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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고대 이야기/이스라엘

[남유다] 요시야

by 금곡동로사 2021.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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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아 왕, by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9세기

 

요시야 또는 요시야후는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주요 종교 개혁을 제정한 남유다의 열여섯 번째 왕(BC 640-609 경)이었다. 요시야는 대부분의 성서 학자들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신명 개혁"기간 동안 중요한 히브리어 경전을 수립하거나 편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 왕이 암살된 후 여덟 살에 유다의 왕이 되었다. 요시야는 BC 641/640에서 610/609까지 31년 동안 통치했다.

 

요시야는 성경 본문에서만 알려져 있다. 그에 대한 언급은 이집트나 바빌론의 다른 남아있는 문헌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과 같은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가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문서가 없는 것은 이 시대부터 남아있는 어떤 종류의 문서도 거의 없으며 예루살렘이 수천 년에 걸쳐 점령, 정복, 재건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성경적 이야기

 

성경은 그를 의로운 왕으로, "조상 다윗의 길을 따라 걸었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왕하 22:2, 대하 34:2)라고 묘사했다. 그는 또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에 언급된 왕들 중 하나이며 신약에서 예수님의 두 가지 다른 족보 중 하나이다.

 

가족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요시야는 아몬 왕과 보스갓 아다야의 딸 여디다의 아들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는 야훼를 숭배하는 일에서 돌아선 왕 중 한 사람이었다. 므낫세는 우상 숭배를 위해 성전을 개조했다. 요시야의 증조부 히스기야 왕은 성경에서 "다윗이 한 것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한 것"으로 존경받는 저명한 개혁자였다(왕하 18:3, 대하 29:2).

 

요시야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요하난과 엘리아김의 어머니는 루마 브다야의 딸 스비다였다. 시드기야와 살룸의 어머니는 립나 예레미야의 딸 하무달이었다(대상 3:15, 왕하 23:36, 24:18, 23:31). 엘리아김은 이집트의 파라오 네카우에 의해 그의 이름이 여호야김으로 변경되었다(왕하 23:34).

 

그의 막내아들 살룸은 여호아하스라는 이름으로 요시야의 뒤를 이어 유다의 왕이 되었다(대상 3:15, 렘 22:11). 살룸의 뒤를 이어 여호야김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엘리아김이 계승했다(대하 36:4). 여호야김의 뒤를 아들 여고냐가 계승했으며(대상 3:16, 대하 36:8) 이후 시드기야라는 이름으로 그의 숙부 맛다니야가 왕위를 계승했다(왕하 24:17). 시드기야는 왕국이 바빌론에 의해 정복되고 백성이 추방되기 전에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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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역대 하에는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 여덟 살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통치 8년째에 그는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그 통치 12년째에 예루살렘과 유다 전역에서 바알 제단과 형상을 파괴하는 정책을 시작했다(대하 34:1-4). 역대에서는 이 정책의 실행을 자세히 기록하는 반면, 열왕기 하의 기록은 예루살렘 성전 복원으로 시작되며, 두 기록 모두 그의 통치 18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왕하 22:3, 대하 34:8).

 

요시아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수년 동안 모아 온 세금을 성전 수리에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힐기야가 성전의 보물 방을 소제하는 동안 그는 열왕기 하에서 "율법책"으로(왕하 22:8-11), 역대 하에서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으로(대하 34:14) 묘사된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왕하 22:8의 sefer ha-torah(ספר התורה)라는 구는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받은 성스러운 기록을 설명하기 위해 여호수아 1:8과 8:34에 사용된 구와 동일하다. 이 책은 본문에서 토라로 식별되지 않으며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신명기의 사본이거나 신명기의 일부가 된 문헌이라고 추정한다.

 

율법책을 듣는 요시야를 그린 삽화, 1873년 / 요시야 시대 확장한 영역

 

힐기야는 이 두루마리를 요시야에게 가져왔다. 요시야는 여선자 훌다에게 자문을 했는데 그녀는 그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문서에 예언된 해악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의 시대에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네 마음이 부드럽고 네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장로와 모든 백성의 모임이 소집되었고 요시야는 다른 모든 형태의 숭배를 금지하면서 야훼의 전적인 숭배를 장려했다. 바알 숭배와 "일월성신" 숭배의 도구와 상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거되었다. 남쪽의 브엘세바에서 북쪽의 벧엘과 사마리아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지역 성소 즉 숭배 장소가 파괴되었다. 요시야는 이교도 제사장들을 처형했고 심지어 벧엘의 죽은 제사장들의 뼈를 무덤에서 발굴하여 제단에서 불태웠다. 요시야는 또한 유월절 축제를 재건했다.

 

열왕기 상 13:1-3에 따르면 이름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때로는 잇도로 알려짐)이 약 300년 전에 북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의 여로보암 왕에게 "요시아라는 아들이 다윗의 집에서 태어나고" 그는 벧엘에 있는 제단을 파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이 멸망의 유일한 예외는 그가 벧엘에서 발견한 이름 없는 선지자의 무덤(왕하 23:15-19)이었다. 그는 여로보암이 세운 종교적 장소가 언젠가는 멸망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왕상 13장 참조). 요시야 때 이 예언이 실현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과 벧엘 선지자의 두 개의 무덤을 남겨 두라고 명령했다.

 

요시야의 개혁은 두 개의 성경 기록 즉 왕하 22-23장과 대하 34-35장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중앙 집중화하고 벧엘 성전을 파괴했다.

 

역대기 하의 기록에 따르면, 요시야는 므낫세, 에브라임, "시므온과 납달리까지"(대하 34:6-7) 지파의 도시에 있는 이교 신들의 제단과 이미지를 파괴했으며 언약궤를 성전으로 돌려보냈다(대하 35:1-4).

 

3D 모델링된 솔로몬 성전과 안뜰과 궁전 / 유대 경전 타나크를 기반으로 한 솔로몬 성전의 단면도 / 3D 모델링된 지붕을 제거한 솔로몬 성전

 

대외 관계

 

BC 641/640년 경에 요시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 국제 상황은 유동적이었다. 아시리아 제국은 붕괴되기 시작했고 신 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서쪽에 있는 이집트는 아시리아 지배에서 회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권력 공백 속에서 예루살렘은 외세의 개입 없이 당분간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었다.

 

BC 609년 봄, 파라오 네카우 2세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는 아시리아인을 돕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까지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이끌었다. 주로 용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의 수장으로 비아 마리스를 통해 시리아로 가는 해안 경로로 해안을 따라있는 지중해 함대의 지원을 받아 네카우는 블레셋과 샤론의 저지대를 통과했다. 그러나 거대한 이스르엘 계곡 남쪽에 있는 산등성이의 통로는 요시아가 이끄는 유대 군대에 의해 막혔다. 요시아는 1년 전(BC 610년) 파라오 프삼티크 1세의 죽음으로 아시리아인과 이집트인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프삼티크는 아시리아 왕 에사르하돈과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임명되고 확인되었다. 요시야는 므깃도에서 진군을 막으려 했지만 치열한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런 다음 네카우는 아시리아의 아슈르우발리트 2세와 힘을 합쳐 유프라테스를 건너 하란을 포위했다. 연합군은 도시를 점령하지 못했고 네카우는 시리아 북부로 후퇴했다.

 

죽음

 

성경에는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다. 열왕기 하에서는 단지 느고(네카우 2세)가 므깃도 전투에서 요시야를 만나 그를 죽였다고(왕하 23:29) 되어 있는 반면, 역대 하(대하 35:20-27)에서는 요시야가 이집트 궁수들에게 치명상을 입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죽었다고 더 긴 설명을 제공한다. 역대 하의 기록에서 그의 죽음은 네카우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느고가 말한 것을 듣지 않고..."라고 말했을 때 그에게 기인한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 35:21) 대하 35:25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죽음에 대해 애가를 썼다.

 

파라오 네카우 2세의 조각 / 파라오 네카우는 아시리아를 돕기 위해 출발했으며 요시야 왕은 므깃도에서 진군을 막았다. 네카우는 전투에서 요시야에게 승리하고 계속 진군했다.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연합군이 아시리아를 공격하여 하란에서 승리했다. 네카우는 너무 늦게 도착하여 카르케미시에서 아시리아를 지원했으나 도시는 메디아와 바빌로니아 군에 함락되었다.
고대 므깃도의 모습 / 므깃도 전투를 묘사한 그림, 궁수가 쏜 화살을 맞은 요시야 / 요시야의 죽음, by 프란체스코 콘티, 18세기
병거에 실려 예루살렘으로 가는 요시야

 

계승

 

하란의 좌절 후 네카우는 상당한 군대를 남겨두고 이집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네카우는 여호아하스가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선택되었음을 알게 되었다(왕하 23:31). 네카우는 왕이 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던 여호아하스를 물러나게 하고 형 여호야김으로 대신했다. 네카우는 유다에 은 100 달란트(약 3과 3⁄4 톤 또는 약 3.4 미터톤)와 금 1 달란트(약 75 파운드 또는 약 34 킬로그램)를 부과했다. 그런 다음 네카우는 여호아하스를 포로로 삼아 이집트로 데려갔다. 므깃도에서의 요시야의 패배는 본질적으로 다윗 가계의 통치의 종말을 나타낸다. 요시야의 후계자들은 수명이 짧았을 뿐만 아니라 유다의 상대적 독립성은 이 지역에 대한 전통적인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는 이집트의 부활과 또한 곧이어 부상한 바빌로니아 제국이 지배권을 추구하면서 무너졌다.

 

네카우는 BC 609년에 바빌로니아의 포위 공격을 받고 있는 아시리아의 하란을 지원하기 위해 이집트를 출발했다. 요시야의 행동은 이집트 군대와 교전함으로써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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