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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aber est quisque fortunae suae" - Appius Claudius Caecus
전쟁 이야기/십자군

노르웨이 십자군

by 금곡동로사 2021.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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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선 : 시구르드의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여정 경로, 녹색 선 : 노르웨이로 귀국 경로

 

노르웨이 왕 시구르드 1세가 이끄는 노르웨이 십자군은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여파로 1107년부터 1111년까지 지속된 십자군 또는 순례 여정이었다. 노르웨이 십자군은 유럽의 왕이 직접 성지를 방문한 첫 번째 기록이다.

 

 

예루살렘으로의 여정

 

노르웨이에서 잉글랜드로 (1107-08)

 

시구르드와 그의 부하들은 1107년 가을에 노르웨이에서 60척의 배에 약 5,000명의 군인들을 싣고 항해했다. 가을에 그는 헨리 1세가 왕이었던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시구르드와 그의 부하들은 1108년 봄 다시 서쪽으로 항해할 때까지 겨울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이베리아 본토에서 (1108–09)

 

몇 달 후, 그들은 갈리시아(갈리줄란드)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야콥스란드) 마을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지역 영주로부터 겨울 동안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식량이 부족해져 영주는 노르웨이군에게 음식과 물건을 팔기를 거부했다. 시구르드는 군대를 모아 영주의 성을 공격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약탈했다. 지역 영주 또는 백작의 신원은 불분명하다.

 

봄에 그들은 포르투갈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8척의 사라센 갤리선을 나포하고, 신트라(아마도 바다에 가까운 Colares를 지칭)의 성을 정복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기독교와 무슬림 이베리아 사이의 경계선에 있다고 말하는 "반은 기독교이고 반은 이교도" 도시인 리스본으로 계속 항해하여 또 다른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들은 계속된 여정에서 알카세(아마도 Alcácer do Sal) 마을을 약탈한 다음 지중해로 들어가는 도중에 지브롤터 해협(노르파준드) 근처에서 무슬림 함대를 만나 격파했다.

 

1000년 경 이베리아의 세력도와 1100년 경 이베리아의 세력도

 

발레아루스에서 (1109)

 

지중해(그릭클란즈 하비)로 들어간 후, 그들은 사라센(세르클란드)의 해안을 따라 발레아루스 제도까지 항해했다. 발레아루스는 당시 기독교인에게 해적의 안식처이자 노예 중심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인식되었다. 노르웨이군의 습격은 기독교인이 무슬림 발레아루스 제도에 가한 최초의 공격으로 기록되었다(소규모 공격이 확실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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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처음 도착한 곳은 포르멘테라 섬으로, 그곳에서 그들은 동굴에서 거주한 많은 블랑멘(청색 또는 흑인)과 세르키르(사라센인)를 만났다. 싸움의 과정은 서면 자료를 통해 전체 십자군 전쟁 중 가장 상세하며, 아마도 이 작은 섬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일 것이다. 이 전투가 끝난 후, 노르웨이군은 그들이 획득한 것 중 가장 최고의 보물을 얻었다고 추측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이비자와 메노르카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노르웨이군은 발레아루스 제도의 가장 큰 섬인 마요르카에 대한 공격을 피한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이곳은 독립된 타이파 왕국의 가장 번영하고 잘 요새화 된 중심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성공담은 1113-1115년 사이 카탈로니아 피사의 발레아루스 정복에 영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시칠리아에서 (1109-10)

 

1109년 봄, 그들은 시칠리아(시킬레이야르)에 도착했고, 당시 12-13세였던 지배자 루제루 2세 백작의 환영을 받았다.

 

11세기와 12세기 스칸디나비아 전사들과 병장기 / 블랑멘을 묘사한 그림
시구르드 1세의 예루살렘 입성, by 게르하르트 문데, 1899년 / 시구르드 1세와 보두앵 1세가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서 요르단 강으로 가고 있는 삽화, 아래에 시구르드의 함대가 그려져 있다, by 게르하르트 문데, 1899년

 

예루살렘 왕국 (1110)

 

1110년 여름, 그들은 마침내 아코/아크레(아케스보르그) 항(또는 아마도 야파 항)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요르살라)으로 가서 통치자 십자군 왕 보두앵 1세를 만났다.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보두앵은 시구르드와 함께 요르단 강으로 갔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노르웨이군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알려진 참 십자가의 파편을 포함하여 많은 보물과 유물을 받았다. 이것은 그들이 계속해서 기독교를 장려하고 그 유물을 성 올라프의 매장지로 가져가는 것을 조건으로 주어졌다.

 

시돈 공성전 (1110)

 

보두앵은 해안에서 무슬림이 장악하고 있는 항구를 점령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시구르드의 대답은 "그들은 그리스도의 섬김에 헌신할 목적으로 왔다"는 것이었다. 시구르드는 1098년 파티마에 의해 다시 요새화 된 시돈(싸트)을 차지하기 위해 그와 동행하였다.

 

보두앵의 군대는 육로로 도시를 포위했고, 노르웨이군은 해로로 왔다. 티레에 있는 파티마 함대의 지원을 막기 위해 해군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베네치아 함대가 운 좋게 도착해야만 가능했다. 기록에 따르면 투석기의 돌에 건물이 파괴되었고 노르웨이군이 성벽을 올라갔으며 도시는 47일 만에 함락되었다.

 

도시가 항복했을 때, 보두앵은 이전에 아르수프와 아코에 했던 것과 같은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그는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안전한 통행을 허용했고 심지어 일부 무슬림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허용했다.

 

시돈의 통치권은 나중에 예루살렘 왕국의 원수가 된 유스타스 그레니에에게 주어졌다.

 

 

노르웨이로 돌아가는 여정

 

그 뒤에, 시구르드와 그의 부하들은 콘스탄티노플(미클라가르드)을 향해 항해하였다. 그곳에서 시구르드가 그의 모든 배와 귀중한 인물들, 그리고 많은 부하들을 남겨두고 육로로 노르웨이에 돌아갔으며 1111년에 도착했다.

 

 

 

출처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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