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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중세 성기 유럽

by 금곡동로사 2024.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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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1198년부터 1216년 사망할 때까지 카톨릭 교회의 수장이었다. 중세 교황들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 중 한 명인 그는 유럽의 왕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남부 프랑스의 알비 십자군뿐만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와 성지의 무슬림 통치자들을 상대로 십자군을 지휘했다. 그는 또한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끝난 제4차 십자군을 조직했다.

 

13세기 몽골의 침략을 제외하면, 중세 성기(1000-1250) 동안 유럽으로 대규모 이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왕국들은 국경을 설정하거나 확장을 시도하며 이웃 국가와 갈등을 일으켰다. 이 시기 동안 권력의 정점에 이른 카톨릭 교회는 유럽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셀주크 튀르크에 맞서는 일련의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기독교 왕국은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부분을 빼앗았다. 보헤미아, 이탈리아, 부르고뉴 왕국은 다른 작은 영토들과 함께 독일 왕국과 연합하여 신성 로마 제국을 형성했다.

 


유럽의 인구

지난 2,000년 동안 북반구의 평균 기온을 나타낸 그래프. 색상은 특히 추운 시기와 따뜻한 시기를 보여준다. 파란색은 중앙아시아 민족들이 서쪽의 유럽으로 이주한 추운 시기(게르만족의 대이동)와 소빙하기(15-19세기)를 나타낸다. 주황색은 중세 온난기와 현재의 지구 온난화 시대를 나타낸다.

 

유럽의 인구는 중세 시대에 급속하게 증가하여 1000-1347년 사이에 3,500만 명에서 8,0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는 농업 수확량이 향상되고 무역이 증가하여 전반적인 번영의 증가로 이어지는, 중세 온난기라고 알려진 따뜻한 기후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주나 침입이 줄어들면서 갈등이 감소한 결과일 수도 있다.

영주가 소유한 땅인 장원에서 밭을 일구고 있다. 영주의 땅을 경작하는 대가로, 지역 주민들은 그중 일부를 스스로 경작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는 장원제라고 알려져 있다.

 

중세 성기에는 봉건제가 출현했다. 이 제도 아래서 기사를 비롯한 하급 귀족들은 영주로부터 토지를 임대할 수 있는 권리를 받은 대가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에 있는 농민들은 장원으로 알려진 마을 주변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대가로 귀족들에게 임대료와 노동복무를 빚졌다.

 

농작물 파종과 수확, 가축 사육(및 도축)을 포함하여 농장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작업의 월별 달력을 나타낸 중세 그림

당시 유럽 인구의 약 90%가 농민이었다.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개방경지제(장원에 속한 거대한 밭을 농민들이 농사를 짓도록 빌려준 좁은 띠 모양의 땅으로 나눈 것)가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각 밭의 작물은 토양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해마다 돌아가며 재배되었다.

성은 귀족 또는 하급 귀족과 그의 부인인 영주와 귀부인의 가정집이었다. 많은 수의 고용인과 하인, 장인이 영주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켰다. 위 그림에서 영주가 자신의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귀족은 성을 쌓음으로써 지배력의 근원인 토지 통제권을 확보하고 유지했다. 처음에는 나무로, 나중에는 돌로 지은 이 거대하고 요새화된 거주지는 경쟁 영주의 군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다.

도시 사람들은 귀족, 성직자, 농민이라는 전통적인 사회 구분에 해당하지 않았다. 도시가 점점 커지고 수가 증가하면서 12세기와 13세기에 도시 사람들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발트해 연안,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플란데런(플랑드르) 지역에서는 도시의 성장이 이들 간의 교역 증가로 이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황제 프리드리히 1세 치하의 신성 로마 제국 지도(독일어 표기). 황제의 가문은 남쪽으로 확장되어 시칠리아 왕도 배출했다.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제국은 왕국, 공국, 공작령, 백작령 및 도시와 같은 수백 개의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양한 군주, 영주 및 주교들이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그들은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자였다. (쾨니카이히"Königreich"는 왕국을 의미하고, 키르쉰슈타트"Kirchenstaat"는 교황이 통치하는 이탈리아의 교황령을 의미한다)

 

신성 로마 제국은 원래 독일 왕국(동프랑키아)과 이탈리아 왕국의 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030년대까지 오토 1세의 후손인 오토 왕조와 나중에 잘리어 왕조의 통치자들 아래 제국은 경계 내의 많은 다른 작은 영토들과 함께 부르고뉴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흡수했다. 전통에 따르면, 황제는 로마의 황제들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다. 황제는 독일 최고 귀족 회의에서 선출되었고 교황에 의해 "로마인의 왕"으로 즉위했다.

1138년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콘라트 3세와 함께 권좌에 오른 후, 제국 서부에서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포함한 독일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슬라브인들이 주로 거주하지 않았던 동쪽의 프로이센, 포메라니아, 슐레지엔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황제들, 심지어 강력한 호엔슈타우펜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1155-90)조차도 제국의 다양한 민족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주장하려고 애썼다. 제국은 수백 개의 왕국, 공국, 공작령, 백작령 및 기타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황제들은 교황 및 독일 귀족들과 자주 충돌했다. 13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은 1241년, 1259년, 1287년에 동유럽을 침공한 몽골 제국의 막강한 세력의 위협에 직면했다.

 


카페 왕조와 노르망디

프랑스의 루이 9세(재위 1226-70, 훗날 생 루이)는 자신의 가장 강력한 귀족들과 존 왕이 상실한 프랑스 땅을 회복하려는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갈등에 직면했다. 1242년 타이르부르 전투에서 헨리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루이는 아키텐, 멘, 프로방스를 포함한 여러 지방을 합병했다. 부와 권력뿐만 아니라 공정함, 동정심, 종교적인 열정으로 유명한 루이는 프랑스 사법을 개혁했다. 그는 1297년에 성인이 되었다.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이 설립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를 포함하여 전 세계의 많은 장소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카페 왕조 아래에서 프랑스 군주는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국가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요 라이벌은 노르망디 공작들이었다. 그중 한 명인 윌리엄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모두 아우르는 제국을 세웠다. 헨리 2세(1154-89)와 그의 아들 리처드 1세(1189-99)의 앙주(플랜태저넷) 왕조 아래에서, 헨리가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결혼함으로써 잉글랜드의 왕들은 프랑스의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 리처드의 남동생 존(1199-1216)은 1204년에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1180-1223)에게 노르망디와 북부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을 빼앗겼다. 루이 9세(1226-70) 치하에서 프랑스의 왕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

 


시칠리아 왕국

시칠리아의 초대 왕 루제루 2세를 묘사한 중세 삽화

노르만족 모험가들은 1016-17년에 남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비잔틴 통치자들을 격파했다. 그들은 마침내 아랍으로부터 시칠리아와 몰타를 정복하고 1130년 루제루 2세 치하의 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이탈리아 반도 남부도 포함하고 있던 왕국은 1194년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그리고 1266년에는 강력한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형제인 앙주 공작 샤를(카를루 1세)에게 넘어갔다.

1282년 프랑스에 대항한 시칠리아 인들의 성공적인 봉기, 즉 시칠리아 만종 사건(부활절 월요일 저녁 기도 시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림)은 아라곤 왕의 통치하에 들어온 시칠리아 섬과 앙주 가문에 남아 있으면서 나폴리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는 본토 사이의 왕국 분열로 이어졌다.

 

 

레콩키스타

"엘 브라보"(용맹왕)로 알려진 알폰소 6세(1065-1109)는 레온(1065-1109), 갈리시아(1071-1109), 카스티야(1072-1109)의 왕이었다. 1085년 그가 무슬림 통치자들로부터 톨레도를 정복하고 엘 시드가 발렌시아를 점령하면서 그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이는 또한 1086년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고, 알안달루스(무슬림 이베리아)를 고수한 무라비트 왕조의 무슬림 통치자 유수프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이베리아에서는 반도 북부의 레온, 카스티야, 아라곤, 나바라, 포르투갈의 기독교 왕국들이 레콩키스타로 알려진 기간 동안 남쪽의 무슬림 지역에 대한 점진적인 재정복을 계속했다. 11세기에 코르도바 칼리파국이 해체되면서 무슬림 통치자들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비록 무라비트 왕조가 1170년대에 통치를 재확립했지만, 무슬림들은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기독교 세력에 패했다. 그 후 두 개의 무슬림 주요 거점이 기독교인들에게 함락되었는데, 1236년의 코르도바, 1248년의 세비야였다. 이로 인해 그라나다만이 무슬림의 손에 남았다.

 

914년에서 1492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가 어떻게 기독교 국가들에게 "재정복"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스페인어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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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행군하고 있는 십자군 병사들. 1087년 예루살렘의 무슬림 통치자들은 기독교 순례자들이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교황의 요청에 따라 유럽 전역의 기독교인들은 십자군이라고 불리는 군사 원정을 조직했다. 왕부터 기사, 귀족부터 농민까지 모든 사람이 참여했다. 1118년에 설립된 성전기사단(위 그림에서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하얀 방패를 들고 있는)과 같이 싸움을 하는 수도사들도 나중에 십자군에 합류했다.

 

11세기에 이슬람 셀주크 제국이 중동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1073년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1071년 셀주크 군대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격파하고 소아시아(오늘날 튀르키예의 아나톨리아)를 거쳐 진격했다. 예루살렘은 수백 년 동안 무슬림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셀주크가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기독교 인구, 서방의 순례, 비잔틴 제국의 존립이 위협을 받았다.

비잔틴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셀주크와의 싸움에서 도움을 요청했다. 우르바누스는 1095년 정식으로 제1차 십자군을 선포했다. 십자군의 목적은 예루살렘을 무슬림의 지배로부터 되찾는 것이었다. 이에 응답한 유럽 각지의 수만 명이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1099년 도시를 탈환했다.

 

이 그림에 나타난 1204년 4월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은 제4차 십자군 중에 일어났다.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연합군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하고, 일부를 파괴했다. 많은 고대와 중세의 로마 및 그리스 작품이 도난당하거나 파괴되었다. 도시가 점령된 후, 라틴 제국이 세워지고 플랑드르의 보두앵이 보두앵 1세 황제로 즉위했다.

 

십자군은 성지에 국가(십자군 국가들, 즉 우트르메르)를 세워 자신들의 정복을 유지하려고 했다. 12세기와 13세기 동안 그들과 주변 아랍 국가들 사이에 일련의 갈등이 있었고, 이는 더 많은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졌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참가한 서방 기독교 세력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뒤 1261년까지 지속된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제국을 세웠다. 1291년까지 십자군 국가들은 모두 사라졌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기독교 신앙을 따르는 박해받는 집단인 카타리파가 알비 십자군(1209-29년) 동안 기사들에게 칼에 찔리는 장면을 묘사한 중세 시대의 삽화.

 

"십자군"이라는 단어는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기독교인과 무슬림 사이의 투쟁인 레콩키스타는 1123년 십자군으로 선포되었다. 1199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회가 인정하는 믿음에 공개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기독교 이단자들을 상대로 십자군을 소집했다. 여기에는 남부 프랑스의 카타리파를 겨냥한 알비 십자군(1209-29)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물리적 세계를 거부하고 교황을 포함한 사제직을 무가치하고 부패한 것으로 일축한 개혁 운동가들이다.

 


해양 공화국

1192년부터 1205년 사망할 때까지 베네치아의 도제였던 엔리코 단돌로. 기민한 통치자였던 그는 베네치아군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1204년 제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에서 그의 역할로 기억된다. 그의 초상화는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틴토레토(1518-94)의 작품이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인 베네치아와 제노바라는 두 개의 중요한 해양 공화국이 중세 성기에 두각을 나타냈다. 베네치아 공화국(공식 명칭은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 즉 이탈리아어로 "라 세레니시마")은 7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베네치아는 레반트(지중해의 동쪽 해안)뿐만 아니라 유럽과 북아프리카 간의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고, 중세 성기 동안 매우 부유해졌다. 강력한 베네치아 함대는 십자군 전쟁, 특히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약탈하는 것으로 끝난 제4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해안의 자라(오늘날 자다르), 크레타 섬, 에게해 제도를 획득하는 보상을 받았다. 공화국은 도시 국가의 의회인 베네치아 대평의회 의원들이 선출한 도제가 통치했다.

 

안티오키아 공성전의 중세 그림. 이 공성전은 십자군이 시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1097년과 1098년의 제1차 십자군 중에 일어났다. 제노바 함대가 도시를 봉쇄했고, 그 후 셀주크 제국 군대에게 붙잡혔다.

 

제노바 공화국은 10세기에 등장했다. 신성 로마 황제는 이름뿐인 대군주였고 도시는 선출된 집정관들이 통치했다. 제노바는 제1차 십자군 동안 함대의 해전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상인들에게 유리한 많은 상업적 계약을 얻으면서 번영을 누렸다. 12세기에 걸쳐 제노바는 지중해에서 지배적인 해군력으로 성장했다. 위대한 경쟁자인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지중해 노예무역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동서분열

1054년 유럽의 동서분열 지도

중세 초기에 걸쳐, 동방 즉 비잔틴 기독교 교회와 서방 교회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들이 나타났다. 일부 논쟁은 믿음(신학)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논쟁은 예를 들어, 성찬식에서 누룩을 넣은 빵을 사용해야 하는지, 누룩을 넣지 않은(납작한) 빵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과 같은 교회 관행에 대한 것이었다. 동서분열이라고 불리는 공식적인 단절은 로마에 있는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총대주교청의 두 교회의 지도부가 교황이 동방 교회에 대해서도 권위를 가져야 하는지를 놓고 충돌했던 1054년에 일어났다. 기독교는 둘로 나뉘어 서방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되었고 동방 교회는 동방 정교회가 되었다.

 


수도주의(修道主義)

성 프란치스코가 새들에게 설교하는 중세 그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삶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는 그가 동물과 환경에 대해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전승에 따르면, 프란치스코가 새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그 새들 중 한 마리도 날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종종 손에 새가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프란치스코가 구비오 도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늑대를 어떻게 진정시켰는지에 대해 알려준다.

 

중세 성기는 위대한 종교 운동의 시기였다. 보다 순전한 종교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카르투시오회(1084년 쾰른의 성 브루노에 의해 설립)와 시토회(1098년 시토 대수도원의 설립과 함께 베네딕토회에서 갈라진 수도회)를 포함한 새로운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13세기에 빈곤을 맹세하고 구걸로 생계를 꾸린 탁발수도회, 즉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등장했다. 프란치스코회는 빈자 클라라(가난한 클라라) 수녀회도 설립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가 설립했다. 도미니코회는 1216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카스티야 출신의 신부인 산토 도밍고(성 도미니코)가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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