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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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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52

무함마드와 이슬람 무함마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한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예언자이다. 여기에서 무함마드와 그의 종교 원리에 대해 더 배울 것이며, 또한 이슬람이 중세 초기에 어떻게 제국으로 성장했는지 볼 것이다.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570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고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무함마드는 대상(캐러밴)을 이끌고 사막을 가로질러 물건을 옮기면서 상인 무역을 배우며 자랐다. 사막을 통과하는 교역로는 짐승에게 물을 주기 위해 여러 오아시스에 들를 필요가 있었다. 이 오아시스 중 하나가 무함마드의 출생지인 메카였다. 상인들은 카라반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며 오아시스에 들른다 메카는 아라비아 반도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메카는 오아시스일 뿐만 아니라 운석일 가능성이 .. 2022. 9. 24.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은 살아남은 동로마 제국의 다른 이름이다. 로마를 포함한 로마 제국의 더 약한 서부 지역은 야만적인 침략자들에게 함락되었다. 로마 제국의 남은 부분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황제가 통치했다. 비잔틴 제국은 1,000년 더 버티다가, 마침내 1453년 오스만 튀르크에게 함락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 해, 골든 혼 등 세 개의 수역으로 둘러싸인 반도에 건설되었다. 붐이라고 불리는 쇠사슬이 골든 혼을 가로질러 적함들이 그 지역으로 항해하는 것을 막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잔틴 제국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여겼지만, 동방은 서방의 라틴보다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말하고 그리스 스타일의 옷을 입었다. 황제와 황후는 값비싼 슬리.. 2022. 9. 24.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서로마 제국이 약해짐에 따라 로마군은 410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철수했다. 대부분이 기독교도인 로마화 된 켈트족으로 이루어진 이 속주의 시민들은 육지와 바다에서 오는 일련의 침략자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다. 이 침략자들은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덴마크, 네덜란드, 북부 독일의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 다른 소규모 집단을 포함했다. 이 침략자들은 일반적으로 이교도였고 브리튼인을 정복한 로마인이 그동안 세운 기독교 신앙을 존중하지 않았다. 500년대의 한 전설은 침입한 앵글로색슨족에 맞서 일련의 승리를 거둔 로마화 된 켈트족인 아서(Arthur)라는 이름의 왕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서 왕의 전설은 중세 시대에 성장했지만, 그의 몇 번의 승리는 침략자들을 막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서 이후, 브리튼.. 2022. 9. 24.
메로베우스(메로빙거) 프랑크 왕국 - 갈리아의 정복자 노쇠한 서로마 제국에 쏟아져 들어온 야만인 중 한 집단은 프랑크족이었다. 이 집단의 초기 역사나 그들이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크족은 중세 초기에 서유럽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프랑크족은 고대 로마 갈리아에 정착했다. 프랑크족에 대한 초기 기록 중 하나는 451년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어린 시절 친구인 훈족의 아틸라를 물리친 샬롱 전투이다.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은 로마 편에서 싸웠다. 전장의 한 프랑크인은 메로베크(메로베우스)였다. 프랑크족은 많은 부족으로 나뉘었고, 각 부족에는 그들의 왕이 있었다. 메로베크는 프랑크족의 살리 부족의 왕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메로베크는 신화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살리(Salii)는 "바다.. 2022. 9. 23.
로마와 프랑키아의 오랜 전쟁 훈족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게르만족들을 로마로 밀어냈다. 로마화 된 프랑크족은 제국이 무너지는 동안 갈리아를 방어해야 한다. 그러나 프랑크족이 더 성공적일수록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로마가 더 많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여기에서는 4세기 초에서 5세기 초로, 콘스탄티누스의 치세 말부터 갈리아에서 로마의 권위가 이양되기까지 나아갈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사망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의 몰락까지 프랑크족과 로마인은 갈리아가 새로운 프랑키아(프랑크족의 땅)로 변모함에 따라 전자가 국민으로서 그리고 지도자로서 후자를 대체하는 긴 과정에 관여했다. 이 과정은 로마가 내전에 휘말릴 때마다 라인 강 건너의 프랑크족이 갈리아를 침략했기 때문에 종종 폭력적이었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알레만니족.. 2022. 8. 28.
신과 갈리아 기독교가 마침내 중심무대에 섰다! 2-3세기 동안 갈리아는 수많은 성인과 기적을 얻었고 기독교 세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박해와 이단은 신자들을 위협한다.오늘의 에피소드는 177년부터 콘스탄티누스 치세까지 갈리아 기독교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여러 에피소드 동안 기독교는 더 큰 서사의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이제 마침내 자신만의 에피소드를 가질 때가 되었다. 마지막은 아니다. 기독교는 3세기 후반부터 21세기까지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1세기부터 현재까지 기독교는 신자들의 비밀스러운 작은 모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종교로 빠르게 변모했다. 2세기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 동부에 널리 퍼졌다. 3세기에 이르러는 로마의 다신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및 일련의 신비주의 컬트.. 2022. 8. 24.
중세 의복 중세 패션으로부터 시작하여 활기차고 멋진 1960년대에 끝나는 시리즈 중 이 글에서는 노르만인부터 중세 및 중세에서 15세기 말까지의 영국 패션에 대해 다룬다. 1050년경 일상복 이 남성과 여성(왼쪽)은 1066년 노르만인의 정복 직전인 1050년경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기본적인 중세 의복으로, 아마 양모로 만든 튜닉이 목을 덮고 긴 소매가 살짝 체형을 살리며, 일반적으로 리넨 셔츠 위에 입었다. 남성의 튜닉과 비슷하지만 더 긴 여성의 튜닉은 어깨에 반원형의 맨틀이 고정되어 있다. 여자는 긴 머리를 밴드로 묶은 후드로 가리고 여행용 주머니를 들고 다녔다. 남자는 헐렁한 호스(하의)와 가죽 신발을 신었다. 앵글로 색슨족은 남성의 튜닉을 장식하는 것과 같은 자수와 땋는 솜씨로 알려져 있었다. 1150년경.. 2022. 8. 7.
로마 브리타니아 연대표 BC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처음으로 잉글랜드 해안선에 상륙한 때부터 AD 410년의 유명한 '자신의 방어선을 지켜라'는 편지에 이르기까지, 로마인은 400년 이상 영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 종종 험난한 관계의 우여곡절을 살펴본다! BC 55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방문이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브리튼 섬에 대한 최초의 로마 군사 원정을 이끌었다. BC 54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두 번째 원정; 다시 말하지만, 침공은 정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BC 27년 - 아우구스투스는 초대 로마 황제가 되었다. AD 43년 -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4개 군단에 브리튼을 정복하도록 명령했다. 43년 (8월) - 로마군이 에식스주 콜체스터에 있는 카투벨라우니 부족의 수도를.. 2022. 8. 3.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여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로마화 하기로 결심한다. 가족극과 반란은 게르만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준다. 다음은 로마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자 갈리아, 로마 및 유럽의 역사를 정의하는 순간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이방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쉽지만 유지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정복된 문화가 정복자들과 완전히 다를 때 더 복잡해진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로마의 장군이자 제국의 계승자인 드루수스는 BC 9년에 서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여 마그나 게르마니아에 대한 로마 통치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게르마니아가 정복될 경우 갈리아 반군은 갈리아 전쟁 동안 가끔 그랬던 것처럼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능력을 잃게 된.. 2022. 6. 23.
팍스 갈리아 - 로마 갈리아로 재건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켰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또 다른 내전을 시작했으며,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로마 전쟁 내내 갈리아는 치유됨에 따라 비교적 평화롭게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퇴역 군인들의 재정착과 대규모 신도시 건설을 시작으로 갈리아에 대한 로마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갈리아는 대략 10년간의 잔혹한 전쟁 끝에 폐허가 되었다. 갈리아는 로마의 대규모 침공, 게르만족의 거듭된 침공, 수많은 부족 간 내전을 겪었다. 그 결과 인구의 20%가 죽거나 노예로 팔렸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러나 BC 50년 갈리아 부족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마지막 주요 봉기가 진압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2022. 6. 2.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옛 지도들 슬라브 부족들은 5세기에 서쪽으로부터 현재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점유하고 있는 지대에 다시 정착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루스 국가는 9세기에 키이우(키예프)와 노브고로드를 중심으로 세워졌다. 13세기에는 몽골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12세기에 설립된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200년 이상 지배(13-15세기)에서 생겨났고, 서서히 이웃한 공국들을 흡수하고 점령했다. 이반 3세와 바실리 3세는 노브고로드 공화국, 트베리 대공국, 프스코프 공화국, 볼로콜람스크 속령, 랴잔 및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 공국을 합병함으로써 모스크바 대공국(1283-1547년)의 경계 크기를 상당히 늘렸다. 모스크바의 군주들은 러시아인을 이끌고 조국을 되찾았고 1480년까지 몽골인이 추방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름은 .. 2022. 5. 21.
바이킹의 팽창 바이킹은 중세 유럽의 위대한 약탈자, 상인, 탐험가, 그리고 정착민이었다. 스칸디나비아에 기반을 둔 그들은 브리튼 제도,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프랑스, 지중해 및 러시아에 전초기지를 세웠다. 그들은 아마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거의 500년 전에 북아메리카에 발을 디딘 최초의 유럽인이었을 것이다.  아래 유럽 지도는 중세 초기 바이킹의 팽창을 보여준다. 바이킹 확장은 여러 단계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단계는 서로 다른 동기, 활동, 목적지로 특징지어진다. 바이킹 확장의 주요 단계는 다음과 같다.·초기 습격(8세기 후반-9세기 중반): 최초의 바이킹 습격은 산발적이고 주로 브리튼, 아일랜드 및 카롤루스 제국의 해안 지역을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습격은 귀금속, 노예 및 기타 .. 2022. 3. 11.
유럽 역사의 주요 지도들 476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526년 동로마 제국의 재정복 전쟁 직전 814년 카롤루스 대제 사망 당시 900년 켈트 세계에서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슬라브 세계로 이어지는 거대한 포물선 속에서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고 있었다. 900년에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000년 1000년의 서유럽은 사막을 건너는 광범위한 대상 무역망을 가진 이슬람 세계에 비해 발전이 느렸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인구는 약 31만 명이었지만 로마는 3만 6천 명, 파리는 2만 1천 명에 불과했다. 이와는 달리, 이슬람 스페인의 코르도바는 45만 5천 명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바이킹들은 발트해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 키이우 루스를 연결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북유럽에서 교역망을 가지고 있었다. .. 2022. 3. 11.
450-700년 앵글로색슨의 정복 450-475년 브리타니아의 로마 행정부는 공식적으로 410년에 끝났지만, 실제로 로마 브리튼인은 한동안 그들 스스로 통치했고 어쨌든 409년에 그 행정부를 축출했다. 380년대에 브리타니아의 서부와 북부 국경을 확보했던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재편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부 브리튼은 살아남은 후손들 사이에서 점차 조각조각 나누어지면서 파편화되고 있었다. 마지막 분열은 470년경에 온 것으로 보이며 에브로크는 서쪽 지역인 페닌네스를 잃었다. 마찬가지로 포이스도 보르티게른과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의 내전 이후 둘로 나뉘었다. 때때로 '중부 브리튼'으로 분류되었던 고도로 문명화된 서브-로마 브리튼의 심장부인 이 지역은 분명 서서히 해체되는 과정에 있었다. 색슨 해안을 따라, 이전의 라이티(야만인 용병을 지칭.. 2022. 1. 6.
AD 43-425년 로마 브리타니아 AD 43년 로마인은 시즌 후반에 군대를 3개(그중 하나는 브리튼인의 허를 찌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음)로 나누어 도착했다. 그들은 켄트의 리치보로와 웨스트서식스의 치체스터에 상륙했고, 처음에는 싸울 상대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브리튼인은 매우 현명하게 언덕과 습지로 이동하여 로마군이 보급품을 다 소모하길 바라며 시야에 띄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로마군은 카투벨라우니의 토고둠누스와 그의 형제 카라타쿠스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했고, 카라타쿠스에 대한 승리는 아마도 켄트에서였을 것이다. 도분니의 구성원들은 (아마도 사절을 통해) 즉시 항복했고, 카투벨라우니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그러나 카투벨라우니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아마도 켄트의 메드웨이 강에서 로마군을 만나 비.. 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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