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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유럽/중세유럽

중세 후기 유럽

by 금곡동로사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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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7년의 프랑스 지도(프랑스어 라벨이 붙어 있는). 당시 이 나라는 공작령과 백작령 등 봉건 영토들의 모자이크였다. 1328년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통치를 시작한 발루아 가문은 백년전쟁 동안 잉글랜드 침략군과 그 강력한 동맹국인 부르고뉴의 큰 도전에 직면했다. 1415년 아쟁쿠르에서 잉글랜드가 압승을 거둔 이후, 잔다르크의 등장은 1429년부터 프랑스에게 유리하도록 전쟁의 방향을 바꾸었다.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와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서로의 차이점을 해결하고 잉글랜드로부터 프랑스의 넓은 지역을 탈환했다.

 

잉글랜드, 프랑스 및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아라곤, 카스티야, 포르투갈)과 같은 왕국들은 중세 후기(1250-1500)에 계속해서 힘을 강화했다. 이 시기의 오랜 갈등으로 인해 왕국에 대한 왕권은 강화되었고, 봉건 영주들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그러나 전쟁 비용을 지불하려면 국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해야 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의회와 프랑스 삼부회와 같은 납세자를 대표하는 의회가 창설되었다. 군주가 세금을 올리려면 그들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 의회 중 일부는 권력을 얻기 시작했다.

 


교역

1241년에 체결된 독일 항구 뤼베크와 함부르크 간의 무역 동맹을 묘사한 중세 삽화. 1356년에 설립된 한자동맹의 중심 동맹이 되었다. 뤼베크는 발트해와 북해의 어장에 접근할 수 있었고, 함부르크는 내륙의 소금 무역로에 대한 접근을 통제했다.

 

중세 도시들의 성장은 발트해 연안, 이탈리아 중북부, 플란데런 지역에서 이들 간의 교역 증가로 이어졌다. 발트해 연안 도시들은 한자동맹으로 서로 교역을 했고,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들은 지중해 전역으로 무역을 확대했다. 13세기 후반에는 극동으로 향하는 새로운 육로와 바닷길이 열렸으며,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도 그 경로를 따라 여행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중세 후기 유럽의 주요 무역로를 보여주는 지도. 검은색 선은 한자동맹 경로, 파란색은 베네치아 경로, 빨간색은 제노바 경로를 나타낸다. 보라색 선은 베네치아와 제노바 모두가 사용하는 경로이다. 육지와 강의 경로는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기근, 질병 및 반란

1315-17년의 대기근은 비정상적으로 오랜 기간 폭우가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광범위한 농작물 실패와 소의 질병은 북유럽 전역에 심각한 식량 부족을 초래했고, 특히 농민들(인구의 약 95%) 사이에서 높은 수준의 범죄, 질병 및 사망으로 이어졌다. 빵을 살 여유가 되지 않았던 그들은 부리는 가축을 도축하고, 개고기를 먹고, 피혁과 신발을 요리하려고 했다. 대기근은 여러 해에 걸쳐 엄청난 양의 먼지와 화산재를 대기로 보낸 뉴질랜드 타라웨라 산의 대규모 화산 폭발로 인해 촉발되었을 수 있다.

 

14세기 초반은 기근으로 얼룩졌는데, 가장 큰 재앙은 1315-17년의 대기근이었다. 이때 중세 온난기는 농업에 훨씬 불리한 소빙하기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기근은 비정상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폭우가 내리면서 시작되었다. 그 결과 광범위한 농작물 실패와 소의 질병이 발생하고 북유럽 전역에 심각한 식량 부족을 야기했다.

 

그 뒤를 이어 1347년 흑사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1350년까지 맹위를 떨쳤다. 사망자 수는 약 3,500만 명에서 5,000만 명 사이, 즉 유럽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에서 절반 정도로 엄청났다. 도시들은 혼잡하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전염병이 사라진 후, 지주들이 농장 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이제는 그 수가 훨씬 줄어든 노동자들의 임금은 상승했다.

귀족들이 그들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려고 시도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여기에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자크리의 난(1358)과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농민의 난"(1381)이 포함된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플란데런의 헨트와 브뤼허에서도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1358년 6월 모에서 벌어진 자크리 반란의 실패를 묘사한 중세 삽화. 자크리의 난은 백년전쟁 당시 북부 프랑스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이다. 반란은 농민들이 입은 누비 중백의를 귀족들이 조롱하듯 "자크"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전쟁 중에 귀족들의 성을 방어하도록 강요하는 법이 통과된 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귀족들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 패배한 비겁함과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재산을 보상하기 위해 부과한 세금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 반란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백년전쟁

백년전쟁 중인 1346년에 일어난 크레시 전투를 묘사한 중세 삽화. 이는 북부 프랑스에서 필리프 6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왼쪽)과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오른쪽)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장궁병이 제노바 석궁병을 패주시킨 이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와 프랑스군의 막대한 인명 손실을 가져왔다. 잉글랜드군은 인근 칼레 항을 포위하여 이듬해에 점령했다. 항구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손에 남아 있었다.

 

14세기 내내, 프랑스 왕들은 강력한 귀족 가문을 희생시키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들이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잉글랜드 왕의 땅을 몰수하려고 하면서, 1337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백년전쟁이라고 알려진 이 전쟁은 1세기 이상 동안 계속되었다. 우선, 에드워드 3세(1327-77)와 그의 아들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크레시 전투(1346)와 푸아티에 전투(1356)에서 승리하며 우위를 점했다.

 

웨일스와 잉글랜드 장궁병이 프랑스 석궁병을 패퇴시킨 크레시 전투는 프랑스군에게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다. 그 후 잉글랜드군은 인근의 칼레 항을 포위하여 이듬해에 함락시켰다. 그들은 이제 프랑스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1431년 잔다르크가 19세의 나이로 화형에 처해진 것을 묘사한 19세기 그림. 그녀를 억류한 잉글랜드인들은 잔다르크를 이단자, 즉 당대의 통념과 맞지 않는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간주하여 재판에 회부했고 그녀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1420년대 후반 프랑스는 잔다르크에 의해 만들어진 군사적 이득을 바탕으로 반격에 나섰다.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프랑스에서 (칼레를 제외한) 마지막으로 남은 소유지인 가스코뉴를 상실했다. 2년 후 잉글랜드에서는 장미 전쟁이라고 알려진 긴 내전이 발발했다. 내전은 헨리 튜더가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물리친 후에야 끝이 났다. 그러고 나서 그는 헨리 7세로 즉위했다.

 

칼마르 연합

1397년 칼마르에서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의 왕 에리크에게 왕관을 씌우는 마르그레테 1세 여왕을 묘사한 포르투갈 신트라 페나 궁전의 스테인드글라스 창

 

스칸디나비아 귀족들은 북독일의 도시들과 상인들의 연합인 한자동맹이 발트해의 북쪽 해안까지 영향력을 확대할까 하여 두려워했다.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세(1387-1412)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왕 호콘 6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자신의 종손인 포메라니아의 에리크를 후계자로 선언했고, 그는 1389년 노르웨이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에리크는 그 후 1396년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이 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1397년 스웨덴의 칼마르에서 거행되었다. 그리하여 노르웨이는 식민지인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페로 제도, 오크니 및 셰틀랜드와 스웨덴(당시 오늘날 핀란드의 대부분을 포함)과 함께 덴마크와 통합되었다. 거의 모든 북유럽 땅으로 이루어진 칼마르 연합은 구스타프 바사가 스웨덴의 왕이 된 1523년까지 지속되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1814년까지 연합을 유지했다.

 


발칸 제국

스테판 두샨은 1331년부터 세르비아의 왕이었고 1346년부터 1355년 사망할 때까지 세르비아 제국의 차르(황제)였다. 두샨은 남동 유럽의 많은 부분을 정복하여 당대의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서진하는 오스만에 대한 저항의 끝을 나타냈다.

 

1261년, 비잔틴 제국은 십자군(1204년에 도시를 점령했던)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다. 그러나 이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은 여전히 적의 손에 남아있었다. 발칸반도(유럽 남동부)는 이 지역의 경쟁국들인 스테판 두샨(1331-55) 치하의 세르비아 제국, 불가리아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1355년 세르비아 차르 스테판 두샨의 사망 당시 비잔틴, 오스만, 세르비아 제국과 그 주변 국가 지도

한편, 13세기에 아나톨리아(오늘날 튀르키예의 아시아 지역)에 자리 잡은 강력한 튀르크 부족인 오스만은 14세기에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오스만은 발칸반도를 침공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고, 1388년 불가리아를 처음으로 제압했으며,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그들의 군대를 패배시킨 후 세르비아를 점령했다. 서유럽 사람들은 이 새로운 튀르크의 위협에 맞서 십자군을 시작했지만, 그 군대는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패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453년 오스만에 점령되었고, 마침내 비잔틴 제국은 멸망했다.

 

15세기 중반까지 헝가리 왕국은 이슬람 오스만 제국이 중앙유럽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는 기독교 세계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후녀디 야노시의 지도와 프란치스코 수도사 카페스트라노의 산 조반니에게 영감을 받은 헝가리 군인들은 1456년 베오그라드 공방전(위 그림에서 묘사)에서 오스만 군대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웠다. 후녀디의 아들 마차시 1세 왕(1458-90) 아래에서 헝가리는 쉴레이만 대제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이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마침내 승리할 때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이 패배는 헝가리 왕국의 붕괴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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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바

14세기 초 제노바의 항구와 함대를 묘사한 그림(1909년 제작)

해양 공화국인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의 치열한 상업적 경쟁은 중세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1256년부터 1381년 사이에 벌어진 여러 전쟁에서 다퉜다.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새로운 라틴 제국을 세운 후, 베네치아는 동부 지중해 무역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그러나 제노바는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 비잔틴 제국의 잔존 세력인 니케아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크림 반도의 페오도시야에 있는 세례 요한 교회와 제노바 요새. 13세기 후반, 제노바 공화국의 상인들이 지배적인 몽골의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정착지를 구입했다. 제노바인들은 흑해 무역을 지배했던 카파라고 불리는 번창한 교역소를 그곳에 세웠다.

 

제노바는 동맹으로부터 많은 보상을 받았다. 복구된 비잔틴 제국은 공화국에 에게 해의 많은 섬과 정착지에 항구를 허락하여 제노바의 부와 권력을 크게 증가시켰다. 제노바는 흑해의 크림 반도 일부를 정복하고 1260년대에 그곳에 카파(오늘날 페오도시야)라는 식민지를 설립했다. 제노바는 1284년 멜로리아 해전에서 또 다른 경쟁자인 도시국가 피사를 격파하고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의 일부를 장악했다. 제노바 상인들은 또한 시칠리아 섬과 무슬림 북아프리카에 교역소를 세웠다.


13세기 후반까지 경쟁국 베네치아에 대한 패권을 얻은 제노바는 14세기에 쇠퇴했다. 키오지아 전쟁(1379-81)에서 베네치아에 패하고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지면서 제노바는 동부 지중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다. 15세기 초까지 공화국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처음에는 프랑스, 그 이후에는 밀라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제노바에 새로 설립된 은행들은 이후 세기에 도시를 번영으로 이끌었다.

 


베네치아

1353년 베네치아 함대(그 동맹과 함께)와 제노바 함대 간의 해전

14세기와 15세기 초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탈리아 본토의 영토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스트리아에서 달마티아 해안(아드리아해의 동쪽 해안)을 따라 알바니아까지 확장되었다. 3,300척의 배로 이루어진 강력한 해군을 보유한 베네치아는 서쪽의 밀라노 공국과 제노바 공화국, 동쪽의 헝가리 왕국 등 경쟁국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공화국의 권력에 대한 새로운 위협인 오스만 제국이 출현했다. 15세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베네치아와 오스만 제국은 에게해, 이오니아해, 아드리아해의 지배권을 놓고 일련의 전쟁을 벌였다.

1496년 베네치아 화가 젠틸레 벨리니가 그린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의 행렬. 15세기 말까지 베네치아는 아드리아해 연안, 키프로스와 크레타 섬, 이오니아해와 에게해의 많은 작은 섬, 이탈리아 본토의 영토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점령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부상과 주변 유럽 강대국들은 부유하고 강력한 베네치아의 패권을 위협했다.

 

 

분열과 저항

그레고리우스 11세는 1370년부터 1378년까지 교황이었다. 그는 7번째이자 마지막 아비뇽 교황이었다. 1377년에 그는 교황청을 로마로 돌려보내고, 프랑스 아비뇽에서 교황들의 약 70년간의 거주를 끝냈다. 그의 사망 후, 추기경단은 이탈리아 출신의 우르바누스 6세를 선택하라는 설득을 받았지만, 그 대신 프랑스 출신의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대립교황들의 존재는 유럽의 왕국들이 그들 중 누구에게 충성을 맹세할지 결정하도록 강요하면서 서방의 분열을 촉발시켰다.

 

카톨릭 교회의 지도부 내 분쟁은 1309-76년의 아비뇽 교황청으로 이어졌고, 그 후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지속된 대(또는 서방) 분열로 이어졌다. 이는 교회 내부 분열로, 로마에 하나, 아비뇽에 하나씩 두 명의 교황이 있었고, 각각 진정한 교황이라고 주장했다(심지어 1409년에는 피사 출신의 세 번째 주장자가 합류하기도 했다). 콘스탄츠 공의회가 1417년 마르티누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면서 마침내 분열이 종식되었다.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있는 교황청의 현재 모습. 이곳은 교황들이 로마에 위치한 평소의 거주지가 아니라 1309년부터 1376년까지 살았던 곳이다. 아비뇽 교황청("아비뇽 유수"로도 알려져 있음)은 1305년 프랑스의 필리프 4세가 추기경들에게 프랑스 출신의 클레멘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강요한 후에 생겨났다. 클레멘스는 로마로 이주하기를 거부하고, 1309년 자신의 궁정을 이후 67년 동안 머물게 되는 아비뇽으로 옮겼다.

 

존 위클리프의 초상화 (c.1320-84)

카톨릭교회 역시 저항 운동으로 흔들렸다. 그중 하나가 잉글랜드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1384년 사망)가 이끈 롤라드파였다. 그는 1415년 성직자(교회 지도자)의 특권적 지위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이단자(권위자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로 매도당했다. 위클리프는 평신도가 읽을 수 있도록 성경을 라틴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클리프의 가르침은 후스파라고 알려진 보헤미아의 또 다른 저항 집단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비난받고 1415년 화형에 처해진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랐다.

 


카톨릭 군주

1469년 결혼하여 공동 통치로 스페인을 통일한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재위 1474-1504)와 아라곤의 페란도 2세(재위 1479-1516). 카톨릭 군주라는 칭호는 1494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카톨릭 신앙을 수호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들에게 부여한 것이다.

 

1469년 아라곤의 페란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스페인은 단일 군주제 하에서 통합되었다(비록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훨씬 나중까지 별개의 왕국이었지만). 카톨릭 군주로 알려진 그들은 1478년 스페인 종교재판소을 설립함으로써 그들의 권위에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이는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과 무슬림이 이전 신앙으로 확실히 돌아가지 않도록 했다. 카톨릭 군주가 1492년 그라나다 전쟁에서 남쪽의 무슬림 세력에 승리한 이후, 스페인의 무슬림 통치는 마침내 끝났다.

 

 

유대인의 도피

유대인(좌)과 기독교인(우) 학자가 논쟁하는 13세기 삽화

중세 성기에 유대인들은 유럽 전역으로 이주했고, 11세기와 12세기에 독일과 잉글랜드에 공동체를 세웠다. 그러나 무슬림 통치하의 스페인에 오랫동안 정착했던 스페인계 유대인들은 레콩키스타 동안 점점 더 많은 스페인 땅이 기독교 군주의 통치를 받게 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점점 더 많이 받게 되었다. 기독교 유럽의 다른 지역 유대인들도 박해를 받게 되었다.

13세기 후반 성지에서 일어난 십자군의 최종 패배는 유대인들의 대규모 추방을 촉발했다. 1290년 잉글랜드에서, 1394년 프랑스에서, 1421년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된 많은 유대인이 헝가리나 폴란드로 이주했다. 1492년 알람브라 칙령에 따라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기독교로 강제 개종하거나 추방당해야 했다. 대부분은 포르투갈(기독교로 강제 개종하거나 1496-97년에 추방당한), 오스만 제국, 북아프리카, 나폴리 왕국으로 도피했다.

 


신항로 개척

포르투갈의 선원이자 탐험가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c.1450-1500)의 초상화. 1488년 유럽인 최초로 아프리카 남단을 돌은 디아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첫 바닷길을 개척했다.

 

포르투갈은 15세기에 해양 강국이 되었고, 유럽을 넘어 무역 연결을 구축하는 데 집중했다. 엔히크 항해왕자(1460년 사망)는 대서양으로 탐험대를 보냈고, 그의 생애 동안 카나리아 제도, 아조레스 제도, 카보베르데 제도를 발견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탐험은 계속되었고 더 모험적이 되었다. 1488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유럽인 최초로 희망봉을 돌았고,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에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항해했다. 한편, 아라곤의 페란도와 카스티야의 이사벨은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으로 이어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 항해를 후원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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