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1301-1400년)
1302년 5월 18일 브뤼헤 마탱스 : 브뤼헤의 플랑드르 민병대가 도시의 프랑스 점령군을 대부분 죽였다

7월 11일 황금 박차 전투 : 플랑드르 반란군이 프랑스 군대를 완파했다
1303년 5월 20일 파리 조약 : 대체로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며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1304년 8월 18일 몽스앙페벨 전투 : 필리프 4세의 프랑스 군대와 빌헬름 폰 율리히의 플랑드르 군대가 전투에서 비슷한 사상자를 냈지만 빌헬름 폰 율리히가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승리한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을 받는 대가로 플랑드르의 독립을 인정했다
1308년 1월 25일 불로뉴쉬르메르에서 필리프 4세의 딸 이자벨과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2세가 결혼했다

1314년 3월 필리프 4세가 경제적 이권을 위해 템플 기사단을 탄압하고 마지막 그랜드마스터 자크 드 몰레를 화형 시켰다
11월 29일 필리프 4세가 사망했다. 그의 장남인 완고왕 루이 10세가 왕위에 올랐다
1315년 7월 완고왕 루이 10세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 영토에서 농노제를 사실상 폐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농노들이 자유를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1316년 6월 5일 완고왕 루이 10세가 폐렴/독살로 사망했다. 왕비 헝가리의 클레망스가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기에 동생 필리프 5세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11월 15일 루이 10세의 유복자 장 1세가 태어났지만, 5일 만에 사망하여 장신왕 필리프 5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1322년 1월 3일 장신왕 필리프 5세가 사망했다.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동생 미남왕 샤를 4세가 뒤를 이었다

1324년 7월 1일 생사르도스 전쟁 : 프랑스가 아키텐을 침공하여 잉글랜드 군대를 격파했다. 패전과 휴전 협상에서 벌어진 일들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의 퇴위로 이어졌다
1328년 2월 1일 후계자 없이 샤를 4세가 사망하여 카페 왕조가 단절되었다. 필리프 3세의 후손인 행운왕 필리프 6세가 왕위에 올라 발루아 왕조가 시작되었다

1337년 5월 24일 백년전쟁 : 파리에서 소집된 대심의회에서 가스코뉴를 행운왕 필리프 6세의 손에 되돌려야 한다는 데 합의하자, 에드워드 3세(필리프 4세의 외손자)가 무력으로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제기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1346년 흑사병이 유럽에서 발생했다

8월 26일 크레시 전투 : 프랑스 북부를 통과하던 에드워드 3세의 잉글랜드군을 행운왕 필리프 6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공격했지만, 잉글랜드군이 승리하고 프랑스군은 기사 1,542-4,000명이 전사하며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1347년 8월 3일 잉글랜드군이 전략적 요충지인 칼레(Calais) 항을 점령했다. 이곳은 1558년까지 잉글랜드가 소유하게 된다
1350년 8월 22일 행운왕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아들 선량왕 장 2세가 왕위에 올랐다
1353년 흑사병으로 프랑스에서 600만-1200만 명(인구의 30-60%)이 사망하고, 잉글랜드에서 200만-300만 명이 사망했다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 : 선량왕 장 2세의 프랑스군이 흑태자 에드워드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패배하고, 장 2세는 포로가 되었다
1357년 삼부회는 에티엔 마르셀의 대칙령을 통과시켜 특히 재정 및 통화 문제에서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고 시도했다

1360년 5월 8일 브레티니 조약 : 에드워드 3세에 대한 칭호가 아키텐 공작에서 아키텐의 주인으로 대체되었고,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으며, 선량왕 장 2세는 몸값으로 300만 에퀴 금화를 지불해야 했다
1364년 4월 8일 선량왕 장 2세가 사망하고 아들 현명왕 샤를 5세가 왕위에 올랐다

1367년 4월 3일 나헤라(Nájera) 전투 : 페드로 1세를 지원한 흑태자 에드워드가 카스티야 내전에서 엔리케 2세를 지원한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1372년 6월 22-23일 라로셸 해전 :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카스티야의 함대가 잉글랜드 함대를 괴멸시켰다

1374-1380년 프랑스-카스티야 연합함대가 잉글랜드 항구를 약탈하고 불태웠다

1380년 9월 16일 현명왕 샤를 5세가 사망하고 아들 친애왕 샤를 6세가 왕위에 올랐다
1389년 21세가 된 친애왕 샤를 6세가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15세기 (1401-1500년)
1407년 11월 23일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 :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가 부르고뉴 공작의 측근에게 살해당하면서 왕실의 두 방계 가문인 오를레앙가(아르마냑 파벌)와 부르고뉴가(부르고뉴 파벌)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1412년경 보주 지방 동레미 마을에서 잔 다르크(오를레앙의 처녀)가 태어났다
1415년 8월 13일 헨리 5세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 북부에 상륙했다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 : 숲 속에서 공격한 잉글랜드 장궁병의 화살에 말들이 부상을 입자 통제가 되지 않았고, 좁은 전장을 질주하며 보병들을 짓밟고 이탈했다. 얼마 전 폭우로 진흙탕이 된 전장은 중무장한 프랑스 기병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잉글랜드군에게 도달했을 때 이미 체력을 모두 소진해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다. 총사령관 샤를 달브레를 비롯한 수많은 영주와 기사들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1418년 5월 30일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 1세의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자 도팽(왕위 계승자에게 붙는 칭호), 즉 미래의 샤를 7세는 도피했다
1419년 9월 10일 용맹공 장 1세가 도팽의 동료들에게 암살당했다. 뒤를 이은 아들 선량공 필리프 3세가 프랑스 왕실에 맞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1420년 5월 21일 부르고뉴는 샤를 6세에게 트루아 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으며, 이 조약에 따라 왕위 계승권은 헨리 5세에게 넘어갔다
1422년 8월 31일 헨리 5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헨리 6세가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10월 21일 샤를 6세가 사망하자 아들 찰스 7세가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고, 이 칭호는 잉글랜드 왕 헨리 6세에게 논란이 되었다

1429년 3월 도팽을 알현하기 위해 시농으로의 여정 (청록색)
1429년 5월 오를레앙 구원군으로 출정 (보라색)
1429년 7월 대관식을 위해 랭스로 진격 (진분홍색)
1430년 5월 23일 부르고뉴군의 포로가 됨 (버건디색)
1431년 5월 30일 루앙으로 이송되어 화형 당함 (파란색)
1429년 7월 9일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트루아를 탈환했다
7월 17일 역대 왕들이 대관식을 치렀던 랭스를 탈환하여 승리왕 샤를 7세가 대관식을 거행했다
1430년 5월 23일 콩피에뉴 외곽 전투 중 잔 다르크가 부르고뉴군에게 사로잡혔다

1431년 5월 30일 잔 다르크가 루앙에서 화형을 당했다. 그녀의 유해는 센 강에 던져졌다
1435년 9월 20/21일 아라스 조약 :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승리왕 샤를 7세와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 3세 간의 오랜 불화를 해소했다. 필리프는 샤를을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왕실 충성 서약에서 면제되었고, 샤를은 필리프의 부친 장을 살해한 자들을 처벌하기로 합의했다
1436년 4월 17일 프랑스가 파리를 탈환했다
1438년 7월 7일 승리왕 샤를 7세가 부르주 국사조칙(國事詔勅)을 발표하여 교회 공회의를 10년마다 개최하도록 하고 프랑스 카톨릭 교회가 성직자를 임명할 권리를 확인했다
1440년 2월-7월 프라하리 : 승리왕 샤를 7세의 아들 루이가 귀족들과 함께 푸아투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왕에게 용서를 구했다

1441년 6월 6일-9월 19일 퐁투아즈 공성전 : 일드 프랑스에 있는 마지막 잉글랜드 요새를 함락시켜 파리에 대한 위협을 제거했다
1449년 겐트(헨트) 반란 : 선량공 필리프 3세의 소금세 도입으로 인해 겐트에서 봉기가 일어나 전쟁이 벌어졌다
1450년 4월 15일 포르미니 전투 : 대포로 무장한 프랑스군이 노르망디에 남아있는 마지막 잉글랜드 야전군을 격파했다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 : 백년전쟁의 마지막 전투로 여겨지는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승리하며 잉글랜드는 가스코뉴를 상실했다. 마지막 남은 프랑스 내 영토는 칼레 지역 한 곳뿐이었다
7월 23일 가베레 전투 : 선량공 필리프 3세가 이끄는 부르고뉴군이 겐트 반란군에게 승리를 거두어 겐트 전쟁이 종식되었다
10월 19일 보르도가 프랑스에 항복하고 전쟁이 종식되었다
1461년 7월 22일 승리왕 샤를 7세가 사망하고 적대적인 아들 신중왕 루이 11세가 왕위에 올랐다
1465년 3월-10월 공익연맹 전쟁 : 신중왕 루이 11세의 중앙집권화에 대항하여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의 아들 샤를이 봉건 귀족 동맹을 조직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전투에서 승리한 귀족군이 파리를 포위한 뒤 루이 11세와 조약을 맺어 왕실의 양보를 얻어냈다

1474년 7월 25일 런던 조약 :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가 협정을 체결하여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침공할 시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에드워드 4세를 프랑스 왕으로 인정하기로 합의했다
1475년 6월 에드워드 4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도착했지만 군사적 지원이 없었고 부르고뉴의 도시에 진입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또 다른 동맹인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의 지원도 거의 받지 못했다
8월 29일 피퀴니 조약 :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4세를 회유한 신중왕 루이 11세가 조약을 체결하여 비공식적으로 종식되었던 백년전쟁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1477년 1월 5일 낭시 전투 :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로렌 공작 르네 2세와 스위스 서약동맹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후계자가 없는 부르고뉴 공국은 분열되었다. 프랑스 내 공국의 영토는 거의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1483년 8월 30일 신중왕 루이 11세가 사망하고 어린 아들 샤를 8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1세의 장녀 안느가 섭정을 맡았다

1485-1488년 광기 전쟁 : 잉글랜드, 스페인,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봉건 영주 연합과 프랑스 왕실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다. 생토뱅뒤코르미에 전투 이후 브르타뉴 공작령이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1492년 친절왕 샤를 8세가 직접 왕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1494-1495년 친절왕 샤를 8세가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지원 요청으로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지만, 밀라노가 배신했고 결국 베네치아 동맹(최초의 신성 동맹)에게 격퇴당했다
1498년 4월 7일 친절왕 샤를 8세가 사망했다.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매부이자 샤를 5세의 증손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2세가 뒤를 이었다

1499년 여름 사보이아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동맹을 맺은 루이 12세(밀라노 공녀 발렌티나 비스콘티의 손자)가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1499-1504년까지 대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켰다
10월 6일 프랑스군이 밀라노에 입성했다
1500년 1월 12일 체사레 보르자가 포를리를 공격하여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사로잡았다
4월 8일 노바라 전투 :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다
11월 11일 그라나다 조약 : 아라곤 왕 페란도 2세와 루이 12세가 나폴리 왕국을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16세기 (1501-1600년)

1501년 7월 25일 프랑스-아라곤 연합군이 나폴리를 점령하자 나폴리 왕 페데리코는 루이 12세에게 왕위를 넘겼다
1504년 9월 22일 제1차 블루아 조약 :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딸 클로드와 로마 왕(신성 로마 황제의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 붙는 칭호)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 카를의 결혼 지참금에 밀라노와 부르고뉴가 포함되는 것에 동의했다. 그 대가로 루이 12세는 밀라노 공작으로 인정받았지만, 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505년 10월 12일 제2차 블루아 조약 : 1502년 하반기부터 프랑스-아라곤 동맹은 깨졌고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게 거듭 패전하며 루이 12세는 나폴리에서의 야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2세가 나폴리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왕국을 아라곤 왕 페란도 2세에게 넘겼다
1506-1508년 제노바의 민중 반란으로 프랑스가 이탈리아 북부 원정을 벌이자 위협을 느낀 로마 왕 막시밀리안 1세가 프랑스와 전쟁을 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1508년 2월 4일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신성 로마 황제를 자칭한 막시밀리안 1세는 통행을 거부한 베네치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베네치아는 동맹인 프랑스에 지원 요청을 하여 프랑스군이 파견되었다. 베네치아가 일방적으로 신성 로마 황제와 휴전을 맺자 루이 12세는 배신감에 분노하여 베네치아를 응징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고려했다

1508년 12월 10일 캉브레 동맹 전쟁: 교황청,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 왕 페르난도 5세의 대표가 캉브레 동맹을 결성했다. 이 동맹의 목적은 베네치아를 공격하여 영토를 분할하는 것이었다
1510년 2월 15일 베네치아의 세력이 약해지고 프랑스의 영향력이 커지자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캉브레 동맹에서 탈퇴했다
7월 캉브레 동맹이 와해되기 시작하고, 프랑스와 페라라 공국만이 베네치아와 교황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1511년 10월 4일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의 야심을 억누르기 위해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청, 베네치아, 스페인으로 구성된 신성 동맹을 결성했다
11월 17일 페르난도 5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반프랑스 조약을 체결하여 신성 동맹에 잉글랜드가 합류했다
1512년 4월 6일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베네치아 간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1513년 2월 21일 교황 율리오 2세가 사망하고 레오 10세가 교황이 됨에 따라 반프랑스 신성 동맹이 약화되었다. 베네치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북이탈리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6월 6일 노바라 전투 : 프랑스군이 밀라노-스위스 연합군에게 격퇴된 후 프랑스 동맹군은 연이어 패배했다
1514년 3월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에 1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5월 18일 브르타뉴 공작부인 클로드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인 앙굴렘의 프랑수아와 결혼했다
8월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515년 1월 1일 아들이 없는 루이 12세가 사망하자 그의 사위이자 5촌 조카인 앙굴렘의 프랑수아가 뒤를 이어 프랑수아 1세로 즉위했다

9월 13-14일 마리냐노 전투 : 베네치아 증원군의 도움으로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위스 서약동맹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516년 8월 누아용 조약 :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장래의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12월 6일 브뤼셀 조약 :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프랑스의 밀라노 점령을 인정하고 베네치아와 휴전 협정을 맺어 모든 적대 행위를 종식했다
1521년 11월 28일 브뤼헤 조약 :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잉글랜드가 프랑스와의 전쟁 날짜를 정하기 위해 비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1522년 4월 27일 비코카 전투 : 프랑스-베네치아 동맹군이 신성 로마 제국-스페인-교황청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겪은 후, 프랑스는 롬바르디아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밀라노 공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손에 넘어갔다
5월 29일 잉글랜드 왕 헨리 8세가 프랑스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고, 6월 16일 프랑스에 대한 제국-잉글랜드의 공동 공격을 명시한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
1523년 7월 29일 보름스 조약 : 카를 5세와 헨리 8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 스포르차, 베네치아의 신임 도제 안드레아 그리티가 교황 하드리아노 6세의 주재 하에 협정을 체결했다. 베네치아가 전쟁에서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을 지원하는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탈리아 본토의 베네치아 영토를 인정받았다
1524년 7월 20일 클로드가 사망하고 그녀의 장남인 프랑수아 도팽이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10월 24일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군이 파비아를 포위했다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 :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 휘하의 제국군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혔다

1526년 1월 14일 마드리드 조약 :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 아르투아, 플랑드르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부르고뉴를 카를 5세에게 양도하기기로 했다
5월 10일 왕실 의회는 왕이 포로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요구받아 서명했기 때문에 조약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협정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5월 22일 신성 로마 제국을 이탈리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주도로 프랑스 코냑에서 교황청, 프랑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가 동맹을 맺었다
8월 햄프턴 코트 조약 :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적대 행위를 그만두고 독자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지 않기로 합의했다
1528년 4월-8월 나폴리 공성전 : 코냑 동맹군이 나폴리를 포위했지만 함락에 실패했다
1529년 8월 5일 캉브레 조약 :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조약을 맺어 프랑스의 개입을 끝내고 밀라노 공국과 나폴리 왕국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권을 확인했다
1532년 프랑수아 1세는 브르타뉴를 프랑스 왕국에 통합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1536년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하기 위해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와 오스만 제국 술탄 쉴레이만 1세가 동맹을 체결했다
1536-1538년 6월 18일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밀라노 공국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다. 사보이아 공국과 토리노가 프랑스의 손에 남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밀라노와 이탈리아에 대한 패권을 공고히 했다

1542년 7월 12일-1546년 6월 7일 프랑스-오스만 동맹군이 신성 로마 제국-잉글랜드 연합군과 북이탈리아, 프랑스, 저지대 국가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다. 주요 참전국들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545년 메린돌 학살 : 장 칼뱅과 같은 주요 개신교 신학자들을 추방한 프랑수아 1세는 발도파의 가르침을 따르는 메린돌 마을 주민들의 학살을 승인했다
1547년 3월 31일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앙리 2세가 왕위에 올랐다
1551년 5월 27일 앙리 2세와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파르마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편입하는 방위 동맹을 맺었다
6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율리오 3세가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오타비오 파르네세에 맞서며 전쟁이 발발했다

1552년 1월 15일 샹보르 조약 : 작센 선제후 모리츠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 3인방이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협정을 체결하여 툴, 베르됭, 메츠를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가로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4월 29일 프랑스의 동맹인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에서 몰타기사단을 몰아내고, 신성 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은 교황군이 미란돌라 공성전을 실패한 뒤, 2년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종식되었다
7월-8월 프랑스-오스만 동맹군이 레지오와 칼라브리아를 성공적으로 공격하고 폰차 해전에서 승리했다
8월 2일 파사우 조약 : 제2차 슈말칼덴 전쟁(제후들의 반란)으로 카를 5세가 오스트리아로 피신하고, 앙리 2세가 메츠, 베르됭, 툴을 점령하자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루터교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1553년 1월 2일 신성 로마 제국군이 메츠를 점령하는데 실패했다. 메츠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합병될 때까지 프랑스 보호령으로 남아 있게 된다
6월 20일 테루안느를 점령한 신성 로마 제국군이 메츠에서의 실패에 대한 보복으로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1553-1559년 프랑스-오스만 동맹군이 코르시카 섬 대부분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1557년 8월 10일 생캉탱 전투 :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군은 두 배가 넘는 스페인-잉글랜드 연합군에게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1558년 1월 8일 프랑스가 칼레를 탈환했다
7월 13일 그라블린 전투 : 잉글랜드 해군의 포격 지원을 받은 스페인군의 공격에 지형적으로 불리한 프랑스군은 대패를 당했다
1559년 4월 3일 연이은 대패와 자금 부족에 프랑스 왕 앙리 2세는 카토-캉브레지 평화 조약에 서명하여 모든 이탈리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고, 사보이아 공국을 독립시키고 코르시카를 제노바에 반환했으며,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 1세를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공식 인정했다. 이탈리아 전쟁이 종식되었다

7월 10일 앙리 2세가 사망하고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1560년 12월 5일 프랑수아 2세는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샤를 9세가 뒤를 이었다. 모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맡았다

1562년 3월 1일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바시에서 일으킨 위그노(개신교도)와 시민 학살은 프랑스 종교 전쟁을 촉발했다
1563년 3월 19일 앙부아즈 칙령 :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위그노의 종교적 특권과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켰다. 칙령은 모든 이들에게 대체로 불만족스러웠고, 폭력사태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567년 다시 전쟁이 발발했다
7월 28일 프랑스가 르아브르를 탈환하고 잉글랜드군을 축출했다
1568년 3월 롱쥐모 화약 : 생드니 전투에서 위그노군에게 승리한 후 샤를 9세는 앙부아즈 칙령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한 평화 조약을 공포했다. 하지만, 9월 28일 개신교를 불법화하는 생모르 칙령으로 조약을 뒤집었다
1570년 8월 8일 생제르맹앙레 화약 : 롱쥐모 화약보다 훨씬 더 나아가 위그노에게 구체적인 권리와 책임을 부여했다

1572년 8월 23-24일 성 바르톨로메오(생바르텔레미) 축일의 학살 :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선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 학살에서 파리 전역과 다른 도시까지 확산되어 수많은 위그노와 시민이 살해되었다. 위그노 세력이 약화되어 많은 위그노가 개신교 국가로 이주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카톨릭으로 개종했고, 나머지는 몇몇 도시에 집중되어 다수를 형성했다
1573년 6월 불로뉴 칙령 : 위그노에게 부여된 많은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했다. 조약의 조건에 따라 모든 위그노는 과거 행위에 대한 사면과 신앙의 자유를 부여받았지만, 3개 도시(라로셸, 몽토방, 님)에서만, 자신의 거주지 안에서 사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고위 개신교 귀족은 가족 외에 10명으로 제한된 집회 앞에서만 결혼식과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1574년 5월 30일 샤를 9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앙리 3세가 뒤를 이었다
1576년 5월 6일 보리외 칙령 : 왕의 동생이자 앙주-알랑송 공작인 프랑수아의 지원을 받은 위그노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자 앙리 3세는 파리와 궁정을 제외한 프랑스 전역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는 등 종교의 자유권을 부여했다
12월 블루아의 삼부회에서 보리외 칙령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자 앙리 드 나바르의 지휘 아래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1576년 보리외 칙령으로 부여한 안전한 장소(보라색점), 1577년 푸아티에 칙령이 부여한 안전한 장소(기간: 6년/흰색 테두리 점), 위그노가 상당수 거주하는 지역(녹색)
1577년 9월 위그노의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푸아티에 칙령이 공포되었다
1584년 6월 왕의 동생 프랑수아가 사망하자, 아들이 없던 앙리 3세의 왕위 계승자는 루이 9세의 후손인 위그노 앙리 드 나바르였다. 기즈 공작 앙리는 카톨릭 동맹을 대표해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지원을 받기로 협약을 맺고 앙리 3세를 압박하여 앙리 드 나바르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했다
1588년 12월 23일 기즈 공작 앙리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자 앙리 3세는 근위병에게 명령을 내려 앙리 공작과 그의 형제 추기경을 암살하고 공작의 아들을 투옥했다. 공작이 살해되자 카톨릭 동맹이 왕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앙리 3세는 앙리 드 나바르와 연합하여 맞섰다

1589년 8월 2일 수도사의 칼에 찔린 다음 날 아침, 앙리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카페 왕조 발루아 가문의 통치가 끝났다. 그 뒤를 이어 부르봉 가문의 초대 군주인 앙리 4세(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에 올랐다. 앙리 4세가 즉위하자 교황 식스토 5세는 그를 파문하고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파리를 함께 포위하던 앙리 3세 휘하의 카톨릭 귀족도 그에게서 떠났다
1593년 7월 25일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개신교를 버리고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대다수 신민의 충성을 확보했다
1594년 2월 27일 랭스가 카톨릭 동맹의 손에 있었기에 앙리 4세는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3월 22일 앙리 4세가 파리에 입성했다
1595년 9월 17일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앙리에 대한 파문을 해제했다
1597년 5월 13일-9월 25일 아미앵 공성전 : 3월 11일 스페인군이 도시를 점령하자 앙리 4세는 즉각 군대를 보내 아미앵을 포위했다. 스페인 구원군이 프랑스군 격퇴에 번번이 실패하여 절망한 스페인 농성군은 프랑스군에 항복했다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가 프랑스 종교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낭트 칙령을 발표했다
5월 2일 베르벵 화약 :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대표자 간에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 종교 전쟁이 사실상 종식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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