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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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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7

나폴레옹의 전투별 사상자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20년에 걸쳐 치열하고 값비싼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벌어진 전투가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갔을까?Preyash Shah가 만든 이 지도는 위키피디아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나폴레옹 전투의 결과와 사상자를 보여준다. 나폴레옹 제국의 부상과 확장나폴레옹의 경력은 프랑스혁명전쟁 중 놀라운 성공을 거두면서 시작되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793년 6,300명의 사상자를 낸 툴롱 포위전 이후 나폴레옹은 빠르게 강력한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1. 툴롱 포위전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시작: 1793년 8월 29일종료: 1793년 12월 19일결과: 승리총 사상자 및 손실: 6,300명2. 방데미에르 13일 쿠데타분쟁: 프랑스혁명시작: 1794년 10월.. 2024. 10. 20.
프랑스혁명 전야의 유럽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 직전의 유럽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두드러지는 복잡하고 다양한 대륙이었다. 당시 유럽은 절대 권력이나 제한된 권력을 가진 군주제가 지배하고 있었고, 신민의 삶을 크게 통제하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더 큰 개인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증가시켰다. 특히 프랑스 왕정은 늘어나는 빚과 정치력 부족으로 국민들 사이에 점점 가난해지고 좌절하는 등 불만이 쌓이면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또한 왕정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미국 혁명의 영향과 씨름하고 있었다. 한편,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중대한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산업혁명은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었고,.. 2024. 4. 24.
프랑스 국경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프랑스 식민제국은 대영제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식민제국이었다. 1920년대와 30년대의 전성기에는 1,350만 ㎢(520만 평방마일)의 땅이 펼쳐져 있었다. 프랑스의 현재 국경에는 과거 식민지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프랑스는 11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총길이는 4,176 ㎞ (2,595 마일)에 달한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프랑스가 브라질과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여러 나라와 공유하는 국경의 길이는 다음과 같다. 1. 브라질 - 730 km (453.60 마일) 2. 벨기에 - 659 km (409.48 마일) 3. 스페인 - 623 km (387.11 마일) 4. 스위스 - 573 km (356.05 마일) 5. 수리남 - .. 2024. 4. 19.
프랑스 혁명 1789년 프랑스에는 흉작과 높은 세금으로 인해 불만이 팽배했다. 1789년 7월 14일 파리의 폭도들이 수도에 있는 왕실 감옥인 바스티유를 습격했다. 비록 내부에 죄수는 거의 없었지만, 습격은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권위와 권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동시에 전국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프랑스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4년 후 국왕 부부가 죽고 프랑스는 공화국이 되었다. 혁명의 원인 1780년대에 프랑스는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세금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프랑스의 성직자나 귀족 가문은 세금을 전혀 내지 않았고 그 부담은 노동자와 농민에게 돌아갔다. 1788년의 흉작은 많은 사람이 기근에 처해 있음을 의미했다. 국가는 값비싼 전쟁과 군주제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인해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 2024. 4. 2.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를 침공하여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로마화 하기로 결심한다. 가족극과 반란은 게르만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기회를 준다. 다음은 로마의 가장 큰 비극 중 하나이자 갈리아, 로마 및 유럽의 역사를 정의하는 순간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다면, 이방 영토를 정복하는 것은 쉽지만 유지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정복된 문화가 정복자들과 완전히 다를 때 더 복잡해진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로마의 장군이자 제국의 계승자인 드루수스는 BC 9년에 서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여 마그나 게르마니아에 대한 로마 통치의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게르마니아가 정복될 경우 갈리아 반군은 갈리아 전쟁 동안 가끔 그랬던 것처럼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할 능력을 잃게 된.. 2022. 6. 23.
팍스 갈리아 - 로마 갈리아로 재건 카이사르가 내전을 일으켰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또 다른 내전을 시작했으며, 마침내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로마 전쟁 내내 갈리아는 치유됨에 따라 비교적 평화롭게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퇴역 군인들의 재정착과 대규모 신도시 건설을 시작으로 갈리아에 대한 로마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지난 에피소드에서 갈리아는 대략 10년간의 잔혹한 전쟁 끝에 폐허가 되었다. 갈리아는 로마의 대규모 침공, 게르만족의 거듭된 침공, 수많은 부족 간 내전을 겪었다. 그 결과 인구의 20%가 죽거나 노예로 팔렸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러나 BC 50년 갈리아 부족들이 독립을 포기하고 마지막 주요 봉기가 진압되면서 전쟁은 끝났다.. 2022. 6. 2.
파리 공성전 (885-886년) 이 사건을 목격한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의 아보에 따르면 885년 가을 어느 날 고성능 선박 700 척과 아주 많은 작은 선박들이 강 하류 2 리그[10 km 또는 6 마일] 이상까지 뻗어 있는 기둥처럼 센 강을 감쌌다. 젊은 베네딕도회 수도승은 또한 이 선박들을 조종하는 '음산한 자들'이 4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아마도 바이킹의 맹공 중 가장 야심 찬 침공이었던 885-6년 파리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센 강을 거슬러 올라간 바이킹 군대는 앨프레드의 방어책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쫓겨난 소위 대군세의 다양한 요소들과 플랑드르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다른 습격자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탄한 아보가 그의 라틴어 서사시 "벨라 파리시아카이 우르비스"(파리시 전쟁)에서 전한 숫자는 200여 명의 방어.. 2021.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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