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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로마 이야기/로마속주

사르디니아(사르데냐) 에트 코르시카

by 금곡동로사 2021.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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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포에니 전쟁 직후 로마 공화국의 영역(녹색)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 속주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섬을 포함한 고대 로마의 속주였다.

 

 

역사

 

로마는 1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카르타고와 초기 조약을 체결했지만 이 협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용병 전쟁 동안 무력으로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합병했다. 이것은 서부 지중해에서 로마 지배의 시작을 의미했다. 로마인들은 694년 동안 이 지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사르디니아인과 코르시카인은 종종 로마 통치자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BC 235년에 반란이 일어났지만 만리우스 토콰투스에게 과격하게 진압되었다. 다른 반란은 BC 233년에 일어났고 집정관 스푸리우스 카르빌리우스 막시무스 루가에게 억압되었다. BC 232년에 집정관 만리우스 폼필리우스에게 패배했다. BC 231년 광범위한 긴장에 비추어 각 섬을 처리하기 위해 집정관의 군대가 파견되었다. 코르시카에는 파피리우스 마소가, 사르디니아에는 마르쿠스 폼포니우스 마토가 진군했다. 그러나 두 집정관 모두 캠페인에 실패했기 때문에 승리를 보고하지 못했다. BC 216년 2차 포에니 전쟁 중 벨룸 사르둠(Bellum Sardum)으로 알려진 대규모 반란이 발발했다. 둑스 사르도룸(Dux Sardorum)이라는 칭호로 원주민 군대와 카르타고 동맹군을 지휘하고 15,000명의 보병과 1,500의 기병으로 사르디니아 군대를 도운 코르누스 시 출신의 지주 함프시코라가 이끄는 대규모 사르디니아 반란. 로마 군대와 사르디니아 포에니 군대는 데키모만누 전투에서 싸웠다. 그러나 로마인이 이기고 반란은 함프시코라의 자살과 만리우스 토콰투스가 지휘하는 로마 군대에 의한 코르누스 도시의 약탈로 끝났다.

 

반란을 일으킨 함프시코라의 군과 카르타고 동맹군의 진로. 빨간점선은 로마군의 진로.

BC 2세기는 속주의 혼란한 시기였다. BC 181년 코르시카 남부와 사르디니아 북동부 지역에 거주하는 코르시 족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2,000명의 반군을 살해하고 그들 중 다수를 노예로 만든 마르쿠스 피나리우스 포스카에 의해 멈췄다. BC 177/176년 발라리와 이오라이로 알려진 사르디니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원로원은 두 군단을 맡은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를 보냈다. 각각은 5,200명의 일반 병사와 300의 기병으로 구성되었고, 또 다른 1,200명의 보병과 600의 기병이 동맹과 라틴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반란으로 약 27,000명의 사르디니아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177년 12,000명, 176년 15,000명). 패배 후 섬 주민들의 세금 부담은 두 배로 늘어났고 그라쿠스는 업적을 이뤘다.

 

코르시카 섬의 코르시 족 / 사르디니아의 고대 부족들, 노란색 : 이오라이 족, 빨강색 : 발라리 족, 남청색 : 코르시 족
사르데냐에서 본 코르시카 해안, 보니파시오 해협

BC 174년에 사르디니아에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 티투스 만리우스 토콰투스가 승리를 거두었고 약 80,000명의 사르디니아인이 전장에서 사망했다. 이듬해 사르디니아에서 또 다른 봉기가 일어났고 섬의 법무관 아틸리우스 세르바투스가 패배하여 다른 섬으로 피난을 갔다. 아틸리우스는 로마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가이우스 키케리우스가 지원군을 이끌고 왔다. 성공할 경우 성전을 짓겠다고 유노 모네타에게 맹세한 키케리우스는 승리를 보고하여 7,000명의 코르시인을 죽이고 1,700명을 노예로 삼았다. BC 163년 마르쿠스 유벤티우스 탈나는 원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 없이 또 다른 반란을 진압했다. 사르디니아에서 수행된 임무를 듣고 로마 원로원은 민중들의 기도를 발표했고 탈나 자신이 성공에 대한 로마의 보편적 찬사를 알고 있었기에 죽을 만큼 강력한 감정을 경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뒤이어 스키피오 나시카가 섬을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되며 반란은 바로 재개된 것으로 보인다.

 

BC 126년과 122년에 다른 두 번의 반란이 일어났고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진압되었다. 마지막 대규모 봉기는 BC 111년에 일어났고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집정관이 해안과 고지 사르디니아인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때부터 해안 지역과 저지대에 살던 사르디니아인은 반란을 멈췄지만 고지대 사람은 때때로 반란을 일으켜 키비타테스 바르바리아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공화국 말기에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는 참전 용사를 코르시카에 정착시키고 섬의 곡물을 이용하여 그들의 공로를 보상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대리인을 보내 폼페이우스로부터 섬을 점령하고 그 과정에서 곡물 공급을 통제하도록 했다. 밀이 그의 군대에 공급되었고 BC 49년 내전에서 승리를 지원했다. 2차 삼두정치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섬을 그의 몫의 일부로 받고 곡물 공급을 이용하여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맞선 군대에 공급했다. BC 40년에서 38년 사이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그의 지휘관 메나스는 대단한 해적 함대로 코르시카를 점령하고 사르디니아, 시킬리아, 심지어는 이탈리아 반도를 공포에 떨게 했다. 세 삼두정치인과 함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망한 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4대 경쟁자 중 하나였다. 그의 함대는 주로 수천 명의 노예로 구성되었으며 코르시카에 많은 요새를 보유했다. 그가 로마 곡물 공급을 매우 심각하게 위협하였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화해해야 했다. 미세눔 조약(BC 39)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본토 봉쇄를 끝내고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간의 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대가로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 시킬리아와 아카이아를 배정받았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에게 할당된 지역에 만족하지 않았고 BC 38년에 갈등이 다시 발생했다. 폼페이우스는 다시 이탈리아 본토를 봉쇄하여 기근으로 이어졌다. 그해 말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강력한 함대를 모아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다시 이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BC 27년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개편에서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는 원로원 속주가 되었다. 이 속주는 법무관 계급을 가진 총독이 관리했다. AD 6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르디니아 섬을 인수하여 황제 속주와 같이 군단이 주둔하였으며 코르시카는 별도의 원로원 속주로 설립되었다. AD 67년 사르디니아가 원로원 속주로 돌아온 후에도 두 섬은 별도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AD 69년 이후에는 사르디니아가 검찰관에 의해 관리된 것으로 보인다.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 속주는 292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시킬리아와 몰타와 함께 이탈리아 관구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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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주에 대한 로마의 견해

 

지배 전반에 걸쳐 로마는 속주와 객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두 섬의 해안 지역은 로마인에 의해 정착되었고 라틴어와 문화를 채택했다. 그러나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의 내부 지역은 로마인들에게 저항했다. 다양한 반란과 반란이 일어났다. 하지만 내부 지역은 울창한 숲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들을 피하고 "야만인의 땅"으로 그대로 두었다.

 

전반적으로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는 로마 이집트와 같은 로마 제국의 동부 수익에 비해 사소한 수익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말라리아의 오랜 존재로 인해 섬과 그 사람들을 모두 후진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2017년 연구에 따르면 말라리아는 이미 2,000년 전에 사르디니아의 풍토병인 것으로 나타났다.

 

코르시카에서 로마인들은 전리품을 많이 얻지 못했고 그들은 로마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로마의 것을 배우지 않았다. 스트라본은 코르시카인을 약탈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야수인으로 묘사했다.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악명 높은 사르디니아 노예도 마찬가지였고 기회가 있으면 주인을 죽였다.

 

한때 사르디니아 산 부족의 심각한 반란을 로마가 진압한 후 노예 시장에 사르디니아 노예가 넘쳐났는데 이 일로 인해 리비우스가 말한 것처럼 "저렴한 사르디니아인"은 값싸고 쓸모없는 것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라틴어 표현이 되었다. 키케로는 다른 사람들보다 병에 걸리지 않는 사르디니아인을 "그의 동료들보다 더 나쁜 사람", 그리고 게릴라로 로마와 계속 싸우는 고지의 반군에게 "거친 양모 망토를 입은 도둑들"이라고 표현했다. 로마 연설가는 사르디니아인을 북아프리카의 고대 베르베르인에 비유했다. "북아프리카의 혈통과 혼합된 포에니인들로부터 사르디니아인이 유래했다.", "북아프리카 자체는 사르디니아의 조상이다.". 이전의 카르타고 장수들로부터 물려받은 교활하고 끔찍한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Afer(북아프리카)와 Sardus(사르디니아인)라는 이름도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바로는 키케로가 설정한 전통에 따라 사르디니아인을 북아프리카(Gaetuli)의 베르베르 부족과 비교하는 데 사용했으며 "일부 야만적인 국가에서는 옷에 [염소] 가죽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북아프리카(Gaetuli)와 사르디니아에서". 키케로는 어떤 사르디아인의 도시도 로마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란색 : 카르타고 점령 지역, 빨강색 점 : 주요 정착지 / 노란색 : 로마 통제 지역, 파란색 : 고지 바르바리아, 빨강색 점 : 주요 정착지

많은 부정적인 고정관념은 로마에 대한 사르디니아인들의 깊숙한 적대감과 수세기 동안 지속된 빈번한 반란에 의해 촉진되었다. 심지어 BC 1세기에도 섬의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로마의 질서를 따랐지만 사르디니아 고지대는 종종 혼란에 빠졌다. 스트라본은 산에 거주하는 인구가 그의 시대에도 여전히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으며 결국 약탈을 통해 살기 위해 다른 사르디니아 공동체를 약탈하고 배를 타고 에트루리아 해안을 습격했다고 언급했다. 특히 그들은 종종 피사 시에서 해적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일부 로마인들은 사르디니아인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는 사르디니아인에게 찬성하는 삼촌의 연설인 Pro Sardis를 외웠고 그는 사르디니아인 가수 티겔리우스의 절친한 친구였다. 카랄레스 시는 사실 카이사르와 민중파의 지지자였고 탑수스 전투에서 몇몇 군대로 그를 도왔다.

 

 

로마와의 관계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는 거의 도시화되지 않은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대부분 망명 장소로 사용되었다. 네로의 음모 혐의로 기소된 변호사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속주로 보내졌고 대 아그리피나의 살인자 아니켄투스는 특별히 사르디니아로 보내졌다. 많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도 티베리우스 아래에서 섬으로 보내졌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사르디니아로 추방되어 풍부한 광산이나 채석장에서 일해야 했다.

 

문화적, 정치적 동화에 대한 토착민의 저항은 이전 카르타고 정착촌의 비문 증거에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은 제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르디니아는 로마 공화국 시대에 로마 곡물 공급의 대부분을 제공했으며 코르시카는 제국에 밀랍을 공급했다. 또한 모든 서로마 속주 중에서 사르디니아는 로마 함대에 가장 많은 수의 선원을 제공했다. 사르디니아는 또한 로마 세계의 주요 금속 공급 산지 중 하나였다. 풍부한 은, 납, 구리 광산 덕분에 사르디니아는 브리타니아와 히스파니아 다음으로 생산되는 금속의 양에서 로마의 모든 속주 중에서 3위를 차지했다. 로마 통치 기간 동안 채광 생산량은 약 육십만 톤의 납과 천 톤의 은으로 추산된다.

 

제국 시대에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 계급의 지위를 얻은 것으로 알려진 사르디니아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사르디니아인 마르쿠스 에레니우스 세베루스는 유대의 레가투스가 되었고 서기 2세기 중반에 법무관의 지위를 얻었다.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그의 서신에서 암펠리우스와 같은 사르디니아 출신의 일부 원로원 의원을 언급했다. 암펠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에 반대하는 마그누스 막시무스 편을 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주요 도시

 

카랄레스는 속주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 30,000명에 달했다. 도시 중심지로서의 존재는 적어도 BC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로루스(Florus)는 그것을 도시 중 도시인 우르브스 우르비움이라고 불렀다. 사르디니아와 카랄레스는 BC 238년 로마가 카르타고를 패배시킨 1차 포에니 전쟁 직후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중에 함프시코라와 사르디니아 카르타고 군대에 대항하여 작전을 수행한 때부터 법무관(티투스 만리우스 토콰투스)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로마 시대에 남은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10,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과 티겔리우스의 별장으로 알려진 로마 별장의 유적이다.

 

술키(Sulci)는 또한 사르디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그 시초는 BC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BC 6세기에 카르타고인에 의해 합병되었으며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있는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BC 5세기까지 이 도시는 이미 약 10,000명의 인구에 도달했다. BC 258년 카르타고 군대와 도시 근처의 로마 군대 사이에 해전이 발생했다. 한니발 기스코 사령관이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술키로 피난했지만 자신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혔다. 2차 포 에니 전쟁으로 이 도시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술키는 주변 지역의 풍부한 납 광산에 근접하여 부자가 되어 시민들이 내전 기간 동안 폼페이우스의 편에 선 것에 대해 카이사르에게 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벌금을 지불할 수 있었다.

 

현재 풀라 시 근처에 위치한 노라는 고대 작가들에 의해 사르디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도시에서 발견된 고대 페니키아 기록인 노라 스톤은 BC 9세기에 이미 항구로서 이 유적지의 중요성을 증언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아름다운 로마 모자이크를 볼 수 있으며 극장은 섬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 유적 중 하나이다.

 

섬의 서쪽 시니스 반도에 위치한 타로스 시는 포에니 세계의 주요 보석 생산지 중 하나였다. 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 통치에 반란을 일으킨 함프시코라의 반란을 지지한 도시 중 하나였다.

 

사르디니아의 북동쪽에 위치한 올비아는 풍부한 항구 도시였다. 그 이름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지만 BC 5세기에 이미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이는 거대한 성벽은 BC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 무역로에서의 전략적 위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BC 238년에 섬을 점령했을 때 이 도시는 로마 해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가 되었다. 섬의 다른 주요 로마 도시와 마찬가지로 올비아에는 공중목욕탕과 포룸이 제공되었다. 다른 주목할만한 도시는 오토카, 네아폴리스, 비티아 및 마지막으로 함프시코라가 태어난 도시인 코르누스였다. 보사는 BC 8세기에 기록된 비문이 증언하는 것처럼 고대부터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는 몇 개의 콜로니아를 세웠는데, 두 개의 주요 콜로니아는 투리스 리비소니스와 포룸 트라이아니이다. 섬의 북서쪽에 위치한 투리스 리비소니스는 누라의 풍요로운 평원과 항구로서의 이상적인 위치 덕분에 번영했다. 그 장엄한 목욕탕과 모자이크는 오늘날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포룸 트라이아니는 캄피다노 지역의 비옥한 평야에 위치하고 있으며 치료 효과가 있다고 여겨지는 온천으로 유명해졌다.

 

코르시카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BC 7세기에 페니키아 그리스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나중에 알라리아 전투 후 에트루리아인에 의해 정복된 알레리아였다. 아이아키움은 페니키아인의 항구로도 시작되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BC 93년 코르시카 북부에 마리아나를 세웠다.

 

노라의 모자이크 / 오르페우스를 묘사한 카랄레스의 모자이크
안타스 신전 / 투리스 리비소니스의 로마 다리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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