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틸라(바두일라라고도 불림)는 동고트의 왕(541-552)이었다. 토틸라는 자신의 백성을 이끌고 비잔틴 제국 군대에 맞섰다. 543년에 그는 제국이 동고트 왕국을 점령했을 때(540년) 잃어버린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영토를 되찾았다. 그는 계속해서 546년과 549년에 로마를 탈환했다. 동고트군은 552년 타기나이 전투에서 거대한 비잔틴 군대에게 짓밟혔고, 토틸라는 목숨을 잃었다. 동고트의 저항은 새로운 왕 테이아스가 이듬해 벌어진 몬스 락타리우스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중세 시대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 후반부터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는 15세기 후반까지의 유럽 역사 시기이다. 이 시기는 한 때 "암흑시대"로 알려진 중세 초기(5세기 후반-10세기), 중세 성기(1000-1250), 중세 후기(1250-1500)의 세 시기로 흔히 구분된다. 프랑크족, 서고트족, 동고트족을 포함한 게르만 민족(야만인이라고도 알려짐)이 한때 서로마 제국이 통치했던 땅에서 새로운 왕국을 형성한 반면,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서 계속해서 강대국으로 남아 있었다. 7세기에는 성지(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살았던 팔레스타인)를 포함한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비잔틴 영토가 이슬람 칼리파국에 정복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
4세기말에 서로마 제국은 이미 쇠락해 있었다. 한때 강력했던 로마 군대와 번영하던 경제가 이제는 약해진 반면, 제국의 황제들은 광대한 영토를 점점 더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동시에, 제국은 로마 신민이 아닌 야만인들의 침략으로부터 점점 더 많은 압력을 받게 되었다. 훈족으로부터 달아난 수많은 고트족과 다른 게르만 민족들이 제국의 경계 내에 위치한 땅으로 이주하고 정착했다. 곧, 서로마 제국의 전역에 걸쳐 야만인 왕국들이 세워졌다. 고트족은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나뉘었다.
알라리쿠스 1세가 이끄는 서고트족이 로마를 약탈한 해인 410년까지 알란족, 반달족, 수에비족은 갈리아(대략 오늘날 프랑스)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퍼져나갔다.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부르군트족이 북부 갈리아에 정착했고, 앵글족, 색슨족, 유트족이 브리튼으로 이주했다. 한편, 중앙아시아에서 온 유목민인 훈족의 공격적인 확장으로 인해 게르만 민족이 로마 영토로 이주하게 되었고, 440년대와 50년대에 그들을 이끈 왕 아틸라가 동·서 제국을 빈번하게 습격했다.
439년까지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그곳에 왕국을 세웠다. 여기에는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뿐만 아니라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가 포함되었다. 서부 지중해에 기반을 둔 반달족은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동고트의 왕(471-526)이자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의 통치자(493-526) 테오도리쿠스 대왕
476년까지 서로마 황제들은 그들의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그 해에 야만인 왕 오도아케르는 마지막 로마 황제인 16세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 493년에 이르러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계속해서 발칸반도 북부를 포함한 다른 옛 로마 땅들을 점령하고, 스페인에서 자신의 손자 아말라리크를 왕위에 앉혔다. 게르만 왕 중 가장 강력한 왕으로서, 부르군트족과 반달족도 테오도리쿠스의 지배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게르만 왕국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에 부르군트와 프로방스를 정복한 후 정점의 메로베우스 왕국. 속국"Tributary kingdom"이란 이웃의 더 강력한 왕국이나 제국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 우월한 세력에 복종의 표시 또는 공물을 보내는 왕국을 말한다.
6세기에 옛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 왕국으로 나뉘었다. 킬데리쿠스 1세 치하의 프랑크족이 북부 갈리아에 프랑키아라는 왕국을 세웠다. 킬데리쿠스의 아들 클로도베쿠스 1세(481-511)가 메로베우스 왕조를 세워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고 백성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서고트족과 수에비족은 이베리아 반도(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왕국을 세웠고, 반달족은 북아프리카와 서부 지중해 섬들을 지배했다. 553년 비잔틴 제국이 동고트족으로부터 빼앗은 이탈리아의 북부는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침략을 받았다.
일부 브리튼 원주민은 앵글로색슨족의 그레이트브리튼 침략을 피해 오늘날 브르타뉴로 알려진 프랑스 북서부에 정착했다. 그들이 남긴 섬의 대부분은 600년까지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 이스트앵글리아 등 앵글로색슨 왕국이 지배했다.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더 작은 왕국들은 여전히 브리튼인과 픽트인이 지배했다. 아일랜드는 수십 개의 작은 부족 왕국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슬라브족의 팽창
그러는 동안 슬라브족이 동유럽의 고향을 벗어나 서방으로 이주한 게르만 부족들이 버린 땅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슬라브족은 중앙유럽과 발칸반도를 가로질러 6세기에 비잔틴 제국의 국경에 도달했다.
서로마 제국의 언어인 라틴어는 점차적으로 거기서 발전한 로망스어(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로 알려진 현지 언어로 대체되었다. 슬라브족이 슬라브어를 가지고 중앙, 동부 및 남동부 유럽으로 이동한 반면, 그리스어는 비잔틴 제국의 언어로 남아 있었다.
비잔틴 제국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비록 힘은 약해졌지만, 동부 지중해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65) 치하에서 비잔틴은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으로부터, 그리고 한동안은 이탈리아를 동고트족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542년 치명적인 전염병의 발생이 유스티니아누스의 전진을 막았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이후, 북방에서 슬라브족이 비잔틴 제국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586년에는 비잔틴의 거대한 도시 테살로니키를 급습하기도 했다. 또 다른 민족인 판노니아 아바르족도 560년대에 그들의 땅에서 다뉴브강 북쪽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8세기말까지 비잔틴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
바실레이오스 1세가 그려진 882년의 주화. 비잔틴 제국은 바실레이오스 1세(867-86)와 마케도니아 왕조의 계승자들 아래에서 부활했다. 국경은 다시 한번 확장되었다. 4세기부터 기독교 국가였던 제국은 북쪽 국경에 있는 많은 민족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이익을 얻기도 했다.
680년경에 세워진 불가리아 제국은 유럽 동남부의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시메온 1세는 비잔틴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920년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비잔틴 제국은 회복되었고, 1014년 바실레이오스 2세 "불가르 학살자"의 지휘 하에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했다.
7세기부터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비잔틴 제국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기독교 유럽이 아니라 신흥 이슬람 아랍 제국에서 비롯되었다.
이슬람의 부상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죽음부터 661년 우마이야 왕조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리고 750년 아바스 칼리파국이 시작될 때까지 이슬람 제국의 성장을 나타낸 지도. 무슬림 군대는 634-635년 시리아를 시작으로 637-642년 페르시아와, 계속하여 640-641년에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로부터 중동의 많은 영토를 정복했다. 북아프리카는 7세기 후반에 그들에게 넘어갔고, 714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아랍인들에게는 알안달루스로 알려져 있음)의 대부분이 뒤따랐다.
714년까지 아랍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8세기 중반까지 서유럽의 나머지 지역에 위협이 되었다. 카롤루스 마르텔루스 휘하의 프랑크 군대가 732년 투르 전투(푸아티에 전투 또는 아랍인들에게 순교자들의 위대한 여정 전투라고도 불림)에서 그들을 격파하고, 아랍인들이 프랑스로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슬람의 유럽 진출은 군사적 패배 때문이 아니라 우마이야 칼리파를 축출한 아바스 왕조가 중동으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북쪽에 국한되었던 기독교 스페인은 9세기와 10세기에 점차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레온 왕국을 세웠다.
수도사와 선교사
아우구스티누스 칸투아리엔시스. 브리튼의 앵글로색슨 왕들을 설득하여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의도로, 그레고리우스 1세 교황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라고 불리는 수도사를 켄트로 보냈다. 597년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애설버트 왕은 수도사들이 캔터베리에 교회를 짓는 것을 허락했고, 그곳은 이후 잉글랜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627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조수 중 한 명이 노섬브리아의 왕 에아드위네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요크에 교회를 세웠다. 점차, 잉글랜드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했다.
서방의 중세 초기 시대에 수도주의, 즉 수도승과 수녀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헌신하는 삶의 방식이 등장했다. 대부분은 세속적인(비종교적인)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수도원, 수녀원 또는 대수도원에서 살았다.
그러나 일부 수도사들은 공동체 안에 살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들은 이교(비기독교) 유럽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일랜드 수도사 콜룸바는 560년대에 스코틀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이오나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595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선택하여 앵글로색슨 왕들과 그 신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브리튼 선교 임무를 맡겼다.
베다 베네라빌리스로도 알려진 베데(672 또는 673-735)는 앵글 왕국인 노섬브리아 출신의 베네딕토회 수도사였다. 중세 초기의 가장 위대한 교사 중 한 명인 그는 "앵글인의 교회사" 저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번역한 그의 저술은 동료 앵글로색슨인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베데는 또한 그리스도의 탄생(AD 즉 안노 도미니"주님의 해")부터 연대를 측정하는 관행을 확립하는 일도 했다.
종종 지역 사회에서 유일하게 교육을 받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수도사들은 남아 있는 라틴어 사본의 대부분을 필사하고 새로운 작품을 썼으며 학문을 장려할 목적으로 사상과 역사에 대한 지식을 정리했다. 그중에는 노섬브리아 앵글로색슨 왕국에 있는 수도원에서 살면서 작업했던 베네딕토회 수도사 베데(735년 사망)가 있었다.
카롤루스의 유럽
킬데리쿠스 1세(481년 사망)부터 프랑크 왕들의 정복과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814년 사망) 및 카롤루스 제국의 최대 범위에 이르기까지를 나타낸 지도.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오늘날 프랑스, 독일, 저지대 국가, 오스트리아 및 북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포함했다.
6세기 초 클로도베쿠스 1세가 죽은 후, 북부 갈리아의 프랑크 왕국은 각각 그의 후손이 통치하는 세 개의 메로베우스 왕국, 즉 아우스트라시아, 네우스트리아, 부르고뉴로 나뉘었다. 7세기와 8세기에 아우스트라시아와 네우스트리아 사이의 전쟁 기간 후, 두 왕국은 751년에 단신왕 피피누스의 통치하에 통합되었다. 그는 카롤루스 왕조(프랑크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루스의 후손)의 첫 번째 왕이 되었다.
768년 사망한 피피누스는 그의 왕국을 두 아들 카롤루스와 카를로마누스에게 맡겼다. 그의 형제가 사망한 3년 후에, 카롤루스는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 즉 샤를마뉴로 알려진 그는 카롤루스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마침내 오늘날 프랑스, 북부 이탈리아, 저지대 국가들, 스위스, 그리고 독일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샤를마뉴는 800년 크리스마스에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부활한 서로마 제국(훗날 신성 로마 제국으로 알려짐)의 황제로 즉위했다. 샤를마뉴는 814년 사망할 때까지 아헨 궁정에서 자신의 위대한 제국을 통치했다.
샤를마뉴가 죽은 후, 그의 후손들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다. 9세기 전반에 걸쳐, 황제 로타리우스 1세와 그의 형제 피피누스 1세 및 루도비쿠스 2세와 그들의 이복형제 대머리왕 카롤루스 간의 권력 투쟁은 카롤루스 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은 서프랑키아(오늘날 프랑스의 대부분), 중프랑키아(저지대 국가들, 부르고뉴, 스위스 서부,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동프랑키아(오늘날 독일의 많은 부분, 스위스 동부, 오스트리아, 카린티아-대략 현재의 슬로베니아)로 나뉘었다. 카롤루스 왕조는 결국 987년 위그 카페가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카페 왕조로 대체되었다.
바이킹
이 시기쯤, 대서양과 서프랑키아의 북쪽 해안은 남부 스칸디나비아에서 해적을 보내던 바이킹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바이킹은 또한 브리튼 제도를 급습했고 나중에 그곳과 아이슬란드에 정착했다. 911년, 서프랑키아의 단순왕 샤를(898-922)은 바이킹의 급습 중 샤르트르 공방전에서 승리한 후 바이킹 족장 롤로와 화해하여 노르드인 정착민들에게 노르망디가 되는 프랑스 북부 땅을 주었다.
노르드 상인들이 볼가강, 드네프르강, 드네스트르강을 따라 내려간 이후 바이킹은 오늘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바이킹 군대는 860년, 907년, 941년에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웨식스의 앨프레드 왕이 878년 에딩턴 전투에서 바이킹 대군을 물리쳤다. 바이킹 지도자 구스럼과 그의 부하들은 항복할 때까지 앨프레드의 군대에 포위당했다. 웨드모어 조약의 평화협정 조건 중 하나로 구스럼(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는)은 앨프레드(오른쪽에 앉아 있는)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앨프레드 대왕(871-899)도 바이킹과 평화 협상을 하여 데인(덴마크)인이 노섬브리아, 머시아 및 이스트앵글리아의 일부 지역에 정착하도록 허용했다. 10세기 중반까지, 앨프레드의 후계자들은 노섬브리아를 다시 정복했고, 그레이트브리튼섬의 남부 지역에 앵글로색슨의 지배권을 재확립했다. 북쪽에서는, 키나드 막알핀(860년 사망)이 픽트인과 스코트인(게일인)을 통합하여 알바 왕국(오늘날 스코틀랜드)을 세웠다.
마자르족
9세기말, 중프랑키아와 동프랑키아는 마자르족(헝가리인)의 침략을 받았다. 아르파드의 지도 아래, 마자르족은 판노니아 평원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이곳은 카르파티아 산맥과 알프스 사이에 위치한 중앙유럽의 저지대 지역이다. 당시 이곳의 슬라브족 인구는 매우 적었다. 896년 그곳에서 마자르족은 헝가리 공국을 세웠다.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대를 분쇄한 후, 그들은 더 서쪽에 있는 프랑크 영토를 급습했다.
동프랑키아에서, 작센 공작 오토(훗날 오토 대제로 알려짐)는 마자르족을 몰아내기 위해 모든 게르만 부족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했다. 그는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이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몇 년 후, 962년 오토는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했다. 훗날 헝가리는 1000년 크리스마스에 아르파드의 후손인 이슈트반 1세가 에스테르곰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왕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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