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801-900년)

800년 12월 25일 샤를마뉴가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로 즉위했다

811년 샤를마뉴와 덴마크 왕 헤밍 사이에 하일리겐 조약이 체결되어 덴마크와 프랑크 제국의 경계를 설정했다
812년 코르도바 에미르 알하캄 1세가 스페인의 프랑크 정복지를 인정했다

806년 샤를마뉴의 세 아들에게 할당된 프랑크 제국의 영토. 프랑크 상속법(살리카 법)은 영토와 재산을 아들들(딸은 제외)에게 균등하게 분할하는 상속제였다. 이러한 관습은 왕국을 약화시키고 내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가 이러한 전철을 밟았고, 카롤링거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도 피핀이 810년에, 샤를이 811년에 사망하면서 루이 1세는 온전한 제국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814년 1월 28일 샤를마뉴가 사망하고 그의 유일한 적자인 경건왕 루이(루도비쿠스 피우스) 1세가 제국을 계승했다
840년 6월 20일 경건왕 루이 1세가 사망하자 장남 로테르(로타리우스) 1세가 두 동생인 독일왕 루트비히(루도비쿠스 게르마니쿠스) 2세와 대머리왕 샤를(카롤루스 칼부스) 2세를 제치고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841년 6월 25일 퐁트누아 전투 : 로테르 1세와 아키텐의 피핀 2세의 연합군이 루트비히 2세와 샤를 2세의 군대에게 패했다
바이킹 족장 아스게이르가 서프랑크를 습격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 : 독일왕 루트비히 2세와 대머리왕 샤를 2세가 연합한 동맹군의 승리는 로테르 1세를 프랑크 제국 분할 협상으로 몰아넣었다. 이 조약으로 제국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어 대머리왕 샤를에게 서프랑크 왕국이, 로테르 1세에게 황제관(명목상)과 중프랑크 왕국이, 독일왕 루트비히에게 동프랑크 왕국이 돌아갔고, 이로써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845년 바이킹 족장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파리를 습격했다


855년 9월 19일 프륌 조약 : 병이 위중한 로테르 1세가 아들들에게 왕국을 분할했다. 장남 루도비코(루도비쿠스 유니오르) 2세에게는 황제관과 이탈리아가, 로테르 2세에게는 프리지아와 아우스트라시아 지역이, 막내 샤를에게는 프로방스와 부르고뉴가 돌아갔다

870년 8월 8일 메르센 조약 : 로테르 2세가 869년에 사망하자 그 영토가 서프랑크와 동프랑크 사이에 분할 합병되었다
875년 12월 25일 루도비코 2세가 사망하자,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대머리왕 샤를 2세가 카롤링거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876년 10월 8일 안더나흐 전투 : 독일왕 루트비히 2세가 사망한 후, 대머리왕 샤를 2세는 안더나흐 전투에서 루트비히 2세의 후계자인 바이에른의 카를만(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에게 큰 패배를 당했다. 이 전투는 고인이 된 형제의 왕국을 정복하려는 시도였다
877년 10월 6일 카를만의 군대로부터 이탈리아 북부를 탈출하던 대머리왕 샤를 2세가 병에 걸려 사망했다. 아들 말더듬이왕 루이(루도비쿠스 발부스) 2세가 뒤를 이어 서프랑크의 왕이 되었다
879년 4월 10일 말더듬이왕 루이 2세가 병으로 사망했다. 두 아들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가 뒤를 이어 서프랑크의 공동 왕이 되었다
바이에른의 카를만은 병이 위중해지자 바이에른을 루트비히 3세에게, 이탈리아를 비만왕 카를 3세에게 양도했다

880년 3월 루이 3세와 샤를로망 2세는 아미앵에서 왕국을 나누는 조약에 서명했다. 루이 3세는 네우스트리아를, 샤를로망 2세는 부르고뉴와 아키텐을 획득했다
882년 1월 20일 루트비히 3세가 사망하고 비만왕 카를 3세가 동프랑크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8월 5일 루이 3세가 사망하고 샤를로망 2세가 서프랑크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서프랑크의 외드가 파리 백작(콩트)으로 임명되었다
884년 12월 12일 샤를로망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사촌이자 동프랑크 왕인 비만왕 카를(독일왕 루트비히 2세의 막내아들) 3세가 서프랑크를 성공적으로 계승하여 사망할 때까지 온전한 카롤링거 제국을 부활시켰다

885-886년 바이킹의 파리 포위 공격 : 서프랑크의 외드가 성공적으로 도시를 방어했다
888년 1월 13일 비만왕 카를 3세가 합법적이거나 인정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제국은 분열되어 다시는 재통합되지 못했다

2월 서프랑크의 외드가 노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성공한 공로로 서프랑크의 왕으로 즉위했다. 라눌프 2세가 아키텐의 왕이 되었다
898년 1월 1일 서프랑크의 외드가 생존한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말더듬이왕 루이 2세의 아들 단순왕 샤를(카롤루스 심플렉스) 3세가 서프랑크의 왕으로 선포되었고, 카롤링거 왕조는 다시 프랑스의 통치자가 되었다
10세기 (901-1000년)

911년 단순왕 샤를 3세는 바이킹의 왕 롤로와 생클레르쉬레프트 조약을 체결하여 노르망디 공국이 될 지역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922년 단순왕 샤를 3세는 귀족 반란으로 전복되었고 외드의 동생인 로베르 1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923년 6월 15일 수아송 전투 : 로베르가 전사했지만, 단순왕 샤를 3세는 로베르의 사위인 부르고뉴 공작 로돌프에게 포로로 잡혔다
로돌프는 귀족 회의에서 프랑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부르고뉴 공국을 동생에게 맡겼다
로타링기아가 동프랑크로 넘어갔다
936년 1월 15일 로돌프가 사망하고 단순왕 루이 3세의 아들인 도래왕 루이(루도비쿠스 트란스마리누스) 4세가 왕위에 올랐다
954년 9월 10일 도래왕 루이 4세가 사망했다. 아들 로테르가 왕위를 계승했다
986년 3월 1일 로테르가 사망하고 아들 무위왕(Fainéant) 루이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987년 5월 21일 무위왕 루이 5세가 후계자가 없이 사망했다. 고귀한 혈통과 군사적 성공을 인정받은 위그 카페가 후계자로 선택되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를 끝나고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996년 10월 24일 위그 카페가 사망했다. 후계자는 아들 경건왕 로베르 2세였다
11세기 (1001-1100년)

1015년 경건왕 로베르 2세가 부르고뉴 공국을 왕실 영토에 합병했다
1016년 7월 6일 퐁틀부아 전투 : 투렌을 둘러싸고 앙주 백작 검은 풀크 3세와 멘 백작 에르베르 1세의 군대와 블루아 백작 외드 2세의 군대가 격돌했다. 에르베르 1세의 도움으로 풀크 3세가 승리하고 투렌을 장악했다

1022년 오를레앙 이단 사건 : 이단으로 판결받은 무리에 프랑스 왕비 아를의 콩스탕스를 담당했던 고해성사관 스테판이 포함되어 있었다
1031년 7월 20일 경건왕 로베르 2세가 아들들과의 내전에서 사망했다. 둘째 아들 앙리 1세가 왕위를 이었고, 모후 콩스탕스의 부추김을 받은 셋째 아들 로베르 1세 카페가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하며 새로운 반란을 일으켰다
1032년 앙리 1세가 부르고뉴 공국의 합병을 번복하고 동생 로베르 1세 카페에게 공국을 넘겨줌으로써 평화를 얻었다

1047년 발레스듄 전투 : 노르망디 공작 사생아 윌리엄 1세와 프랑스 왕 앙리 1세의 연합군이 윌리엄의 사촌 브리옹의 기가 이끄는 노르망디 반란군과 싸워 승리했다
1051년 5월 19일 앙리 1세가 키이우 루스의 대공인 현명공 야로슬라프의 딸 안나와 결혼했다. 그녀가 장남에게 그리스 이름인 필립(프랑스식 필리프)을 지어주면서 서유럽 왕실에 이 이름을 도입했다
1054년 모르테메르 전투 : 앙리 1세가 노르망디 공작 사생아 윌리엄 1세를 공격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은 뒤 다시는 공격하지 않았다
1060년 8월 4일 앙리 1세가 사망하고 왕위는 일곱 살 난 아들 필리프 1세에게 넘어갔다. 모후 키이우의 안나가 섭정을 맡았다
1066년 필리프 1세가 성년이 되었다

9월 27일 노르망디 공작 사생아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향해 출항했다
1095년 11월 17-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프랑스 출신)가 기독교 세계를 위한 성지 탈환을 촉구했다

1096년 8월 15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의 영주들이 이끄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12세기 (1101-1200년)
1108년 7월 29일 필리프 1세가 사망하고 아들 뚱보왕 루이 6세가 왕위에 올랐다

1109년 잉글랜드 왕 헨리 1세가 합의를 어기고 지조르 성채를 점령하자 분쟁이 발생했다. 이 분쟁은 프랑스 왕에게 불만을 품은 영주들이 헨리 1세와 연합하며 확대되었고 1120년 11월 교황의 중재가 있기까지 간헐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지조르가 노르망디에 속하는 대신 루이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21년 센 강 무역 규제 : 뚱보왕 루이 6세가 상인들에게 와인을 실은 배 한 척당 60수(3리브르)의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허용했다. 이는 1170년 루이 7세의 수자원 상인 한자동맹(Hanse des marchands de l'eau) 칙령으로 이어진다
1128년 앙주 백작 조프레 플랑타주네(제프리 플랜태저넷)와 헨리 1세의 딸 마틸다가 결혼했다
1131년 10월 25일 뚱보왕 루이 6세의 아들이자 장래의 루이 7세인 소 루이가 하급 왕이자 왕위 계승자로 즉위했다
1137년 7월 22일 루이 7세가 엘레오노르 공작과의 정치적 결혼으로 아키텐 공작이 되었다
8월 1일 뚱보왕 루이 6세가 사망하고 루이 7세가 왕이 되었다

1147년 6월 루이 7세가 왕비 엘레오노르와 함께 제2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1148년 3월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뒤 엘레오노르가 무슬림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던 그녀의 숙부이자 에데사 대공인 레몽 드 푸아티에를 돕자고 했지만 루이 7세가 거부하며 부부간 관계가 악화되었다
1149년 11월 별다른 성과 없이 원정에서 발을 뺀 루이 7세가 파리에 도착했다

제프리 획득 : 1144년 이전 멘, 앙주, 투렌 백작. 1144년 노르망디 공작
헨리 2세 획득: 1152년 아키텐 공작. 1154년 잉글랜드 왕위 계승. 1166년 브르타뉴 공작 강제 퇴위 및 계승한 딸을 자신의 아들과 혼약
1152년 3월 21일 루이 7세와 아들을 낳지 못한 엘레오노르와의 결혼이 무효화되었다. 이후 그녀는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결혼했다
1180년 9월 18일 루이 7세가 사망하고 세 번의 결혼 끝에 낳은 독자 존엄왕(오귀스트) 필리프 2세가 왕위에 올랐다
1190년 필리프 2세가 최초로 프랑스 왕 "렉스 프랑키아이"(이전까지 프랑크 왕 "렉스 프랑코룸")을 칭하고 파리 성벽을 축조했다

9월 4일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1191년 존엄왕 필리프 2세가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연말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1194년 5월-1199년 1월 잉글랜드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존엄왕 필리프 2세와의 전쟁
13세기 (1201-1300년)

1204년 3월 6일 존엄왕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 방어선의 요충지 가이야르 성채를 점령했다
8월 노르망디가 점령되어 프랑스 왕실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1214년 7월 27일 부빈 전투 : 존엄왕 필리프 2세의 프랑스 군대가 존 왕이 이끄는 잉글랜드-플랑드르 연합군을 물리치고 앙주, 브르타뉴, 멘, 노르망디, 투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1216년 5월 21일 존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의 요청으로 필리프 2세의 아들 루이(사자왕 루이 8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6월 2일 런던에서 루이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10월 존 왕이 사망하고 아들 헨리 3세가 계승하자 잉글랜드 반란 귀족들이 이탈했다
1217년 9월 11일 잉글랜드 내전에서 패배한 루이가 왕위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1219년 루이가 필리프 2세의 동의 하에 알비 십자군 원정을 이끌게 되었다

1223년 7월 14일 필리프 2세가 사망하고 아들 사자왕 루이 8세가 왕위에 올랐다
1226년 11월 8일 사자왕 루이 8세가 사망하고 아들 성왕(聖王) 루이 9세가 뒤를 이었다
1229년 4월 12일 파리 조약 : 성왕 루이 9세와 툴루즈의 레몽 7세가 조약을 통해 알비 십자군이 종식되었고 영지 북부 랑그도크를 루이 9세에게 양도했다. 레몽 7세의 딸과 루이 9세의 동생 알퐁스가 결혼하게 되었다
1241년 6월 성왕 루이 9세가 푸아티에 백작령이 동생 알퐁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부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이 승리했다면 그 영토를 상속받았을 앙굴렘의 이자벨의 아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1242년 5월 20일 생통 전쟁 :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이자벨의 푸아티에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1248년 4월 26일 왕실예배당 생트샤펠이 봉헌되었다
성왕 루이 9세가 제7차 십자군 원정을 떠났다

1250년 4월 6일 성왕 루이 9세가 파리스크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5월 8일 몸값을 지불하고 이집트를 다시 공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한 뒤 아크레로 떠났다
1254년 7월 4년간 예루살렘 왕국을 강화하는데 힘을 쓴 성왕 루이 9세가 프랑스로 귀국했다

1258년 5월 11일 코르베유 조약 : 성왕 루이 9세와 아라곤 왕 차이메 1세가 조약을 통해 피레네 산맥 이북의 옥시타니아 영지 일부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프랑스는 카탈루냐(히스파니아 변경백령)에 대한 주권 행사를 포기하게 했다

1259년 12월 4일 파리 조약 : 성왕 루이 9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3세가 조약을 통해 아키텐을 제외한 프랑스 내 영토를 포기하기로 동의하고 프랑스는 잉글랜드 반란군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또한 헨리 3세가 아키텐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한 공국에 대한 직접 통치를 인정했다
1270년 8월 25일 성왕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 원정을 이끌었지만 이질로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는 아들 용맹왕 필리프 3세였다
1284년 용맹왕 필리프 3세가 아라곤 십자군을 이끌었다
8월 16일 필리프 3세의 아들 필리프가 나바라의 여왕 호아나 1세와 결혼했다
1285년 10월 5일 페르피냥에서 용맹왕 필리프 3세가 이질로 사망하고 아들 미남왕 필리프 4세가 왕위에 올랐다

1293-1298년 잉글랜드와 프랑스 선원들 간의 분쟁을 시작으로 왕실 직할령인 라로셸이 약탈당하자 필리프 4세가 에드워드 1세를 프랑스 궁정으로 소환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이후 프랑스가 협상을 어기고 영토를 몰수하자 에드워드 1세는 봉신 신분을 포기하면서 전쟁이 벌어졌다. 잉글랜드는 플랑드르와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프랑스는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맺어 잉글랜드에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1297년 루이 9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 의해 시성 되었으며, 이후 성 루이(그 이름을 딴 미국 도시 "세인트루이스")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성인으로 선포된 유일한 프랑스 군주이다
1299년 몽트뢰유쉬르메르 조약 : 에드워드 1세의 아들 에드워드 왕자와 필리프 4세의 딸 이자벨의 약혼을 규정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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