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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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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51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와 레미기우스 클로도베쿠스/클로비스 1세(생애 466년경-511년) 메로베우스/메로빙거 왕조 중 가장 중요한 왕인 클로도베쿠스 1세는 프랑크족의 통합자이자 갈리아 대부분의 정복자이며 메로베우스 왕조 치하의 프랑크 왕국 창시자였다. 그는 또한 프랑크의 첫 번째 기독교 왕이었다. 그는 놀랄 만큼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을 갖고 있다. 481년 그의 아버지 킬데리쿠스 1세가 사망하자, 클로도베쿠스는 오늘날 벨기에의 투르네 주변에 정착한 살리 프랑크족의 족장을 계승했다. 그는 486년 갈리아 북부의 통치자인 시아그리우스를 무찌르면서 정복을 시작했다. 이 승리는 클로도베쿠스를 루아르 강 북쪽 갈리아(나중의 네우스트리아)의 주인으로 만들었고, 그는 프랑크 측근들과 함께 수도를 수아송으로 옮겼다. 클로도베쿠스의 나머지.. 2021. 11. 7.
부이예 전투 프랑스의 탄생 날짜 - 507년 봄 위치 - 아키텐 푸아티에 북서쪽 15 km(9 마일) 부이예 역사적 배경 서유럽에서 5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발전은 이미 서로마 제국의 옛 속주를 흡수한 게르만 왕국들의 출현이었다. 확인 가능한 주요 집단은 갈리아 남서부와 스페인을 지배했던 서고트족(비시고트족), 론 계곡 상류의 부르군트족, 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부상한 살리 프랑크족, 그리고 5세기 말에 이탈리아를 지배하기 전까지 판노니아에 근거지를 둔 동고트족(오스트로고트족)이었다. 454년 샬롱(카탈라우눔 평원)의 승리자인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가 죽은 후, 갈리아에서 제국의 권력은 급속히 붕괴되었다. 461년 살해되기 전에 마이오리아누스 황제(재위 457-461년)가 임명한 로마 갈리아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인.. 2021. 11. 6.
파리 공성전 (885-886년) 이 사건을 목격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아보에 따르면 885년 가을 어느 날 고성능 선박 700 척과 아주 많은 작은 선박들이 강 하류 2 리그[10 km 또는 6 마일] 이상까지 뻗어 있는 기둥처럼 센 강을 감쌌다. 젊은 베네딕도회 수도승은 또한 이 선박들을 조종하는 '음산한 자들'이 4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아마도 바이킹의 맹공 중 가장 야심 찬 침공이었던 885-6년 파리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간 바이킹 군대는 앨프레드의 방어책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쫓겨난 소위 대군세의 다양한 요소들과 플랑드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다른 습격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탄한 아보가 그의 라틴어 서사시 "벨라 파리시아카이 우르비스"(파리시 전쟁)에서 전한 숫자는 200여 명의 방어.. 2021. 4. 17.
바이킹의 침략 -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선사시대부터 침략을 받은 적이 없다. 8세기 말에 상당히 갑작스럽게 도착한 바이킹은 3세기 이상 되는 기간을 기독교가 거의 방해 없이 조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예술적 보물을 키워온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온 뱃사람들의 약탈은 파멸과 혼란을 가져왔지만, 그들은 또한 최초의 도시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이후의 아일랜드 역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바이킹은 그들이 습격하고 교역하는 멀리 떨어진 대륙과 이 섬을 하나로 묶어 최초의 대규모 외부 접촉과 상업 생활의 시작을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 이전의 전임자들처럼, 그들 역시 원주민과 동화되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아일랜드 언어와 아일랜드 풍습을 채택하는 아일랜드의 인구통계학적 패턴을 따랐다. 처음에는 해안과 강변 정착지의.. 2021. 4. 12.
바이킹과 앵글로색슨 충분히 열심히 살펴보면 어떤 문화든지 좋은 점을 찾을 수 있으며(20세기의 특정 후보는 제외한), 최근 몇 년 동안 바이킹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신화가 항해와 베고 불태우고 겁탈하고 약탈하는 문화였다는 것을 불식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가난한 스칸디나비아 땅의 인구 압박이 그들을 배에 태웠고 호박, 모피, 바다코끼리 상아를 가지고 온 것(불량한 자세와 더불어)과 그들의 이야기에는 서사적 영웅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10세기에 바이킹이 식민지 개척자(심지어 농부로)가 되어 정착했을 때, 그들의 무역의 역동성과 공예품의 아름다움이 맹렬한 호전성을 상쇄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더블린과 요크와 같은 도시는 그들의 지배 하에 번창했으며 요크는 최근 .. 2021. 4. 9.
[웨식스] 체르디치 체르디치(라틴식 케르디쿠스)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브리튼의 앵글로색슨 정착민의 지도자로 묘사되어 있으며, 519년부터 534년까지 통치한 색슨 웨식스의 창립자이자 첫 번째 왕이다. 이후 웨식스의 왕들은 각각 체르디치에서 어떤 식으로든 내려왔다고 연대기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의 기원, 민족성, 심지어 그의 존재 자체까지도 광범위하게 논쟁이 되고 있다. 그러나 후기 서부 색슨 왕들에 의해 웨식스의 창시자로 주장되었지만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부족 집단인 Gewissae의 왕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Gewissae의 첫 번째 왕은 686년 헌장에서 자신을 '서부 색슨의 왕'이라고 부르는 캐드월러(Caedwalla)였다. 어원 대부분의 학자들은 체르디치라는 이름을 게르만어가 아닌 브리튼어군(Ceretic이라는 이.. 2021.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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