아 장군은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의 뒤를 이을 준비가 된 사람이 없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제국이 곧 충격에 빠질 것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323년부터 281년까지 마케도니아 장군들 사이에 일련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유혈이 낭자한 전쟁은 계승자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디아도코스'에서 유래하여 디아도코이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디아도코이 전쟁 : 혼란에 빠진 세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했을 때, 그의 가장 중요한 장군들과 근위병들이 모여 제국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그곳에서 후계자는 알렉산드로스와 록사나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남아일 경우)이거나 알렉산드로스의 이복형제 필리포스 3세가 될 것이라는 데 합의했다.
힘의 균형은 깨지기 쉬웠다. 모든 사람들은 결국 태어나 알렉산드로스 4세라는 이름을 가진 알렉산드로스의 아들이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당시,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은 페르디카스였는데, 그는 알렉산드로스 4세가 통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제국의 섭정과 같은 역할을 맡았다.
페르디카스는 자신의 지위를 제외하고도 적법성의 이점도 누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사망하기 직전에 페르디카스에게 자신의 반지를 주어 제국의 책임자로 지명했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페르디카스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페르디카스를 의심했고 페르디카스는 모두를 의심했다.
많은 사람이 다양한 관료 직책을 맡았지만 가장 탄력이 있음을 증명한 사람들은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안티파트로스, 셀레우코스, 그리고 리시마코스였다.
BC 321년 페르디카스가 살해당하자 곧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 이미 그 해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를 스스로 차지하고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비밀리에 자신이 통제하는 알렉산드리아로 이송했다. 이 방법으로 프톨레마이오스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명성 있는 지역 중 하나를 확보했다.
트리파라디소스에서 이프소스까지
페르디카스가 죽은 후, 디아도코이는 BC 321년 트리파라디소스에 모여 제국을 분할했다. 분할은 디아도코이가 자신만의 야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제국은 여전히 알렉산드로스 4세와 필리포스 3세의 이름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트리파라디소스 이후, 안티파트로스는 페르디카스를 대신하여 제국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BC 319년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 수십 년은 디아도코이 사이의 길고 피비린내 나는 분쟁이었다. BC 320-301년 사이의 지배적인 인물은 의심할 여지없이 안티고노스였다. 디아도코이의 나머지는 대 마케도니아 제국의 꿈을 포기했지만, 안티고노스는 여전히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지가 자신의 이름 아래 통합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안티고노스는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BC 320-301년 사이에 자신의 영토를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시켰다.
야심 찬 계승자들이 차례로 제거되고 있던 BC 311년,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를 암살하여 알렉산드로스의 혈통에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암살 전에, 당대의 가장 위대한 디아도코이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소아시아 전체의 안티고노스, 유럽(마케도니아 및 테살리아)의 카산드로스, 그리고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의 분리된 4개 왕국의 현상 유지를 인정하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 셀레우코스는 조약에서 제외되었지만 그가 사트라프였던 바빌론을 유지했다.
301년,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셀레우코스의 연합군은 프리기아의 이프소스에서 안티고노스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고나타스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는 헬레니즘 세계의 미래를 결정했다. 안티고노스는 죽고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달아났다. 리시마코스는 영토를 소아시아로 확장했고 프톨레마이오스는 자신의 영토에 남부 시리아를 추가했다.
이프소스 이후
디아도코이 전쟁의 최대 전투인 이프소스의 여파는 엄청났다. 제국의 통합을 믿었던 마지막 계승자 안티고노스는 죽었다. 게다가, 이프소스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다른 운명을 따르게 되는 최종적인 분단을 의미했다.
BC 297년 카산드로스가 수종으로 사망하자, 데메트리오스는 주로 마케도니아로 이루어진 카산드로스의 땅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전투에서 패했고 BC 285년 셀레우코스에게 사로잡혔다.
리시마코스는 계속 성장했다. 어느 시점에서 그는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소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확고히 장악했지만 BC 281년 코로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에게 패배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 전투 이후,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의 아시아 영토를 점령하고 유럽을 침공하여 자신의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게 그는 셀레우코스와 동맹을 맺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안티고노스의 손자이자 데메트리오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셀레우코스와 리시마코스의 죽음에 이은 무정부 상태를 틈타 BC 276년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안티고노스는 제국에 남은 할당되지 않은 마지막 지역을 확보했다.
이는 디아도코이 전쟁의 끝이었다. 헬레니즘 세계는 로마가 다가올 때까지 다음 몇 백 년 동안 설정되었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마케도니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셀레우코스 왕조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및 이란을 지배했다.
디아도코이 : 3대 왕조의 창립자
보았듯이 알렉산드로스 사후에 등장한 3대 왕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 안티고노스 왕조였다. 처음 두 개는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디아도코이에 의해 설립되었다. 안티고노스 왕조만이 디아도코스인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손자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 의해 세워졌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경호원 중 한 명이자 가장 신뢰받는 고문으로서 복무했다. 그는 또한 시와의 오아시스에 있는 신탁을 방문할 때 마케도니아 왕과 동행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 4세와 필리포스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집트의 사트라프가 되었다.
321년 페르디카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위대한 장군이 묻히게 될 마케도니아로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모든 사람을 속이고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훔쳐 멤피스로 가져갔다가 알렉산드리아로 옮겼다. 그곳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를 신으로 숭배하는 호화로운 무덤을 지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파라오의 칭호를 가진 이전 통치자였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이집트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키프로스, 키레나이카, 그리고 유대를 포함하는 영토 확장을 위해 디아도코이 전쟁에서 싸웠다. 그는 많은 자녀를 두었고 예술과 문학의 위대한 후원자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과 박물관을 지어 도시를 헬레니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BC 282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마지막 후계자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왕국이 로마에 흡수된 BC 30년까지 다스릴 가계가 있는 안정된 왕국을 남겼다.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정예 부대인 히파스피스타이의 지휘관이 되어 함께 싸웠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셀레우코스는 처음에는 큰 권력을 가진 지위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킬리아르코스가 되어 제국의 최고 권력자 페르디카스와 가깝게 배치되었다. 셀레우코스는 페르디카스 암살에 참여했고, 이 공로로 바빌론의 사트라피를 받았다.
사트라프로서, 그는 원주민들과 많은 문제에 직면했지만 BC 316년까지 도시의 질서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셀레우코스는 바빌론을 방문한 안티고노스의 병사 중 한 명을 처벌했다. 셀레우코스가 이 행위를 실행하기 위한 허가를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티고노스는 약간의 금전적인 보복을 요구했다. 셀레우코스는 거부하고 이집트로 도망쳤다.
이집트에서 셀레우코스는 당시 가장 강력한 디아도코스인 안티고노스에 대항하여 다른 디아도코이를 조정하는 것을 도왔고, 에게 해에서의 지배를 위한 이어진 전쟁에서 프톨레마이오스 휘하에서 제독으로서 싸웠다. 그는 틈이 나자 소수의 부대를 이끌고 바빌론을 탈환하여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웠다.
그때부터 302년까지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영토를 계속 확장했다. 그는 안티고노스가 프톨레마이오스, 리시마코스, 카산드로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을 이용하여 인도까지 제국의 동부 지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311년에서 309년 사이에 셀레우코스는 시리아에서 자신의 국경을 공고히 하는 소위 바빌로니아 전쟁에서 안티고노스와 싸웠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마우리아 제국에 맞서 싸우는 동쪽으로 관심을 집중했다. 이 분쟁의 끝에서 그가 500마리의 전쟁 코끼리를 얻고 동부 국경을 공고히 하는 것을 보았다.
BC 301년 이프소스 전투에서 500마리의 코끼리는 해로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안티고노스가 죽은 후, 셀레우코스는 아시아에서 그의 자리를 확보했다. 이프소스 이후 세월 동안 셀레우코스는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고 오래 지속되는 왕조를 세웠다. 그는 셀레우키아 피에리아, 시리아의 라오디케아, 안티오케이아, 오론테스 강의 아파메이아 등 일련의 주요 도시를 세웠다. 그는 셀레우키아라고 불리는 9개의 도시와 안티오케이아라고 불리는 16개의 도시, 그리고 6개의 라오디케아를 세웠다.
셀레우코스의 죽음
셀레우코스는 리시마코스를 막 격파하고 자신의 여생을 보내고 싶어 한 마케도니아를 침공하려던 참이었을 때, BC 281년 자신의 동맹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아들 안티오코스 1세가 이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로마 제국에 정복된 BC 63년까지 지속되었다.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
안티고노스는 필리포스 2세 아래에서 복무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경험을 존중했고 그를 자신의 군대 대부분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BC 333년 이소스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는 페르시아 군대의 잔당들과 싸웠고 알렉산드로스는 프리기아를 확보하기 위해 그를 남겼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안티고노스는 프리기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고 페르디카스가 죽은 후 안티파트로스의 섭정 하에 아시아의 스트라테고스(장군)가 될 때까지 자신의 영역을 계속 확장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안티고노스는 디아도코이 중에서 가장 야심차고 강력한 세력임을 증명했다. 그는 셀레우코스로부터 바빌론을 빼앗았고 아시아, 에게 해,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계속 싸웠다. 동시에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는 위대한 장군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을 재통합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보고, 다른 마케도니아 장군들은 그에 대항하는 연합을 결성했다. BC 314년 카산드로스, 리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는 안티고노스에 맞서 움직였다. 이어진 전쟁은 혼란스러웠다. 그 여파로 안티고노스는 권력의 정점에 도달하는 동시에 셀레우코스가 이제부터 바빌론에서 인더스 강까지 아시아의 동부 지역을 차지할 것임을 인식했다.
311년 안티고노스는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메소포타미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이 시기 이후, 안티고노스는 남아 있는 왕조들을 상대로 계속 싸웠고, 꽤 자주 동시에 그들 모두와 싸웠다. 디아도코이 간의 전쟁은 BC 301년 이프소스 전투까지 계속되었다. 그곳에서 안티고노스는 목숨을 잃었고 BC 302년 로도스 공성전에서 사용한 기발한 공성법으로 폴리오르케테스라 불리던 데메트리오스는 달아났다.
안티고노스의 유산
이후 몇 년 동안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왕국을 정복했지만 수년 후 셀레우코스에게 점령당했다. 마침내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는 카산드로스의 아들로부터 마케도니아를 되찾고 이 지역에서 안티고노스 왕조 혈통의 영속성을 확립했다. 안티고노스 왕조는 BC 168년 로마인이 오기 전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왕조를 세우지 못한 디아도코이
제국의 첫 번째 섭정인 페르디카스와 두 번째 섭정인 안티파트로스를 시작으로, 자신만의 왕조를 세우지 못하고 혈통의 영속성을 확보하지 못한 디아도코이의 긴 시리즈가 있다.
보았듯이, 페르디카스는 BC 321년에 암살당했다. 그러나 안티파트로스는 BC 319년에 노령으로 사망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의 아들 카산드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고, 마케도니아를 지배하에 두고 3세기 초까지 그 지역의 지배권을 위해 계속 싸운 폴리페르콘을 임명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4세는 BC 309년 카산드로스에게 14세의 나이로 암살당했다. 알렉산드로스 4세는 죽을 때까지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알렉산드로스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여겨졌다.
필리포스 3세 아리다이오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형제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통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심각한 정신 건강 문제들로 고통받았다. 필리포스는 처음에 알렉산드로스 4세의 공동 통치자가 될 운명이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딸 키나네의 딸인 에우리디케와 결혼했다. 에우리디케는 매우 야심적이었고 필리포스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BC 317년에 필리포스와 에우리디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전쟁을 벌였다. 올림피아스는 그들을 붙잡아 필리포스를 살해하고 에우리디케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카산드로스
안티파트로스의 아들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내 록사나와 유일한 후계자 알렉산드로스 4세와 알렉산드로스의 사생아 헤라클레스를 살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 올림피아스의 죽음도 명령했다.
카산드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누이 테살로니카와 결혼하여 주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왕국을 위해 싸웠기 때문에 왕위에 대한 주장은 강화되었다. 결국 그는 BC 305년부터 수종으로 사망한 297년까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그의 자녀 필리포스, 알렉산드로스 및 안티파트로스는 유능한 후계자가 아님을 증명했으며, 부친의 왕국을 유지하지 못하고 곧 안티고노스 왕조의 손에 넘어갔다.
카산드로스는 테살로니카와 카산드레이아와 같은 주요 도시를 세웠다. 그는 알렉산드로스에게 완전히 파괴된 테바이도 재건했다.
리시마코스
리시마코스는 알렉산드로스의 부친 필리포스 2세의 아주 좋은 친구였다. 그는 나중에 아케메네스 제국을 상대로 한 원정에서 알렉산드로스의 경호원이 되었다. 그는 도시 리시마키아를 세웠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 리시마코스는 트라키아를 통치했다. 이프소스 전투의 여파로, 그는 영토를 확장하여 이제 트라키아, 소아시아의 북쪽 지역, 리디아, 이오니아, 프리기아를 포함했다.
그의 생애가 끝나갈 무렵, 자신의 아들을 왕좌에 앉히고자 했던 그의 세 번째 아내 아르시노에 2세는 리시마코스에게 그의 맏아들 아가토클레스를 죽이라고 강요했다. 이 살인은 리시마코스의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셀레우코스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BC 281년 코로페디온 전투에서 리시마코스를 죽였다.
출처 : The Colle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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